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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오피니언 > 목회칼럼 등록일 2012-09-10
작성자 관리자 (admin)
예수님 생각하기
선종욱 목사
히브리서 3:1-11
선종욱 목사 / 코어코칭연구소 대표

연애에 빠진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혹은 연애시절을 생각해보자.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안 보면 보고 싶고, 누우면 그 사람 생각이 난다. 어떻게든 얘기를 나누고 싶다. 관심이 있기 때문에? 아니, 사랑하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스마트폰에 문자 메시지가 있어서 쉽게 연락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전화로도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다 더 보고 싶었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사랑하면 이런 감정이 생긴다. 본능이기 때문이다.

계시록 2장을 보면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하셨다. 사랑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에베소 교회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어디에서 사랑이 사라졌는지를 더듬어보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되찾으라고 하신다. 도대체 사랑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일까? 에베소 교회에 사랑이 작용하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늘 이 시대도 그렇다. 우리의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사실 사랑하면 상대의 생각을 많이 한다. 상대방에 대한 동경이 많아진다. 그리고 상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선물을 사 주고, 기념일을 챙겨주고, 안부를 물어주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다. 심지어는 분에 넘치도록 명품을 사 주는 것 역시 사랑하는 일이다. 진짜 사랑은 상대가 만족할 수 있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상대를 진심으로 배려하는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렇게 하지만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를수록 이런 일들이 점점 흐려진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왜곡해서 해석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은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사랑이다. 폭력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다. 진짜 사랑은 상대를 위한 희생이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상대의 만족을 생각하고 그에게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을 공급하는 일이 사랑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하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진심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감사한 일이다.

1. 깊이 생각하기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생각해 주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분에 사랑에 응답해야 할까? 단순히 주고받는 도식적 사랑의 관계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렇게 한다면 예수님의 사랑을 현저하게 훼손하는 일이 된다. 예수님의 사랑은 목숨을 버린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아주 자연적으로 감동과 감격과 감화 속에 빠져든다. 그분의 사랑에 휘감겨진다.

신앙의 사람은 주님의 사랑에 휘감겨진 사람이다. 휘감겨지고 보면 예수님을 도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랬으니 나도 이런다는 식이 아니다. 예수님께 너무 고마워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대체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생각할수록 더욱 감사하고 또 더 생각하고 싶어진다. 이런 깊은 생각이 곧 사랑의 관계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존재성과 사역을 묵상하게 된다. 일부러 묵상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억지로 생각하는 것은 깊어지지 않지만 자연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깊어진다. 관심이 예수님이기 때문이고, 더 알고 싶은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예수님은 믿는 도리의 사도시고 대제사장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할 사람들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다.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사랑을 입었고 예수님의 사랑에 의한 은혜를 입었다. 사랑의 대상들이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충성한 것이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일이다. 모세보다 더 큰 순종을 하셨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존귀한 분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이다. 모세가 그림자라면 예수님은 실존이다. 우리는 실존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

2. 충성을 생각하기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충성한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깊이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는 자연스러움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어야 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이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수님께 충성을 명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충성을 통해 열매를 거두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충성을 생각할수록 예수님이 더 드러난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충성하였다. 같은 충성이지만 격이 다르다. 사환이 충성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들은 그 충성의 대상이 되고, 충성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아들이 충성하였다.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의 뜻이었고, 아들의 순종이 있었다. 하나님께는 예수님께는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반전이 있었다.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이 반전이 놀랍기만 하다.

아들이 충성한 이유가 무엇일까? 모세의 충성으로도 완성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충성으로는 백성들을 시작하게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순종은 불가능하였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방황한 이유는 완전한 순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한 믿음을 보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앞에 놓고도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였다. 참 가슴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아들은 완전하게 충성하였다. 그 충성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하늘의 소망이 생겼다. 예수님을 따르는 담대함이 생겼다. 예수님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없으면 충성하지도 못한다. 억지로 충성하는 척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꼴이 된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보려는 교만이 생긴다. 이것은 사랑을 포장하는 폭력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강퍅해지는 일이다. 우리 예수님의 충성을 생각하면 우리 생각의 짧음이 드러난다.

3. 안식을 생각하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심하였을 때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는 것이다. 의심한 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고, 20세 이하의 자녀세대들이 장성하여 가나안에 들어갔다. 심지어는 충성의 시작이었던 모세도 죽었다. 그렇게 바라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다만 의심하지 않았던 두 사람, 죽음을 각고하고 믿음을 가진 두 사람, 이스라엘을 향해 애통하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언약의 땅이었다. 그 땅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모세는 그 땅을 바라보았다. 아니 모세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충성할 수 있었다. 출애굽 제1세대 중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두 사람 역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적 본능을 갖고 있었다. 사랑하면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두 사람에게서 영원한 안식이 생각되는 것이 당연하다. 미혹하는 일이 생길지라도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생각하고, 영원한 안식을 생각하는 것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미혹이 자리 잡을 틈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충성을 생각한다면, 또 영원한 안식을 생각한다면 미혹을 받는다 할지라도 미혹이 생각 속에 자리 잡을 틈이 없다. 미혹이 찾아오는 것은 죄라고 할 수 없지만 미혹의 생각이 자리잡는 것은 죄이다.

미혹의 생각이 자리를 잡으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미혹에 의한 말을 한다. 미혹을 당연히 여기고 미혹의 욕구를 채우려는 행동을 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것처럼, 여호수아와 갈렙을 향하여 돌을 들어 던지려는 것처럼 말이다. 미혹이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 안식이 사라진다. 왜냐하면 안식의 자리에 미혹이 대신하기 때문이다. 안식을 생각하지 못하는 데 안식에 들어갈 리 만무이다.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답이 나왔는가?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으려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다.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아들이신 예수님이 충성하셨다. 우리 때문에 충성하신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우리처럼 부족한 죄인들을 향하여 말이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다보면 예수님의 충성이 생각난다. 예수님으로 인한 안식도 생각난다. 생각의 연결이 줄줄줄 일어나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 예수님의 충성을 생각하고 우리에게도 충성심이 불일 듯 일어난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안식을 생각하고 그 안식을 향하여 달려가고 달려가는 와중에서도 안식을 누린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사랑관계에서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체험된다. 우리는 그런 체험을 누릴만한 사람들이다. 그런 체험의 기회가 열렸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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