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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목회, 신학 > 설교 등록일 2006-07-22
작성자 관리자 (admin)
예수님의 말씀(54. 기도할 때에)
본문 : 마태복음 6:5-8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 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내용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내한하여 얼마 안되어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드린 기도문입니다.

저는 이 기도문을 성경처럼 읽고 또 읽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힘들다고 느껴질 때 더 많이 읽었습니다. 어느 한 구석 외식적인 흔적이 보이질 않습니다. 솔직 담백하면서도 결코 구부러지지 않은 믿음을 가진 기도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했지만 결코 불만이 섞여있지 않았습니다. 이 기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2-3)라고 한 말처럼 불평의 내용도 없습니다. 반대로 언더우드는 눈물로 기뻐할 날이 올 것인데 그날을 위해 현재의 믿음을 붙잡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언더우드가 이 기도를 드린지 63년이 지난 1948년 5월 31일에 대한민국 첫 국회가 열렸습니다. 이날에 국회의원들 전원이 기립한 가운데 이윤영 목사님이 기도하고 대한민국 국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복을 내리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셔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셨으며 세계인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써 역사적인 환희의 날이 우리에게 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드러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직까지 남북이 둘로 갈린 이 민족의 고통과 수치를 씻어 주시고 우리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민생의 도탄이 오래 갈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만 확대될 것이오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속히 이 땅에 임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독립을 주신 하나님, 이제는 남북의 통일을 주시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어떤 자세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기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기도는 그 어떤 행동보다 더 즉각적인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5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 7절 또 기도할 때에... 세 번 나옵니다. 이 말씀을 명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때에”라고 번역된 호탄(o{tan)은 “언제든지”라는 뜻인데 가정법 현재시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규칙적인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 기도의 효능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잘못된 기도를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세상에서 볼 수 있는 제일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 대표적인 기도가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는 기도입니다. 외식하는 자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① 악하면서도 선을 가장(pretence)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남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2:15-18).
② 자기 만족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속이는 유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경건한 체 하지만 금방 발각됩니다(9:1-5). 예수님 때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③ 외식을 하면서도 자신과 하나님을 위해 가장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유형입니다. 가장 완벽하게 외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으면 그 행위를 보는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이런 외식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기도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미래형으로 이 말을 듣는 이후로는 허황된 위선적인 잘못된 기도를 하지 말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런 외식의 유형에 대해서 두 가지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이 사람들의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경건 생활을 알리려는 수단으로 하루 세 번씩 회당에 올라가 기도드렸습니다(눅 18:9-14, 행 3:1, 10:9). 또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자세는 엎드려서(민 16:22, 단 7:17, 계 11:16), 무릎을 꿇고(대하 6:13, 눅 22:41, 행 9:40), 또 앉아서(삼하 7:18), 또는 서서(삼상 1:26, 막 11:25)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신체적 자세를 지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동기를 문제삼고 게신 것입니다.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들어주실 기도란 없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철이 없던 시절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도사 때 삼각산에 올라가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바위에 그럴듯한 모습으로 앉아 목소리는 오고가는 사람이 다 들을 정도로 목청을 높여 “주여~” 소리를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마치 경건한 척하는 유대인들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드릴 때 얼마나 내 자신이 하나님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거짓말이 탈로 난 어린아이처럼 왜 창피한 것 있잖아요.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예수님이 공적 기도를 금하신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초대 교회의 공적 기도에 대해서 금하지도 않으셨으며 오해하지도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했으며 사도행전 1: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가룟유다 대신에 제자를 뽑을 때 하신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어도 합심하는 기도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공중에 나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외식하는 자의 기도와는 반대의 개념으로 하나님과 자신과의 만남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런 장소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골방”(tamiei'ovn:타메이온)은 “창고, 밀실”을 말하는 용어인데 이 어원은 “자르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세상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밀실은 정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밀실은 하나님과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민족의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사 26: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언이 말씀으로 마지막 때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전에 문설주에 피를 발라 유대인의 표시를 함으로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는 모두 죽이고 이스라엘의 집은 유월하신 하나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골방”은 우리를 환난 날에서 피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 65:24) 하나님은 우리 한국사람보다 더 성격이 급하신 것 같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지는 기도는 부르기 전에, 말을 마치기 전에 들으십니다.
스펄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종종 예배 장소에 있으면서도 거룩하지 않은가?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기도 골방에 들어가는 것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밀은 좋아하지만 그 밀을 빻지는 않는다. 그들은 옥수수를 얻게 될 텐 데도 그것을 모으러 들판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은 기도의 골방을 떠나기보다는 사자 굴에서의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기도의 골방이 되기를 바랍니다.

7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산상수훈에서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세 번나옵니다(5:47, 6:32). 본문은 두 번째 나오는 것입니다. 갈릴리 지방은 이방 지역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의 출입이 잦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섞여 살고있어 이방인의 관습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5, 6절에서 잘못된 유대인의 기도의 문제를 지적하실 때는 기도의 동기적 측면으로 기도의 장소와 태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이방인들과 비교를 통해서는 내용적 측면을 강조하셨습니다. “중언 부언”(battologhvahte:밭타로게세테)은 이곳에 단 한번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 단어의 어원을 우리가 분명히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단순하게는 이 단어의 뜻은 “지루하게 재잘거리다”입니다. 별 의미 없는 말을 반복적으로 길게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일종의 이방인들이 행하는 주문(呪文)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주문을 하루종일 외운다거나 몇 번을 반복하면 효력이 강화되어 들어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하는 어리석은 신앙관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기도에 있어서 전혀 반복적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언부언이란 중요하지도 않으면서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정말 간절히 기도할 것이 생기면 다른 것은 생각도 안 납니다. 오직 그 문제만 간절합니다. 밤새도록 그 기도만 하게 되지 다른 기도는 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밤새도록 같은 내용을 반복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잡히시기 전날 밤 온 밤을 새우며 기도 하셨습니다. 그 때 반복적으로 같은 내용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합당한 기도입니다. 마땅히 드려야할 기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8절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하면 우리의 기도는 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학교 유치부 교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기도하려는데 계속해 우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다가가 물어보았습니다. “왜 울지?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거란다. 울지 말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애기해봐 착하지?”
“선생님 그게 아니에요. 지금 기도하려니까 생각났는데, 제가 어젯밤 아빠를 위해 기도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미키 마우스’를 보느라 잊어 버렸어요. 우리 아빠가 아프거든요. 하나님이 내가 기도를 안 해서 우리 아빠 병을 낫게 해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선생님.”
우리도 이 아이와 같이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의 일이 잘 안되면 네가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서 그런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가? 말씀을 읽지 않아서 그런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우리처럼 그렇게 옹졸하신 분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구하면 주고 그렇지 않으면 주시지 않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수동적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만큼 적극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우리는 은혜아래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감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축복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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