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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기획, 특집 > 등록일 2012-07-16
작성자 관리자 (admin)
가난한 짐꾼으로 짐을 걸머지고 걸으실 수 있습니까?
선교사, KL동남아선교센타 노종해 목사
페낭에서 출발한 천주교 선교사들 , 순교의 발걸음 이어져
조선 땅에 피와 뼈를 뿌리고, 한국 기독교의 터전 이뤄
동남아 이슬람권 선교지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돼

노 종 해 목 사
(선교사, KL동남아선교센타)

나는 1988년 말레이시아 선교사로 도착해서 우선 선교지 조사를 하는 가운데 북부 페낭 섬(Pulau Pinang, Penang Island)을 방문하여 ”페낭신학원“을 알게 되었고, 선교활동으로 오가며 틈틈이 방문하여 보았다. 페낭 신학원의 이름은 ”The General College“이며 원장은 로빈 앤드류(Robin Andrews) 신부였다. 나는 원장의 안내로 신학원 구내를 돌아보았고, 특별히 순교자의 유골을 모셔둔 구내 성당과 박물관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성당 제단 우측에는 순교자를 기리는 소제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앵베르(Imbert) 주교와 샤스탕(Chastan) 신부의 이름이 있고, 이 분들의 순교지는 “Korea"라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박물관, 교육실에는 ”한국 천주교 순교자“ 그림이 있는 것도 보았다. 한국인 최초 신부요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도 바로 이 신학원에 머물렀다 한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선교는 말레이시아와 관계가 있음을 알았다.

朝鮮敎區長-초대주교 브뤼기에르 / 제2대 주교 앵베르 / 샤스탕 신부


한국 천주교가 북경교구에서 독립되고 첫 조선교구장(朝鮮敎區長)을 임명받은 때가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Gregorio) 16세로부터 이다. 이때 첫 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분이 브뤼기에르(Bruguiere,蘇) 신부이다. 당시 브뤼기에르 신부는 페낭 신학원(General College) 원장이었다. 브뤼기에르 신부가 자신이 조선교구의 초대 주교로 임명되었음을 알게 된 것은 1년 후 1832년 7월 25일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9월 21일 페낭 섬을 떠나 조선으로 향하였고, 이때 페낭신학교 교수인 파리외방전교회의 샤스탕(Chastan) 신부도 함께 한국에 들어가 브뤼기에르 주교와 고락을 함께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먼 뱃길과 중국 만주 벌판을 걷고 여행하며 북경의 요동까지 이르렀으나 한국입국을 기다리는 동안 뇌일혈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때가 1835년 10월 20일 한국의 동지사 일행에 끼어 입국하기를 기다리다가 한국의 하늘만 바라보고 숨을 거두신 것이다.

한편 샤스탕(Chastan,鄭)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에 뒤이어 중국 대륙과 만주를 헤매다가 봉황성에 이르렀는데 한국의 신자들을 뜻밖에 만나게 되었다. 이때가 1836년 12월 28일이었다. 한국교인들은 샤스탕 신부에게 “신부님은 가난한 짐꾼모양으로 짐을 걸머지고 걸으실 수 있습니까?”고 물었다. 샤스탕 신부는 “걱정 마시오 나도 부자는 아니오”라고 선뜻 대답하였다. 샤스탕 신부는 방갓의 상주 옷차림으로 압록강(鴨綠江) 빙판을 건너서 의주(義州)에 이르렀고, 1837년 1월 15일 서울(京城)에 무사히 도착하였는데 당시 나이는 34세였다. 샤스탕 신부는 북경(北京)에서 활동하다 1836년 입국한 모방(Maubant) 신부와 협력하여 전교에 힘을 썼고, 1837년 한 해 동안 1,237명에게 세례를 주어 그해 교인 총수가 6,995명에 이르렀다.

교황청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 후임으로 앵베르(Imbert) 신부를 조선교구 2대 교구장로 임명하였다. 앵베르 주교도 말레이시아 페낭신학원 교수이며,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청나라 사천성에서 전교활동 하던 분이다. 이분은 브뤼기에르 주교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으로 그분의 못 이룬 전교의 뜻을 기쁨으로 이으려 하였다. 앵베르 신부는 1837년 12월 17일 조선교우의 안내를 받아 압록강 얼음을 상복차림으로 건너서 의주(義州)에 이르렀고, 1838년 1월 1일에는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여 한국에 상주한 첫 교구장이 되었다.

순교자, 앵베르와 샤스탕 동상(페낭신학원) / 새남터 순교자기념관(용산) / 노고산, 앵베르, 샤스탕, 모방 신부 순교선양비(서강대학)


우리가 기억할 것은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앵베르(Imbert)와 샤스탕(Chastan) 신부가 모방(Maubant,羅伯多錄)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당하여 순교(殉敎)하였다는 사실이다. 새남터에는 오늘날 순교자기념관(殉敎者記念館)이 서있으며, 이들의 시신이 던져진 노고산에는 서강대학(西江大學)이 서있다. 이분들이 참수당한 날은 1839년 9월 21일이다. 한국 기독교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설립된 교회이다. 그런데 이분들이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한국선교를 향해 결단하고 출발하였다는 점은 선교사의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게 한다.

“페낭 신학원“은 어떠한 신학원인가?. 페낭의 신학원인 "The General College"는 아름다운 페낭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신학원은 1665년에 설립되었고, 설립자는 파리외방전교회(The Paris Foreign Mission Society) 소속 신부인 팔루 주교(Bishop Pallu)와 모트(Lambert De La Motte) 신부이다. 이분들은 아시아 선교를 위한 지도자양성을 목적으로 신학원을 설립하였고, 씨암(Siam,태국)의 아이티아(Ayithia)에 위치를 두었다. 당시 씨암에는 2,000여 천주교인들이 있었으며 아이티아는 씨암(태국)의 수도였다.

페낭신학원에서 유학하는 한국인 학생들 21명(1882)


이 신학원에는 태국(Siam), 코친챠이나(Cochin-China;베트남), 인도(India), 한국(Korea), 일본(Japan), 중국(China) 등지에서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박해로 캄보디아로, 인도로 옮겨 다니다가 말레이시아 페낭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순교자의 신앙으로 동양선교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이 신학원은 900여명의 사제(Priest)를 배출했으며 그중 순교자만도 5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한 조선 천주교에서는 충북 제천 배론의 신학당이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로 폐교된 이후 신앙의 자유가 묵인 되던 때, 1882년에는 21명의 한국인 신학생들을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원에 유학생으로 파견하여 한국인 사제를 양성하였다.

한국 천주교의 초대주교인 브뤼기에르(Bruguiere), 제2대 주교이며 최초 한국주재 주교인 앵베르(Imbert)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최초 입국한 샤스탕(Chastan) 신부가 모두 말레이시아 페낭섬(Pulau Pinang)에 있는 신학원 원장이요, 교수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끌고 숙연케 하는 것은 이분들 모두가 1839년 9월 21일 한국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분들의 신앙과 순교적 삶을 기리는 교회가 지금도 페낭에 있으며 이분들의 이름이 “Korea"란 순교지명과 함께 성당 제단 우측에 모셔져 있다는 점이 우리의 신앙을 다짐케 하며, 말레이시아와 동남아 이슬람권 선교지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한다. 페낭에서 출발한 분들은 짐꾼으로 짐을 졌을 뿐만 아니라, 순교의 피와 뼈를 쏟고 뿌린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사가인 조광(고려대) 교수는 천주교와 개신교 선교사의 생활을 비교하며, 여담인 것을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을 눈 여겨 보았다. 오늘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신앙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이 당시(초기선교)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은 어떤 생활을 하였느냐? 하면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집을 양옥으로 근사하게 짓기도 했습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물자적 풍요가 자신의 신앙과 상관되는 것임을 드려내려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풍요로운 생활 자체도 한국인을 위한 선교방편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반면 프랑스 신부들은 당시 떠돌던 얘기로 ”보리밥, 풋고추, 된장“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들의 선교방식은 한국인들과 똑같이, 직접 같이 생활하면서 그 안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趙珖의 敎會史 講義; 韓國 天主敎 200年, 서울, 햇빛출판사 1989.p62)

페낭신학원(1866년) / 페낭신학원(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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