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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목회, 신학 > 설교 등록일 2006-08-05
작성자 관리자 (admin)
예수님의 말씀(56. 이렇게 기도하라②)
본문 : 마태복음 6:11-13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지난주에 주기도문의 전반부에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둘째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셋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도를 마치고 나면 나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해야합니다. 오늘은 그 세 가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1절)

저는 40일 금식기도 하셨다는 분들 보면 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끼만 안 먹으면 현기증이 납니다. 요즘은 더워서 그런지 배가 더 자주 고파옵니다. 자다가도 배가고프면 일어나 무엇을 먹고 자야합니다. 저는 먹는 것만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한 때 서울에 올라와서 혼자 지낼 때 반찬이 없어서 소금물에 밥을 말아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소금이 맛을 내는 것이지만 제가 소금물에 밥을 말아 먹어보고는 정말 못 먹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행기타고 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 커피에 소금을 설탕인줄 알고 탔습니다. 그냥 눈 딱 감고 먹어보려고 했는데 정말 못먹겠더라구요. 저는 어려서 감자, 옥수수를 얼마나 많이 먹고 자랐는지 지금도 몇 가지 이해를 못합니다. 돈주고 감자, 옥수수 사먹는 것하고 물 사먹는 것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만큼 이것만 질리도록 먹고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성장하면서 우리 집이 못살기 때문에 그렇게 먹고산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집 하얀 쌀밥만 먹는 것이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 못하는 우리 집사람은 쌀에다 영양 밥을 한다나요 하면서 잡곡을 섞습니다. 저는 이것을 먹기 싫은데 우리 집사람은 저에게 뭐라고 합니다. 신경 써서 잘해 주었더니 배부른 소리한다고만 합니다. 제가 성장해서 선교지 여행하면서 알게된 것인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사나 보았더니 별 것 안 먹더라고요. 서양사람들도 옥수수 감자 먹으며 살고 있더라구요.
주님은 우리를 위한 첫 번째 기도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오늘 먹을 하루 양식을 말합니다. 미리 싸둘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호주에 가면 집세를 보통 월세로 내지 않고 주세로 냅니다. 그러니까 한 주만 쉬고 일 안 하면 금방 집세가 밀리는 겁니다.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에게 하루 양식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만큼 잘 살게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실 이 나라 백성들이 얼마나 못 먹고 못살았습니까? 우리말에 사람보고 하는 말이 “그놈 참 짜네”, “싱거운 놈 다 봤네” 그럽니다. 오죽하면 사람의 특징을 말할 때도 먹는 맛에 비유하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시계가 안가면 밥 줘야 한다고 그럽니다. 시계도 밥을 줘야 하는데 사람이 오죽하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고백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매월 책 사본다고 10만원씩 도서 비로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 책 사는 것이 아니라 뼈다귀 많이 사먹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언젠가 한번 이동휘 목사님과 선교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이 제일 먼저 선교지로 생각하시는 나라나 지역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라고 제가 여쭈었습니다.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래도 사람이 먹을 곳이 있는 곳은 괜찮은 곳이지요. 사람이 굶어죽어 가는 지역이 제일먼저 선교할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 선교회는 나른 지역도 많이 하지만 아프리카지역과 아시아에서도 아프가니스탄 같은 지역을 우선 선교지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겪은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10년 전 아프리카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선교사 집에 며칠간 머문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들은 한 현지인 가정부의 서글픈 이야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그 가정부는 점심밥을 선교사 집에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밥을 얼마나 많이 먹는지 배가 터질 정도였습니다. 선교사가 “왜 그렇게 많이 먹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동네와 집에서는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지낸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가정부는 선교사 집에서 점심과 배고픔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밤 10시에 밥을 먹는데, 그 이유는 잠자기 직전에 먹어야 밥이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오래 전 우리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손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장난치고 뛰어 다니면, 할머니들이 “뛰어 다니지 마라. 밥 쉽게 꺼진다”며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나무랐습니다.

인도에 갔을 때 본 일입니다. 오토바이를 탄 아이가 음식 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다리에서는 피가 나오는데 다리가 얼마큼 다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자기의 다리는 안중에 없고 깨뜨린 그릇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주어 모으고 있었습니다. 주인에게 쫓겨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장애인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를 선교사에게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먹고살기가 하도 어려웠던 그는 캄캄한 밤에 철로에다 한쪽 발을 얹어 놓았습니다. 결국 지나가는 기차가 다리를 절단했고, 불구자가 된 그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구걸하게 되니 굶지 않고 살아갈 수는 있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하루에 6만 여명, 연간 2,000여만 명이 굶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전 세계 60억 인구 중 7명당 1명인 8억 4천만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남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에 살고 있습니다. 굶주림은 생명을 위협할 뿐 아니라 시력 약화, 무력증, 성장저해를 초래하며 질병에 대한 저항력 약화시킵니다. 전 세계 15세 미만 어린이는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매년 1억 4천만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고 있는데, 그 중 4/5 이상이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개발도상국의 어린이 가운데 약 10%는 만 5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매일 24,000명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고 있으며, 매년 1천여 만 명의 어린이들이 안타깝게도 영양실조와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고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는 하루 평균 1만 2천여 톤, 8톤 트럭 1,400여대 분이나 된다고 합니다. 1년에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는 약 410만여 톤으로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15조원에 달합니다. 이제 우리는 나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돕고 있는 남아공의 김형주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남아프리카의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돈 있는 백인들은 천국생활을 돈 없는 흑인들은 지옥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에 나온 흑인들이나 구걸해서라도 끼니를 채울 수 있지만 흑인 밀집지역 사는 노약자들은 이들이 구걸해온 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들의 거주지에서 실시하는 구제사역을 통한 복음전파는 많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포체스트룸은 아주 조용한 학교 도시입니다. 반면에 인근에 대단위 흑인 밀집지역들인 잉까겡 등 큰 시골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헌금을 보내지는 않지만 월 10만원씩 보내는 이곳 잉까겡 지역의 흑인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배고픈 사람 사정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배고픈 이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2절)
두 번째 기도의 제목은 용서입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의 죄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죄”로 번역된 이 단어는 ojfeilevta(오페이레마타)로 빚(debt) 또는 부채(loans)를 말합니다. 이 죄를 용서해 주는데는 십자가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면 그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용서를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자신이 범죄한 사실이 하나님께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남의 죄가 작게 나타나며 반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끼친 죄가 크게 보이는 사람은 자신이 범한 잘못은 작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자세는 내 자신에 대해선 엄격하되 타인에 대해선 너그러워야 합니다. 이것이 반대로 되면 교만과 독선으로 치닫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다 옳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다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축복하신 것은 이 말씀을 잘 따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사람은 선천적으로 풀지 않으면 못삽니다. 얽어매어서 되는 민족이 아니라 풀어주어야 되는 민족입니다. 싸움을 하면 으레 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따지지 말고 풀어버려?”라고 말합니다. 화가 나면 ‘화풀이’를 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시름풀이’를 합니다. 원한도 풀고 회포도 풉니다. 심심한 것은 이미 풀어진 상태인데도 또 풉니다. 그것을 심심해서 푸는 것 ‘심심풀이’라고 합니다. 푸는 것이 심리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몸도 풉니다. 임산부가 아기를 낳으면 몸을 푼다고 합니다. 코가 답답하면 코도 풉니다. 다리가 아프면 다리도 풉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도 풀어야 합니다. 이런 민족성이 있는 우리민족이 원한을 가지고 살아가겠습니까? 다 푸시기를 바랍니다.
마 18:24-35에 보면 일만 달란트를 빚졌던 자가 가까스로 자기 빚을 탕감 받고 길을 나서던 중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받은 탕감의 은혜를 잊고 자기가 입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액수를 빚진 채무자를 자기 옥에 가두었다가 후일 이 일이 발각되어 자신도 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마태는 35절로 이 비유를 정리하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소개합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형제의 그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은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물음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관념상 7은 완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는 것은 완전한 용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자기 이웃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용서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유럽 봉건시대 때 어느 성주가 다른 성주를 미워하여 기회만 있으면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데, 한번은 자기 적이 자기의 영토를 지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주는 사람을 숨겨놓고 적이 지나갈 대 죽여버리라고 하였으나, 그 곳 주교가 이 사실을 알고 간절히 “성도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니 용서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거절하자 주교는 예배는 드리고 가라고 하여 성주와 부하들을 모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의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을 드리는 것이었다. 주기도에는 “우리가 우리 죄를 용서하였사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하는 부분이 나온 것입니다. ”이제 주기도를 드릴 때에는 나를 따라서 한 마디씩 따라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희롱하거나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저편 성주의 죄를 용서하고 이 기도를 하겠습니까? 용서해 주지 않고 이 기도도 하지 않겠습니까?" 성주는 가만히 생각해 보더니 죄를 용서해 주고 기도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3. 우리를 시험(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13절)
한글 개혁성경에서 사용된 ‘시험’(peirasmon:페이라스몬)이라는 말은 '유혹'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시험(test)하시지만 결코 우리를 유혹(temptation)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유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도 않으십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유혹)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유혹’은 약 1:14-15절에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의 기도는 자신이 언제든지 유혹을 받을 수 있다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가롯유다가 이 유혹에 빠졌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가르쳐준 이 기도를 열심히 했더라면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의 “다만:ajlla;(알라)”은 “그러나, 도리어”라는 반의적인 접속사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두 가지의 경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만”이라는 단어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만 “굶어죽게 되더라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에 대해서 다 용서하지 못했을 지라도”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내 영혼을 사단으로부터 지키는 것입니다. “다만”이라는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앞의 기도에 비해서”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다른 모든 기도의 제목보다는” 늘 우선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에베소서 6장 11-17절에 보면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나를 위한 최종적인 기도는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구할 것입니다. 막 10: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아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마칩니다. 이 부분은 주기도문 초두에 나오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라는 기도와 짝을 이루며 주기도문 전체를 감싸는 송영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이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근원이요 역사의 주인이라는 확신에 찬 송영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것은 세속적인 복에 대한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인간을 위한 기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의 삶이 전제될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눅12:31)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열려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역대상 29:10-11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이심이니이다.”
기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나의 아버지로 믿는 일입니다. 믿음이 없는 기도는 시끄러운 공허한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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