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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푸른섬선교정보 > Mission Research 등록일 2006-09-29
작성자 관리자 (admin)
방글라데시, 이슬람극단주의의 배경
방글라데시는 그동안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비교적 신앙에 대한 핍박이 덜한 국가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방글라데시에서도 최근 이슬람 무장세력의 활동이 눈에 띠게 강화되고 있다. 또 정치분야에서도 이슬람 강경주의의 목소리가 분명한 세력을 얻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칼리다 지아 총리(여)는 지난 11월 30일 가장 강경한 이슬람 테러단체인 자마툴 무자헤딘 방글라데시(방글라데시성전연합)의 정치 테러리즘에 맞서기 위하여 전국적인 단결을 역설하는 등 발흥하는 강경 무장세력에 맞서서 정치적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집권세력의 움직임도 어지럽다. 총리는 그전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는 테러가 없는 평화로운 나라라는 공식입장을 유지하는 등 이슬람 강경파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고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해왔다. 그러나 판사 몇 사람이 무장세력에 의해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녀의 입장이 급선회한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지아 총리 및 집권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 그리고 정치적 제휴정당인 자마트 에 이슬라미와 이슬라미 오키야 조테 등은 방글라데시의 정치적 테러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최근 방글라데시에서 점증하고 있는 정치 테러의 배후에 인도의 정보 조직인 인도비밀국의 조사연구부와 이스라엘의 정보조직인 모사드가 있다는 내용이다. 즉 이들이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의 분열을 부추기고, 그 결과로 야당인 아와미리그를 정치적으로 이롭게 할 목적으로 강경세력의 테러활동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글라데시에서 강경 이슬람세력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방글라데시의 강경 이슬람테러리즘이 급증했다는 점과 그 배후에 인도나 이스라엘의 정보조직이 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의 이슬람무장세력의 위세는 최근 점점 강력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외세의 개입 보다는 방글라데시를 둘러싼 국내외적인 정치적 환경이 불안정해지는데 기인한 바 크다. 방글라데시는 1971년에 독립한 이후 끊임 없는 정치적 불안과 유혈정변에 시달려 왔다. 실제로 지금까지 19번의 쿠데타가 발생했고 그 가운데 3번은 성공하여 군부에 의해 정권이 접수된 적이 있었다. 이같은 잦은 정변과 비민주적인 정권교체의 결과로 어느 특정 정파도 분명한 정치적인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있다. 방글라데시가 벵갈족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것과 그들이 변함없이 이슬람을 유일한 종교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이외의 어떤 분명한 정치이데올로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외적인 작용도 방글라데시의 정치 불안과 이슬람 강경세력 발흥의 원인이 된다. 1970년대에 발생한 석유무기화는 중동의 몇몇 산유국의 국제정치무대에서의 발언권을 크게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중동의 몇몇 강성 이슬람국가들은 넘쳐나는 오일달러를 활용하여 각국의 이슬람 주장세력들에게 자금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3년의 이스라엘과의 중동전과 이를 계기로 실시된 서방 주요국가들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는 국제무대에서의 중동국가들의 발언권을 크게 신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79년에 이란에서 발생한 이슬람혁명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세력이 소련 침략군에 맞서 벌인 이슬람성전이 있었다. 통계에 의하면 2,634명의 방글라데시 국적자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반군들을 도와 싸웠다고 한다.

동파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파키스탄의 영토였던 이 곳이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으로 독립한 것은 1971년이었다. 건국 당시 방글라데시는 이슬람 지역이기는 하지만 세속주의적인 공화국의 형태로 출법하였다. 그러나 1988년부터 이슬람강경무장세력이 세를 얻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종교적 강경 이념을 표방하는 정당이나 정치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나라의 정치 역사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첫 번째 쿠데타는 1975년이었다. 이 쿠데타로 초대수상으로 당시까지 집권하고 있던 셰이크 무지브루 하르만 수상이 살해되고, 지아울 하르만 장군이 집권하게 되었다.

지아울 하르만은 자신의 집권기반을 굳히기 위해 이슬람 고위 신학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일정부분 허용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즉 헌법 38조가 개정되어 제헌헌법이 표방하고 있던 세속주의 노선을 삭제하고 종교적인 신조를 추구하는 정치인과 정치세력의 정치 참여를 허용한 것이다. 이는 방글라데시에서 이슬람 세력이 정치에 참여하는 첫 번재 사례로 기록되게 된다. 두 번째로 지아울 라흐만은 방글라데시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민족주의개념을 주류 종족인 벵갈족만의 혈연적 민족주의가 아닌 방글라데시 영토 내에 거주하는 모든 종족을 하나로 묶는 영토적 민족주의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영토개념이 지나치게 강조되다보니 같은 벵갈족임에도 불구하고 인도 서부에 사는 벵갈족과 방글라데시의 벵갈족이 개념적으로 분리되는 문제도 발생했다. 어쨌든 이때부터 방글라데시의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은 크게 완화되는 순작용은 있었다. 세 번째로 세계 이슬람국가들과의 종교적 연대 강화방침을 법제화하여 이슬람의 색채를 분명하게 하였다. 지아울 라흐만은 스스로 현실론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자라고 자처했다. 그러나 그가 종교를 명분으로 방글라데시인들의 단결을 호소한 이유는 지지기반과 정권의 존립기반을 강화하겠다는 정치적인 목표와 함께 힌두교에 기반을 둔 인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도와는 차별화된 아이덴티티의 개발이 필요했고, 그 중요한 요소를 종교적 차별화로 본 것이다.

이같은 국내외적인 필요성으로 인해 정부가 종교의 정치 참여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민간수준에서 활동하던 많은 이슬람 단체들이 속속 정치세력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만해도 신생 독립국이었던 방글라데시의 특성상 많은 이슬람 단체들이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등 외부 이슬람국가들의 영향권 아래서 활동하고 있었다. 어쨌든 수많은 이슬람계열의 민간단체들이 초기의 이슬람정치세력의 기반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들 초기 이슬람 정치세력들과 정치에 관심이 있던 이슬람신학자들은 정치적인 기득권을 선점하기 위해 서로 선명성 경쟁을 벌이게 되었고, 그만큼 방글라데시를 완전한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력하게 나오게 되었다.

이같은 분위기는 방글라데시의 몇가지 중요한 정치적 흐름을 형성하며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방글라데시의 모태이기도 하고, 먼저 이슬람의 정치적 영향력을 명문화하고 있던 파키스탄의 제휴를 모색하는 친파키스탄파의 재등장이다. 이들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과정과 1972년에 발생한 파키스탄군이 방글라데시 시민 몇 사람을 살해한 사건 등을 통해서 정치적 입지를 거의 상실했던 세력이다.

이들 대부분은 이슬람주의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그러한 성향의 정당을 기반으로 정치무대에 재등장했다. 이들은 사사건건 강경한 이슬람율법과 종교를 내세우며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문화와 인사, 그리고 이슬람을 외면하는 세속주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주장했다. 이같은 강경우익 이슬람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방글라데시는 거의 모든 국민들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이슬람사회이면서도, 여전히 인도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고, 심하게 말하면 뉴델리나 캘커타의 지령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소수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였다. 그들은 이들 다수의 침묵하는 이슬람신자들에게 이슬람신자로서의 정체성과 민족주의를 자극하면서 정치적 세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이들의 이같은 정치적 캠페인은 성공을 거두고 이를 기반으로 1978년에는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이라고 하는 이슬람우익민족주의 정당이 탄생하게 된다.

이후 1982년의 무혈쿠데타로 집권한 에르샤드 장군도 전임자의 이같은 정책을 계승했다. 그의 통치시절은 전임 지아우르 라흐만의 치하에 비해서 정치에 대한 이슬람교의 영향력이 더 강해진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에르샤드 장군은 이슬람교를 정치적 반대파를 억압하고 독재적인 정권의 기반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1988년, 헌법이 8번째로 개정되면서 헌법은 이슬람을 방글라데시의 국가종교로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방글라데시는 완전히 친파키스탄, 친이슬람노선에 의해서 장악되었다.

1990년에 자마트 에 이슬라미가 집권하면서 방글라데시의 민주화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정치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이 때 총리로 집권한 사람은 전임 지아 대통령의 부인인 칼리다 지아였다. 이 때 이슬람 정치권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를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파트와를 잇따라 발동하면서 아흐메드 샤리프나 샴술 하크 같은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지식인들을 억압했다. 1994년에는 타슬리마 나스렌이라는 진보적 지식인이 이슬람을 모독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오래 동안 생명의 위협을 당하다가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에 앞서 칼레다 지아 정부는 나스렌을 신성모독혐의를 부과하는 등 진보적 세속주의에 대한 정부의 압박 수위는 예사롭지 않은 수준까지 올라갔다. 나사렌의 추방은 진보, 세속 진영이 이미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대항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유지할 능력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반면 이슬람 보수진영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건은 가시적인 승리를 처음으로 확인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셰이크 하시나가 통치하던 기간(1996 - 2001)에는 이슬람 고위 성직자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마드라사라고 불리는 종교학교설립 붐을 일으켰다. 이는 진보적 세속진영에 치명타가 되었다. 또 이 기간부터 세속자유진영의 근거 시설에 대한 폭탄테러사건도 종종 발생했다. 이슬람 과격파들은 또 진보적지식인들에 대상으로 암살리스트를 만들고 암살단을 운영하는 등 그 기세는 날로 높아갔다. 유명한 시인인 샴수르 파흐만도 암살대상자 명단에 올라가 있었으며 실제로 1999년에는 그에 대한 암살기도가 있었다.

이처럼 이슬람보수정치세력이 꾸준히 세력을 강화하며 확대해 가던 양상이 계속되던 방글라데시 정치의 흐름은 아와미리그가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전혀 다른 양상을 맞게 된다. 아와미리그는 온건이슬람과 진보적 세속주의의 중간 정도의 스탠스를 취하는 정치세력이었지만, 이슬람 보수 진영과의 정면대결을 펼치는 대신 교육과 보건, 복지 등을 통한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었다. 그러면서 한 때 이슬람에서 이단으로 간주되었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함에 대한 복권의 바람이 부는데 이는 지금까지와는 분명히 다른 흐름이었다. 그러나 아와미리그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마드라사를 중심으로 한 이스람 원리주의 교육이 계속확대되고 있었고, 정부의 종교사무부는 일반적인 공교육에서 이슬람교육의 커리큘럼을 늘리는데 더 많은 예산을 투자했다.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일 뿐 아니라 경제기반도 거의 완전히 붕괴된 파탄수준의 경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라이다. 또 공무원사회의 부패로 공직자들의 횡령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전체 경제규모에 비해서 해마다 뇌물로 주고 받는 돈의 규모가 엄청난 나라이다. 매년 뇌물의 규모는 1억 6천 만 TK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또 공직사회의 부패로 인한 국가경제 손실은 40 억 TK에 이른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를 다시 국민총생산과 비교하면 방글라데시인들은 자신의 수입의 7.5%를 뇌물로 지출하고 있으며, 전체 뇌물규모는 중하위권 소득수준의 국민들의 1년 총수입과 맞먹는 다는 계산이 나온다.

경찰과 통신, 교육, 건강, 복지는 물론 지방정부와 지역개발 등의 거의 모든 분야가 붕괴상황으로 들어간지 오래이다. 다카대학의 아불 바르카트 교수는 1971년 독립 이후 지금까지 약 2조 TK(미화 360 억 달러)의 해외 원조를 받았지만, 그 가운데 3/4은 관료들이나 정치가들, 혹은 중간에이전트나 업무 대행자들에 의해서 착복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후진국가들이 그렇듯이 이 나라도 극소수가 부를 독식하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극빈자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지도층은 이처럼 열악한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이슬람교를 국민들에게 주입시켰다.

경제붕괴의 또 하나의 원인은 정치권의 고질적인 파벌다툼이다. BNP와 아와미리그가 끝없는 이념 투쟁을 벌이는 동안 국가의 존립기반은 더 없이 붕괴되어가고 있다. 끝없는 권력 다툼에도 불구하고 어느 세력도 방글라데시를 확실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인 변동이 있을 때마다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는 이야기이다. 이같은 정치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방글라데시의 정치는 몇몇 가문들에 의해서 주도되는 일종의 씨족정치체제로 변모해가고 있다. 씨족정치란 국가의 주요한 이권과 기회를 소수의 정치지도자들이 독식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추종자와 주요 지지세력에게 이 이권을 조금씩 분배하는 후진적인 정치시스템이다. 즉 통치세력들이 나라의 부와 이권의 거의 전부를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2001년의 선거에서는 자바트 에 이슬라미와 이슬라미 오이키야 조테 등 두 정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 두 정당 사이의 의석 차이는 20석밖에 되지 않는다. 즉, 이슬람보주정당들이 다수당이 되지 못했고, 그들이 단독으로 이슬람체제를 옹호하는 법률을 통과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두 정당은 연립내각을 구성하여 권력을 분점하고 민심을 결집시키기 위해 이슬람공화국을 표방하며, 이슬람을 권력 유지를 위한 중심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다.

이슬라미 오키야 조테 출신의 정치가인 무프티 파즐룰 후크 아미니는 드러내 놓고, 탈레반과 알카에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그는 2000년 12월에 법원이 이슬람 지도부가 파트와를 발동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판결을 내리자, 이듬해인 2001년 초, 해당 판사들은 죽음의 위협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협박하기까지 했다. 방글라데시의 고위성직자들이나 학자들은 국가의 공식적인 사법체계와 치안시스템을 무시하고 지역이나 가족 간의 분쟁에 대해 파트와를 남발하여 판결하고 심지어는 체벌까지 가하는 등 그 폐해가 심했고, 법원은 이를 금지시킨 것이다. 그러나 아미니 같은 친이슬람계 정치인들은 이슬람 율법에 기초한 생활만이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의 붕괴로부터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가로 막는 법원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마울나 니자미 같은 정치인은 공산주의와 서구의 자본주의는 당연히 반이슬람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이념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그는 오직 이슬람교만이 방글라데시의 새로운 발전을 기하는 동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강경주의자들에게는 이슬람혁명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해 보였다. 비록 현재의 정치권이 통치이데올로기로 이슬람교를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주의자들은 그들대로 자신들의 혁명적 기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입지를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제도정치권 안의 친이슬람세력이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우산 아래서 그들의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슬람강경혁명주의자들은 드러내놓고 이슬람공화국건설을 위한 선명한 투쟁을 주창하며, 야당이자 이슬람보수정당인 방글라데시이슬람민족주의당(Bangladesh National Party; BNP)과 적극적인 제휴를 추진했다.

이처럼 민족주의와 이슬람보수정치세력 사이의 심정적인 동맹관계는 이슬람 극단주의가 태동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방글라데시의 이슬람극단주의 역시 탈레반이나 알 카에다 같은 와하비즘을 신봉하는 국제적인 테러단체의 영향권 아래서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 이론적 토대는 탁피르원칙이라고 불리는 원칙인데 이는 비이슬람신자나 조직과 협조하거나 동조하는 행위 자체가 불신앙이고 배교라는 이론이다. 탈레반이나 알카에다가 추종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이같은 원리는 자칫 온건하거나 타협적인 이슬람 신자들이나 단체들을 일종의 회색분자로 몰아붙이고, 나가서 그들을 죽일 수도 있는 교리적 근거가 된다. 실제로 자마툴 무자히딘 방글라데시(JMB) 같은 단체는 반대파 정치인들이나, 진보적 지식인들, 그리고 마자르나 아흐마디야 무슬림 같은 진보적 단체를 대상으로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나가서 탁피르 원칙은 JMB가 지하드에 소극적인 보통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응징하는 이론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보통의 민간인 평신도들에 대한 공격은 방글라데시의 JMB보다 훨씬 먼저 알제리아의 Armed Islamic Group이나 이집트의 Takfir wal Hijra 같은 단체에 의해서 먼저 저질러졌다. 최근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장단체들의 민간인 테러도 Armed Islamic Hroup을 본딴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다양한 이슬람계 NGO들을 통해서 이슬람교는 많은 모스크와 고아원과 마드라사를 운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1996년 이후 쿠웨이트 이슬람유산부흥협회 같은 기관은 방글라데시에 이슬람 대학 1곳과 10개의 마드라사, 4개의 고아원, 1천 개의 모스크 등을 건설하고, 방글라데시 북부 16개 지역에 10만 곳 이상의 우물을 파서 신수난 해결에 도움을 주었다. 이 지역은 방글라데시에서도 가장 개발이 늦고 외진 지역이었다.

1970년 당시 이슬람 종교교육 기관인 마드라사는 전국적으로 1,500 개소 가량이었으나 현재는 약 8천 개소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에서 종교교육이 강화된 것은 2001년에 이슬람보수성향이 짙은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이 연정을 통해 집권하면서부터 이다. 이후 정부는 일반적인 교육보다 이슬람 교육에 더 큰 예산을 배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육은 경제나 실사구시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교육이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한 마드라사의 숫자는 정부가 인정하고 관리하는 마드라사에 국한된 것이며, 정부와 상관 없이 이슬람 신자들이나, 지도자들이 임의로 세운 마드라사인 콰우미 마드라사도 1만 5천 개소에 이른다. 게다가 여기에 조차 파악이 안된 그야말로 사설 콰우미 마드라사가 1만 개소쯤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콰우미 마드라사의 교과과정을 보면 초보적인 수준의 영어나 수학, 과학 등이 개설되어 있기는 하지만, 교과과정의 거의 대부분은 지하드에 대한 정신적인 무장을 시키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또 대개의 학생들은 극빈자의 가정출신들이다. 콰우미 마드라사에서의 교육의 과정은 상당히 비인간적인 여건 아래서 진행된다. 단체기합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학생들이 무엇이든 잘못한 것이 있으면, 포승 등으로 결박해 놓는 일이 흔하다. 또 학생들은 일단 학교로 들어오면 몇 년씩 가족과의 만남이 금지된다. 한 전문가는 교사와 학생을 합쳐서 콰우미 마드라사에 속한 사람의 수가 무려 50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잠재적인 이슬람 혁명전사가 50만 명이나 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은 것이다. 실제로 1994년의 나스렌 사건이나 2001년에 고등법원이 파트와를 금지시키자 마드라사 출신들이 그 위력을 단단히 발휘하며 무력 시위를 벌인적이 있었다.

방글라데시의 정치 문화는 국가의 이익과 정치 참여자의 개인의 이익의 경계를 정확하게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로 부패상이 심각하다. 정치인들은 사회 전반의 삶의 질 향상 보다는 개인의 이익 앞에서 이전투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인에게 있어서 국민의 삶의 질의 향상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은 국민 개개인의 자유를 신장시키고, 사회적, 개인적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에서의 정치는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끝없이 권력투쟁에 몰두함으로써 정치의 인간적인 차원이 상실된다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지배시절에 이어서 독립 후의 서로가 물고 물리고, 죽고 죽이는 정치상황이 반복되면서 피해를 입는 쪽은 일반 국민들과 민간 분야였던 것이다. 방글라데시 국민들의 대부분은 UN이 정하고 있는 극빈자의 기준을 넘지 못하는 비참한 수준에 놓여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극빈자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민주주의와 삶의 질에 대한 본능적 불만을 억누르는 효과적인 도구가 이슬람무장세력이다. 이들은 기성정치권과 연관을 가지면서 이슬람의 교리나 율법에서 그럴 듯한 명분을 개발하여 이를 핑계로 정적들을 제거하거나 압박하고 있다. 이미 붕괴 상태인 경제에서는 모든 국민들이나 모든 계층이 함께 사이 좋게 나누어 먹을 파이가 없다. 일부 소수의 세력과 계층이 독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국민들이 사회, 복지, 교육 등의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교육 시스템은 거의 붕괴되어 있으며, 교사는 집권세력에 의해서 통제되고 조종된다. 커리큘럼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져 있으며,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내용의 교육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처럼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남김 없이 붕괴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슬람은 백성들의 눈에 매우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슬람 측이 밀어붙이는 샤리아법이나 이슬람법정 등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법 치안체계를 바로잡아줄 대안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 최근 이슬람 강경세력이 판사 몇 사람을 살해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집권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이 샤리아법이나 이슬람세력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이다. 집권세력의 입장에서는 이슬람세력 자체도 맘에 들지 않았겠지만, 그 세력이 94년 이후 점점 강해지는 것도 그냥 두고 보기 힘들었을 것 같다. 2001년에는 이슬람 강경운동지도자인 무프티 아미니와 그의 측근인 마울라나 아지줄 하크가 구속된다. 다카의 한 모스크에서 발생한 정치인의 살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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