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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현장 > 동북아시아 등록일 2006-09-29
작성자 관리자 (admin)
중국 조선족의 이해
출처 : 예랑선교회
조선족자치주는 면적 4만 3547㎢, 인구 219만 5000명(1998)이다. 주도(州都)는 연길시[延吉市]이다. 조선 말기부터 한국인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이전에는 북간도라고 불렀다. 1952년 9월 3일에 자치구가 설립되고, 1955년 12월에 자치주로 승격되었다.
옌지[延吉]·투먼[圖們]·둔화[敦化]·허룽[和龍]·룽징[龍井]·훈춘[琿春]의 6개 시와 왕칭[汪淸]·안투[安圖] 2개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 중 조선족이 41%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한족(漢族)·만주족(滿州族)·후이족[回族]의 순이다.

지린성 동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헤이룽장성[黑龍江省]과 접한다.
창바이산맥[長白山脈]과 라오예링산맥[老爺嶺山脈] 경내로 뻗어 있고, 그 사이에 옌지분지가 펼쳐진다.
이 때문에 해발고도 500∼1,000m 지점이 많다. 이 산지에서 흘러나오는 하천은 둥베이수계[東北水系]의 근원이 된다.

주요 하천으로는 투먼강·쑹화강[松花江]·무단강[牡丹江]·쑤이펀강[綏芬江] 등이 있다.
투먼강 유역에 있는 중국의 국제개발지인 훈춘 경제개발지를 ‘동북아 금삼각주(東北亞金三角州)’라고 부른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이나 변화가 잦고, 강수량은 산지가 많기 때문에 하천의 수량이 풍부하다. 연평균기온 2∼6℃, 1월 평균기온 -14.1℃, 7월 평균기온 21.6℃, 연평균강수량은 500∼700mm이다. 농업은 주로 곡저평지(谷底平地)에서 이루어지며, 쌀·콩·조 등의 곡물을 생산한다.
특히 벼농사는 한국인이 이주한 뒤에 발달하였으며, 90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또 잎담배는 지린성 생산량의 4분의 5를 생산하며, 그밖에 특산물인 인삼과 과일도 많이 난다.
산지에는 삼림이 우거져 중국의 중요한 임업지대를 이룬다.
투먼·둔화·다스터우[大石頭]에 3대 제재소가 있으며, 그 밖의 여러 곳에서 목재공업이 이루어진다.
또 이 목재를 원료로 하는 제지공장이 투먼·스옌[石硯]·카이산툰[開山屯] 등에 산재한다.
동부에는 각종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으며, 그 중 허룽과 훈춘의 석탄, 왕칭의 오일셰일(유혈암), 톈바오산[天寶山]의 구리·납, 훈춘의 금 채굴이 손꼽힌다.
공업으로는 농업기계·철강·정유·전자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지며, 공장은 옌지 등의 시 지역에 분포한다.

교통은 창춘[長春]·지린·투먼을 잇는 창투철도[長圖鐵道]가 지역안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옌지에서 허룽과 카이산툰으로 지선(支線)이 분기한다.
또 투먼에서 무단강과 함경북도 온성(穩城)으로 통하는 무투철도[牡圖鐵道]가 갈라진다.
도로는 철도를 따라 뻗어 있는데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항공편으로는 옌지공항이 있는데, 국내선으로는 베이징·창춘·선양까지 운항하고, 국제선으로는 한국 부산까지 운항한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으므로 청산리 항일전승지(靑山里抗日戰勝地)·봉오동(鳳梧洞) 항일전승지·일송정(一松亭) 등 유적지가 많다.
그밖에 백두산천지·정줴사[正覺寺]·전샤오공주묘 [眞孝公主墓]·룽후석조각[龍虎石刻]·이커당아비[依克唐阿碑]·시구청[西古城]·아오둥청[敖東城]·바롄청[八連城] 등의 고대유적이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연변대학·연변의과학원·연변사범대학·연변예술학원·농업학원 등이 있다.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의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 등 삼성(三省)과 그 밖의 중국땅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는 한족(韓族) 혈통을 지닌 중국 국적의 주민들을 말한다.

한말(韓末)에 외세의 침노로 한국의 국권이 흔들리면서 나라 안팎이 어지러워지자,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조국을 등지고 둥베이 지방과 러시아의 시베리아로 이주해 가는 한국교포의 수가 갑자기 늘어났다.
이 유민(流民)의 행렬은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면서 더욱 늘어났다. 게다가 토지조사 등의 명목으로 일제가 한국인의 농토를 잠식하고 강제수탈하자 땅을 잃은 농민과 생업을 상실한 유랑민은 더욱 그 수효가 늘어나서 전국에서 만주(滿洲)로 흘러 들어갔다.

이 유민의 대열에는 조국 광복과 국권회복을 다짐하며, 독립투쟁을 하기 위하여 조국으로부터 망명해 가는 독립운동가도 많았다.
여러 경로로 만주 땅에 흘러든 이들 한교(韓僑)들은, 거기에서 불모지를 개간하고 산림을 개척하여 어렵게 생활 터전을 닦아 나갔다.
그렇게 해서 마련된 한인 마을에는 독립군이 뿌리를 내리었고,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교민들의 개간생활과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투쟁이 연계를 이루고 어울려 이어져 갔다.

일제에 의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만주가 더욱 개척되면서 한국인의 이주는 더더욱 활발해졌다.
한국에서 나는 쌀 약 1,500만 섬 중 1,000만 섬 이상을 일제가 수탈해 가니, 절량(絶量)에 허덕이는 한국 농민은 개간할 황무지가 있는 만주로 몰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8·15광복으로 일제가 패망하였을 때에는 본국에 생활근거가 없는 조선인이, 조국 귀환을 못하고 만주에 무수히 처져 남게 되었다.
이들이 조선족의 1세대요 거기서 난 자손이 2세대들이 되었다.
게다가 조국이 3·8선 때문에 남북으로 갈리고, 이념과 체제가 다른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자, 조선족의 일부는 중국정권과 밀착된 북한으로 들어갔고, 상당수의 조선족은 그대로 둥베이 지방을 비롯한 중국 땅에 처져서 어렵고 가난한 생활을 해오고 있다.
현재 독립운동가의 유족들을 포함한 약 200만 정도로 추산되는 조선족은 국적이 중국인이므로 모국에의 귀환이 성사되기 어려운 현 상황에서는 중국 땅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으로서 그곳에 착실하게 정착해 가는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는 상태로 나날이 중국화되어 가고 있다.

목전 동북아지역 조선족의 분포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19세기중엽부터 시작된 몇 차례 조선족 대이동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조선족이 언제부터 이동하기 시작했는가, 어떤 시대배경과 사회원인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깊이 연구하고 탐구할 가치가 있다. 동북아 조선족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보면 조선족의 이동은 대체적으로 3개 단계를 거쳤다.
제1단계는 19세기중엽으로부터 1910년 《한일합병》까지로서 조선족은 주로 중국 동북으로 이사왔다.
제2단계는 《일한합병》으로부터 1931년의 《9.18》만주사변 전야까지이고,
제3단계는 《9.18》만주사변으로부터 1945년 제2차 대전 종말까지로서 동북아지역의 조선족분포가 거의 형성되었다.

제1단계 조선족의 이동과 우리나라 동북에 분포된 상황을 보면 1906년까지 조선족은 서쪽의 안동, 흥경(興京), 류하로부터 돈화 일선의 남부지역에 국한되여 있어 서북쪽으로는 휘발하(煇發河), 동쪽으로는 녕고탑(寧古塔)과 목릉하(穆稜河) 일선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1907년에는 연변을 중심으로 하여 로야령(勞爺岺)을 넘어 목단강연안과 삼성(三姓)지방 즉 동북경내지로 점차 이주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동북에 이주해온 조선족인수가 부쩍 늘어났다.
1894년까지만 해도 도합 7만 8,000인이던 조선족인구가 1910년에는 10만 9,000인으로 늘어났다.
연변지역의 조선족은 1904년의 5만여명으로부터 1909년의 18만 4,867인으로 늘어나 당지의 만족, 한족을 초과했다.

한일합병으로 망국 노의 운명을 벗기 위해 대량의 조선인민들이 다투어 동북아 여러 나라로 이주해갔다.
이는 조선족이 동북아 여러나라로 이주해간 제2단계이다.
이시기는 주로 정치원인으로 하여 이주해갔다.
조선족은 그냥 우리나라 동북으로 이주해오는 동시에 다른 나라로 이주해가기 시작했다. 특히는 1919년 《3.1》운동 후 수많은 애국지사, 독립군과 반일군중들이 동북으로 흘러들었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발동, 동북은 점차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일본제국주의는 동북을 침략전쟁의 공고한 후방과 식량기지로 만들기 위해 1936년 4월 20년 사이 100만 호 500만인 일본이민을 이민하려는 이민계획을 세우고 조선의 파산된 농민을 강압하여 동북으로 이주시켰다.
또 《만족 조선족 개척주식 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이민사업을 관리, 사후 동북지역의 39개 현을 조선족의 《이민과》로 확정하고 1939년부터 매년 조선으로부터 1만 호를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당시 인구가 희소한 흑룡강성 북부는 일본이 강제이민을 실행한 주요지역의 하나이다. 1940년 한번에 눈가, 룡진 등지에 이주해간 조선족만도 2,810호나 된다.
1941년 이후 일본식민당국은 강북지역의 신 이민자들을 《이민 개척단》으로 만들어 북만주와 내몽고 지역에로 내몰아 논을 만들게 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동북으로 강제이민은 조선의 가난한 농민이 3만 856호에 14만 7,744인 된다.
일본의 강제이민으로 하여 중국 동북의 조선족인가는 날로 늘어났다.
1945년에는 216만 3,015인으로 껑충 올라 1932년의 67만 2,649인에 비해 2.2배 늘어났다.
이 시기 일본의 강제이민 때문 외에도 자발적으로 중국에 온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1937년 《7.7》사변전야에 만주 관내로 들어온 약 3만여 명 조선족들은 다수가 반일장병들과 각종 혁명조직 혹은 군중단체의 책임자이다. 또 장사군도 있고 다른 원인으로 하여 들어온 사람도 있다.
그들은 화북, 화중, 화남 등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명년간 급격히 늘어나 1945년까지 우리나라 관내 조선족이 10여만 인에 달하였는데 그중 화북지구에 좀 많았다.
재일 조선족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기간 일본에 《강제징용》되여 간 노역 자들이다. 일본식민당국이 공포한 숫자에 따르면 침략전쟁 발동이래 일본식민당국에 끌려 참군한 조선인은 36만 4,000여인으로서 그중 태평양전쟁시기(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참군한 사람만 해도 11만 6,294인이다.

그리하여 중국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1920년의 45만 9,400여인으로부터 1930년의 63만 982명으로 늘어났다.
그중 연변 4현(화룡, 연길, 왕청, 훈춘)에 약 40만 9,402명으로서 64.9%를 차지하고 안동과 통화 지역에 5만 545명으로서 8% 차지하고 봉천과 철령 지역에 9만 7,169명으로서 15.4% 차지하고 길림과 장춘 지역에 2만 4,157명으로서 3.8% 차지하고 북만(흑룡강에 속함)에 4만 4,463명으로서 7% 차지하고 려순, 대련 지역에 1,747명으로서 0.27% 차지하고 기타 지역이 약 1,000명 좌우였다.
위의 숫자에서 볼 수 있다 시피 길림성 연변지역은 이미 우리나라 조선족의 주요한 집거구로 되었으며 료녕성도 조선족인구가 비교적 집중되고 흑룡강은 장성세를 이루었다.

북한에서 공포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후 15년간(1910-1925) 조선측에서 해외로 이주해간 난민이 30만 호를 초과했다.
1919년까지 약 10여만 명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 토목건축과 석탄채굴 등 노동에 종사하였다. 일본식민당국이 공포한 자료에 따르면 1910년부터 1925년까지 만족, 몽골족 지역과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주해간 조선족이 5만 6,000명이며 22만 5,000여명이 연변지역에 이주해갔고 1926년부터 1930년 사이에 또 10여 만
명이 중국 동북으로 이주해갔다.
1922년 12월 구 소련 극동지역의 외국무장간섭이 철저히 분쇄되고 소비에트공화국이 창건됨에 따라 구 소련에 이주해간 조선족인구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구 소련측에서 통계한데 따르면 1926년 구 소련 시베리아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이미 8만 7,000여 명에 달했다.
또 600만 조선인이 노력자로 끌려갔는데 그중 많은 사람이 전쟁가운데서 목숨을 잃었거나 제명에 죽지 못했다. 적지 않은 《행운자》들은 또 일본으로 강압적으로 끌려갔다.
1945년 일본투항 때 재일 조선족은 약 200만 명 좌우였다.
구 소련 인구통계에 따르면 1939년 구 소련 경내에 거주한 조선족인구는 18만 2,300여인으로서 1926년에 비해 1.1배 늘어났다. 《9.18》사변 후 소련에 이주한 조선족들은 일본식민주의통치와 일본의 강제이민에 못 이겨 구 소련에 이주해간 사람들이 많다. 해당 서적, 기록에 따르면 1945년 8월 조선광복까지 세계 각국에로 이주해간 조선족은 무려 당시 조선반도 총인구의 15%좌우 차지하는 400만인이나 된다.
그중 중국동북에 정착한 사람이 대략 160만, 중국내지에 대략 10만, 구 소련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에 대략 20만, 일본에 대략 210만, 기타 다른 나라와 지역에 대략 3만인 이주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종말 후 조선족의 대량적 이주는 거의 끝났다

1990년 제4차 인구조사에 따르면 전국 조선족인구는 192만 597인으로서 전국 총인구의 0.169%를 차지, 그 절대치는 전국 56개 민족가운데서 17위를 차지했다.
제1차 인구조사 때부터 제4차 인구조사 때까지 37년간 조선족인구의 평균성장률은 1.5%로서 전국 평균장성속도인 1.8%보다 낮았다.
동북3성의 조선족인구는 186만 4,760인(그중 요녕 23만 378인, 길림 118만 1,964인, 흑룡강 45만 398인)으로서 전국조선족 총인구의 97.09%를 차지했다.
내몽골자치구의 조선족인구는 2만 2,641인으로서 전국의 1.178%를 차지하고 기타 성, 구의 조선족인구는 2만 2,641인으로서 전국의 1.178%를 차지했다.
동북3성에 조선족이 1만인 이상인 시, 지구(인구에 따라 배렬)로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길림성 길림시, 흑룡강성 목단강시, 길림성 통화지구, 흑룡강성 송화강 지구, 료녕성 심양시, 흑룡가성 가목사시, 료녕성 무순지구, 흑룡강성 계서시, 길림성 백산시, 료녕성 철령지구, 흑룡강성 이춘시, 료녕성 본계시 등 19개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이다.
1990년 전 주 조선족인구는 82만 1,479인으로서 전 주 인구의 39.5% 차지, 전국 조선족 총인구의 42.77%이다.
전 주 8개시, 현의 조선족인구분포(인구에 따라 배열)를 보면 룡정시 18만 3,994인, 연길시 17만 7,547인, 화룡시 13만 6,894인, 훈춘시 9만 2,100인, 왕청현 8만 5,049인, 도문시 6만 9,166인, 안도시 2만 4,745인이다. 다른 한 조선족자치지방인 장백 조선족자치현의 1990년 조선족인구는 1만 4,508인으로서 전 현 총 인구의 16.7%를 차지한다. 이상 분석으로부터 볼 수 있다시피 동북아지역 조선족 인구분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점이 있다.

1. 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었다.
중국조선족은 98%이상의 인구가 동북3성과 내몽골자치구에 집중되어 있고 구 소련의 조선족은 99.5%의 인구가 러시아와 중아세아 4개 나라에 분포되어 있다. 재일 조선인은 주로 서해안지역과 홋까이도에 분포되어 있다. 조선족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은 조선족의 벼농사를 짓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인들은 이주해들어 온 후 논 관개와 개발에 유리한 대소 하천류역과 평원지역을 찾아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비교적 집중하여 거주했기에 조선족들은 민족 향심력과 응집력이 매우 강하다.

2. 대부분이 변계에 거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조선족이 비교적 집중된 지구, 시, 현은 대다수가 중, 로, 조 3국 변계에 위치했다. 이를테면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 로, 조 3국 변계에, 길림성 장백 조선족자치현, 집안현, 료녕성의 단동시는 중조 변계에, 흑룡강성 목단강시, 가목사시, 계서시와 내몽골자치구, 만주리시는 중로변계에 위치해있다. 상술한 지역의 조선족인구는 동북조선족총인구의 62%좌우 차지한다.

조선족은 또 다수가 철도연선과 철도와 가까운 주위에 거주, 인구는 변계로부터 내지로 들어오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구 소련의 조선족은 당초 구 소련의 극동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후에 우리나라와 인접한 지역과 중아시아 지역에로 확장되었다. 그것은 10월 혁명 후와 제2차 세계대전 전야에 국제국내형세의 핍박에 못 이겨 대량의 조선족들이 구 소련의 내지로 재차 이전했기 때문이다.

중, 러, 조 3국 조선족들이 이웃하여 가까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데다가 또 바다를 사이 두고 일본과 마주하고있기에 변계 민간사이의 상호 왕래는 100여 년 역사를 갖고 있다. 구역경제협력이 발전됨에 따라 각국 조선족지간의 연계는 더한층 발전하게 될 것이다.

3. 특수한 인적관계가 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인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아직도 교포, 교포가족, 친족들이 5,000여인 있다. 조선족가운데는 조선, 구쏘련, 일본 등 나라인들과 친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중, 로, 조 3국 교접점에 있는 훈춘시에는 조선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이 1만 5,000여인, 일본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이 1,000여인, 러시아 교포가 5,000여인 된다. 실천이 증명하다시피 이런 특수한 인적 관계는 구역 경제협력발전을 추진하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4. 전문가 학자 사회명인과 갑부들이 적지 않다.
구 소련의 조선족학자가운데는 학술계에서 명망이 높은 원사(院士)와 통신원들이 있다. 이를테면 막씸 빠블로위치 김은 구 소련문화를 전공한 역사학자로서 1979년 구 소련과학원 원사칭호를 수여받았다. 끄오끼 빼뜨로위티 김은 역사학자이자 교수로서 1976년 통신원사 칭호를 받았다. 그는 구 소련과학원 동방학연구소 소장대리이며 《구 소련대백과전서》(1980년 로어판)에 수록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연변조선족 가운데서 각종 전문가인재가 도합 5만 3,528명 되는데 그중 고급직함을 갖고있는 분만도 2,281명 된다. 어떤분들은 과학연구면에서 조예가 매우 깊어 국내외의 공인을 받고 있다. 길림성에는 박문일, 정판룡, 조봉빈 등 조선족박사와 같은 저명한 전문가, 학자들이 나타났다. 목하 동북아 각국 조선족지간의 과학기술, 문화 교류의 발전은 구역경제협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중국의 개방과 자본주의적 개체경쟁을 도입하며 그리고 동포사회에 불어닥친 한국행 돈벌이 바람으로 조선족사회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족이 돈벌이를 위해 한국으로. 북경 또는 천진같은 대도시로, 뿔뿔이 흩어지고 가정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
90년대 한국업체들이 중국에 진출한 다음부터 연변 조선족사회는 도시집중화 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조선족 총수의 10% 인 20만명가량이 농촌을 떠나 대도시로 이주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선족들이 떠난 농촌에는 한족들이 들어와 산다.
이는 그만큼 조선족의 주거지가 축소됨을 의미한다. 현재 계획중인 북한 두만강 개발계획이 실현되면 연변의 조선족 인구비례는 총인구 대비 현재의 40%에서 20%이하로 축소된다. 인구의 분산이 가속화될수록 한족과의 동화속도도 빨라진다.
만주족은 원래 중국인들과 문화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족은 문화적으로 많이 다르고 우리 부모들이 이 문화를 지키려 애썼는데 동화되면 많은 문제들이 파생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도시로의 급속한 인구진출은 농촌의 붕괴를 의미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소학교는 85년 4백 19개였는데 95년에는 1백 77개로 줄었다.
중학교는 1백 18개에서 49개로 줄었다.
이는 한국어를 할줄 아는 조선족의 감소를 의미한다.

중국에서 연변이 <한국화> 된다는 비판이 나올 경우 <한국화> 라는 말속에는 향락 풍조나 고물가 현상 등도 포함된다. 향락풍조의 전파는 심각하다.
가라오케 바의 급속한 증가가 그 상징이다.
연길의 가라오케 바들이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것들이지만 조선족들도 자주 찾는다 가라오케 바의 경우 여급에게 주는 팁만 200원(한국돈 2만원 가량)이다. 중국에서 정교수 한달 월급이 8백원이다. 그런데 가라오케 바에 가서 술 한번 먹고 수만원씩 쓰고 나온다. 일상 생활에서도 조선족들은 과소비와 낭비들이 심해졌다. 예전에는 벼농사를 하는 조선족들이 옥수수 농사를 하는 중국인들보다 잘 살았다.
요즘에는 조선족들보다 중국인들의 저축이 더 많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북경인구 1천1백만 가운데 조선족은 3만 여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북경에 등록된 가라오케바 1백 80개소 중 1백 60개소가 조선족 소유이다.
이들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물 론 농촌 출신 조선족들이 많다.
올 봄 북경당국에서 범죄타격운동을 벌려 매춘부를 구속했는데 3분의1이 조선족이다.
옛날 조선족 여성들이 북경으로 관광 갈 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조선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다녔다.
부분적 청년들도 도시로 진출한 후 적지 않게 범죄로 빠진다.
한마디로 조선족사회는 그 기초인 가정까지 무너져 가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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