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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목회, 신학 > 신학 등록일 2012-06-01
작성자 관리자 (admin)
종교다원주의 I
장홍표 목사
Ⅰ.서 론
아틀란타 스와니 한인 꿈이있는교회목사,두손선교회 섬김이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 다원주의(多元主義)가 새롭게 경험된 하나의 現實이 되었다. 최근 한국교회와 신학계에서도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 문제가 뜨거운 논쟁거리로 대두되고 있다. 근대 이후의 세계는 생물과 물리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되었는데 그 세계는 진화적(進化的)인 세계라는 것이다.근대 이전 세계의 이미지는 유기체(有機體)적인 것이고,근대 세계의 상은 기계적(機械的)이며 이원론적(二元論的)인데 반하여 근대 후기 세계의 이미지는 역사적(歷史的),관계적(關係的),그리고 인격적(人格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 이후의 사상 체계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고 하는데 그 특징인 불확정성(Indeterminacy),탈경전화(Decanonization),보편내재성(Immanence)등은 다원화된 세계에서의 종교적 다원주의의 태동(胎動)을 촉진했다.또한 기독교 전래에 있어서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요구되는 타종교에 대한 문제마저도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왜냐하면 그리스도교가 현대와 같이 다원화된 세계에서도 여전히 선교하고 의미있게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면 즉시 타종교와의 대화가 문제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에 관한 이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기독교 절대주의(Christian absolutism),종교다원주의(pluralism) 및 포괄주의(inclusivi- sm)가 그것이다. 기독교 절대주의(Christian absolution)는 성서적이며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으로 기독교만을 참 종교요 절대 종교로 믿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론이다.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는 진정한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 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길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이론이다. 포괄주의(inclusivism)는 기독교 절대주의와 종교다원주의를 절충하는 입장이다.다른 종교나 문화권에 있는 경건한 사람들은 사실상 기독교인이므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인간들은 전에부터 타종교와의 만남을 계속해왔고,그들과의 대화도 오랫동안 이루어져 왔었다. 그러나 오늘날 처럼 이토록 심각하게 받아들여 진적은 없었다. 종교다원주의는 오늘날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문제로 다가왔다.그러나 우리가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될 때 자칫 우리의 본래적인 신앙이 변질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종교다원주의가 타종교와의 개방적 자세를 취하게 될 때 생기는 문제를 리차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기독교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과 유일성에 관한 근본적인 확신을 포기 하지 않은 채,다른 종교 전통을 구원에 이르는 유효한 방도로 인정할 수 있을 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 인류를 구원시킨다는 믿음과 유대교,힌두교,이슬람교,그리고 불교가 구원에 이르는 또 다른 길이라는 믿음이 과연 양립할 수 있을까?”
즉,타종교와의 상호 만남을 통해서,대화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는 할 수 있으나 자칫 잘못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주성(lordship) 고백’이 상실되지는 않을 것인가 하는 염려를 모든 기독교인들은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게 위하여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바른 이해와 객관적 연구를 토대로 기독교 절대주의가 성경적이고 구원론적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쓰여진 본 논문의 전개방식은 Ⅱ장에서 종교다원주의를 다루는데 역사적 상대주의를 주장하여 종교다원주의의 시작을 연 에른스트 트뢸취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언을 주도한 칼 라너를 중심한 그리스도 중심적 접근 방법의 포괄주의,그리고 신중심적 모델을 가지고 종교다원주의의 대화를 꾀하고저 하는 폴 니터의 사상을 살펴보고,Ⅲ장에서는 복음주의의 종교신학인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에 대하여 다룰 것이다.결론에 이르기 전에 Ⅳ에서는 성경과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기독교의 독특성과 그리스도의 규범성을 변증하고,결론 부분인 Ⅴ장에 가서는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의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이 성서적임을 입증하려고 한다.

Ⅱ.종교다원주의 이해

A.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만남의 시작-Ernst Troeltsch

근대 초기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상의 흐름은 크게 둘로 분류되는 데,하나는 그리스도라는 이념(理念) 또는 원리를 영원한 현재적 육화(肉化)로 보는 칸트의 관점이고,또 다른 관점은 슐라이어마허로 대표되는 인본주의적 접근방법이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라는 근본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의미를 해석했다. 그는 종교적 경험이라는 보편적 인간 현상에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두었다.칸트나 슐라이어마허는 모두 타종교에 대해 깊은 지식은 갖진 않았으나,전자는 이성을 통해서,후자는 주관적인 절대의존의 감정을 통해서 기독교의 배타주의를 다루었다.여기에 20세기에 들어서면서,진화론적 진보가 종교적 상대주의의 개념에 추가되어 인간의 모든 산물은 역사성을 지닌다고 하는 역사적 상대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칸트-릿츨 학파의 계보를 이어받은 트뢸취는 리케르트와 빈델발트 등으로 연결되는 신칸트학파의 사유와 맥을 같이 하면서도,전혀 새롭게 종교의 본질 물음이란,기독교도 예외없이 현대의 학문적 정신과 더불어 통일적인 전체 구조속에서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여기서 출발하여 ‘역사’의 개념을 그의 신학원리로 내세우면서,종교의 본질은 교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역사속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어느 경우에도 역사에는 본질이란 있을수 없다고 주장한다.왜냐하면 역사는 미래를 향하여 열려있기에,만일 우리가 역사의 본질을 논한다면 역사전체를 우리가 꿰뚫어 알 수 있다는 말이 되는데,이처럼 미래 전체를 예상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므로 트뢸취는 본질을 찾아내려는 가능성을 부정했다.
역사적 콘텍스트는 고정 불변한 실체가 아니고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므로 역사 과정 속에서 창출된 그 어떤 성취물도 그것이 절대 불변하다고 그 시대 사람이 믿는 이념이나 절대관념,종교,가치,예술,삶의 체계등이 모두 상대적이며,제약된 것이며,변화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트뢸취는 따라서 절대주의를 거부하였고,계시는 절대적인 것을 지향하는 진보적 운동으로 여겼다.그리고 절대적인 것은 완전히 성취할 수 없다고 보았다.그는 구약성서와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단지 총체적인 계시 역사의 한 단계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다.그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시 될 수 없었으며,단지 다른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들과 같은 지위를 가진 자로 여겨졌다.예수는 기독교가 진화,발전하는데 필요한 요건들을 제공하였지만,진리의 절대적인 타당성은 기독교나 다른 어떤 종교들에 의해서도 주장될 수는 없고,진리는 단지 나에게 있어서, 나의 문화에있어서,그리고 나의 종교에 있어서의 진리일 뿐이다 트뢸취는 말한다.

역사와 관계하는 정황 속에서는 어떤 확고부동한 절대 규범은 존재할 수 없다.그러므로 역사적 방법의 결과를 통하여 성립한 모든 역사의 연관적 관계로서의 가치 규범은 그 자체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그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란 오직 모든 역사가 그 밑에 종속되는 초월적으로 부상하는 목적으로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목적 사유는 이미 종교적 선험성의 역사철학으로 열려진 체계속에 ‘종교적 선험성의 체계는 항상 성장 속에 있을 것이며,스스로 끊임없이 교정되어야 할 것이고 열려진 개방된 입장을 보지(保持)하게 될 것이다’는 것으로 반영되고 있다. 역사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헤겔의 역사 형이상학의 방식을 도입한다.
“종교적 선험성의 본질은 이성의 본질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절대적 본체관계 속에 놓여있는데,바로 이러한 것의 결과로 모든 현실적인 것과 특별히 모든 가치가 출발점과 규범으로서의 한 절대적 본체와 관계된다.”
그의 절대자 사상은 역사를 초월한 동시에 역사 안에 존재한다.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는 참여,연속성,그리고 공유의 형식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의 신은 ‘역사와 인접해 있으며’,역사는 세계를 통과하는 신의 행진이요,또는 무한히 창조적인 신적 생명을 표현하는 신의 가면으로서 인식된다.
종교적 선험성(先驗性)은 오직 역사적 과정안에서,역사적 과정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고 경험될 수 있었다.그러므로 종교적 선험성은 역사의 모든 다양성,끊임없는 변화,그리고 임의성에 의존하며,또한 그것에 의해 규정된다.바로 여기에서 종교들이 존재하게 된다.모든 종교들은 인간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는 종교적 선험성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이러한 종교적 선험성은 종교들 없이는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트뢸취는 ‘역사적 과정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따라서 상대적인 실재들만을 허용한다. 어떤 종교도 역사밖으로 나갈 수 없다’ 고한다.하지만 이런 상대주의에도 불구하고 트뢸취는 모든 종교들에 있어서의 진화론적인 진보의 공통된 목표로서의 잠정적인 절대자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B.포괄주의-K.Rahner

이 포괄주의는 라아너(K.Rahner)를 중심한 그리스도 중심의 모델이다.기본 논리는 “타종교 속에 있는 모든 진리는 본래 그리스도교의 것이다”라는 것이다. 현대의 종교적 다원주의에 그리스도교가 응답하는 고백적 사도들 중 로마 가톨릭의 노력은 매우 개방적이고,이미 새로운 모델들에 도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입장은 타종교 신앙에 대해 변증법적인 긍정과 부정을 하는 바 한편으로는 타종교도 하나님이 현존하는 장(場)이 될 수 있다고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구원”에 이르기 까지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파니카는 이를 일컬어 “타종교에도 진리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불완전하고 완전한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교에만 있다는 태도”라고 말한다. 또한 니터는 이를 일컬어 “구원에 이르는 많은 길을 인정하지만 오직 하나의 규범만을 인정하는”것이라고 보고 있다. 라아너는 구원사와 세계사는 전혀 동일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공존한다고 말한다.이렇게 라아너는 포괄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반면 현대의 대부분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제 종교에 대하여 서로 매우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제2바티칸 공의회와 현대 로마 가톨릭 사상이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들의 관계성에 있어서 분수령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주후 473년의 “알즈 공의회”는 그리스도 즉 우리의 주요 구세주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저주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았다”고 확정지었다. 그후 “제 2차 라테란 공의회”(1215)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시프리안의 신조를 반복하면서 “전혀”라는 말을 추가하고 있다.또한 “플로렌스 공의회”(1442)에서는 오직 가톨릭 교회 안에만 구원이 한정된다는 내용의 더욱 완강한 입장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배타적 경향들은 16,17세기에 행해사 헨리,콜럼버스,마젤란 등에 의해 유럽의 발견의 시대가 동터오면서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그것에 의해 그리스도 혹은 교회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많은 사람들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지옥으로 떨어져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기실 오늘날도 수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존재 조차 모르는 곳에서 태어나 일생을 그러한 상태로 끝내고 있다.따라서 교회를 은혜의 유일한 통로로 보았던 가톨릭의 배타적 이해는 포괄적 이해로 바뀌게 된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가톨릭의 신념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에서 “교회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으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비그리스도교인들이 교회의 “영혼”에 속한다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그들은 불완전하게 혹은 잠재적으로 교회의 회원에 속할 뿐이었다.
라아너는 보다 적극적인 종교신학에로 향하고 있는데 그의 출발점은 신이 전 인류를 구원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신념이다. 신념, 실제로 이러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신은 그에 기초하여 행동할 것이라고 라아너는 말한다.이 말은 구원에 절대 불가결한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그는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낙관론에 영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그의 유명한 초자연적인 실존적인 것에 대한 사상의 전개는 바로 신의 구원 의지에 대한 낙관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종교들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관점은 종종 “익명의 그리스도교”라는 잘 알려진 논쟁적 이론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론은 로마 가톨릭 모델의 다른 신앙 이해의 폭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 주는 것이다. 사실상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사상을 무차별하게 보는 비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이름은 절대자를 추구하며 진리를 찾고 사랑의 봉사를 쉬지 않는 선의의 비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런 타 신앙에 대한 보다 낙관적인 그리스도교적 태도를 넓히고 이러한 태도를 일으키려는 것이었다.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만 사용될 수 있고,타 종교들과의 대화의 수단으로서는 사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라아너는 이를 통하여 타 신앙인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배타주의를 깨뜨리려 한 것이었다.결국 라아너의 전통적 주장은 모든 구원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성되고 그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라아너에서의 은총의 뜻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보편성이라는 개념을 초월성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라아너에 있어서 초월적인 은총은 곧 보편적인 은총을 뜻하게 된다.중요한 것은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라아너가 “초자연적인 실존성”이라는 개념으로써 보편적인 은총을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라아너는 자연과 은총을 구별하면서도 은총으로부터 분리된 자연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연과 연결된 보편적인 뜻의 은총을 ‘원래의 구원은총‘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될 구원의 은총을 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 은총’이며,‘거룩케 하는 은총’과는 구별된다. 라아너에게 있어서도 예수가 인류 역사의 중심을 차지함은 분명하다.예수를 통해 궁극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이루어졌다.그런데 기독론에 대한 이해에서 ‘밑으로 부터의 방법’과 ‘위로부터의 방법’을 서로 연관시키려는 라아너는 기독론을 좁게 이해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예수의 수육(受肉),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이제는 타종교 속에서도 그리스도가 그의 영을 통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인류는 객관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구원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일반적으로 은총으로서의 ‘초자연적인 실존성(實存性)’이 모든 사람에 존재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은총의 역사 속에 타종교도 포함된다고 판단하는 것이며,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익명의 유신론자(an anonymous theist)'일 뿐만 아니라,‘익명의 크리스챤’됨을 라아너는 지적하기에 이른다.
이와같은 관용적 포용주의(包容主義)에도 불구하고 라아너는 최소한도의 한계를 설정한다. 익명의 크리스챤이란 아직 의식에 이르지 못한 신자이며,객관적으로 성취된 구원에 대해서 주관적인 응답을 하지 못한 상태임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세례를 통하여 주관적인 응답이 이루어질 때에만 교회의 공식적인 구성원이 된다는 뜻이다.
라아너는 익명의 크리스챤이 될 수 있는 조건에 또 다른 제약을 설정하고 있다.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적으로 부인하거나 거절하는 사람을 익명의 크리스챤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비록 잘못된 방법으로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라면 익명의 크리스챤이 될 수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을 실천하는 도덕적인 사람을 익명됨의 조건으로 추가하는 일을 라아너는 잊지 않고 있다.
라아너에서 추론될 수 있는 기독교의 독특성은 ‘포용적인 독특성’이며 구원을 위한 예수의 규범성이 근본적으로는 유지되지만,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뜻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면,예수의 영이 타종교에도 존재할 수 있음을 시인하면서 구원을 위한 예수의 규범성의 엄격함이 완화되었다는 문제가 생긴다.

C.신중심적 모델-Paul F.Knitter

교회중심의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하고 또 다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니터는 새로운 형태의 기독론과 기독교의 독특성을 제시한다.타종교와의 에큐메니즘으로 확대되면서 편협된 교회의 개념이 대화를 위해서는 지장이 됨을 시인할 뿐만아니라,그리스도에 대한 편협한 이해도 대화를 어렵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리하여 하나님 중심의 관점으로 이어지면서 교회나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고 예수에 대한 보편성의 중요성을 재평가하게 되었다고 니터는 지적한다.
타종교와의 대화에서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문제는 기독교 및 예수의 독특성에 관한 물음이다. 옛날과 같이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기독교의 독특성이 주장되고,예수에 있어서만 참된 계시와 구원이 성취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아너는 마찬가지로 배타성에 반대하면서 포용적인 독특성이 주장되거나,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범한 독특성의 암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모든 종교를 포함하게 되는 것이라면,최소한 예수는 모든 종교에서 구원의 중심이 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는 ‘관계적인 독특성’이라는 기독교의 독특성을 표시할 수 있다면서 니터는 이에 동의한다.관계성과 절대성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절대라는 말이 표시하듯이 ‘solute(free)'는 자유로우며 어떠한 관계도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어원을 가진 말이다. 이에 반해 관계적이라는 예수의 독특성은 다른 종교적 인물들과 관계를 가지려는 능력의 독특성이라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배타적이거나 규범적인 것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인 입장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비규범적인 기독론의 입장이 신약 성경에 선포된 예수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니터는 생각한다.
관계적인 독특성을 내세우는 니터가 종교의 다원성을 긍정함은 당연할 것이다.분명히 종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종교의 독특성은 시인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근본적인 차이 떄문에 긴장이 초래되는데 이러한 연고로 종교 간에 보충적인 관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어떻게 보면 양면적인 성격 가운데 한 면을 강조하는 두 종교의 차이가 나타나는 때야말로 이러한 보충성이 절실하다고 니터는 생각한 것이다. 니터의 설명은 계속된다. 바벨탑의 비유를 보면 다원성은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되며,다른 계시나 다른 구세주도 예수 못지않게 중요할 것이다. 배타적인 절대적 독특성도 아니고,포용적이거나 비범한 독특성이 아닌 관계적인 독특성에 입각하여 종교 간의 보충적인 측면을 니터가 강조하는 것이 확실하다. 물론 예수가 독특한 것같이 다른 종교의 구세주도 독특하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상과 같이 기독교의 독특성을 관계적인 독특성으로 표현햬지만,그것은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뜻의 독특성을 주장한 것에 불과하다.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규범성을 시인하고 있지만 예수의 위상을 상대화할 가능성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Ⅲ.복음주의 종교신학-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

A.그리스도의 유일성(唯一性)과 절대성(絶對性)

서구철학과 신학이 동양종교의 가치를 발견하고 상대적으로 비평주의에 근거하여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보는 비교종교학적 자세는 역사적 예수에 기초한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기독교를 이렇게 상대화할 때 교회는 스스로 성장을 포기하는 것이다.라토렛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강조하는 어떠한 형태의 기독교도 수세기를 통하여 스스로 재생산하는 능력을 보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20세기 초기만 하더라도 WCC가 성취설(成就說)을 주장하였지만 이를 제안한 당시의 사람들은 기독교의 절대성과 전도를 희생하려고 하지않았다.
종교다원화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자들은 성경은 기독교 밖에도 계시가 가능하며(멜기세덱,욥,발람 등) 예수님과 바울도 대화를 통하여 전도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종교의 사람들은 사랑으로 대하셨지만 그들의 잘못된 신앙이나 사상에 대하여는 책망과 교정을 아끼시지 않았다.그는 결코 그의 확신을 주저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조용하면서도 가감이 없이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Flod Filson은 초대교회의 이교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고대교회는 상치되는 철학과 종교의 격동이었다. 신약에서 거짓교사를 정죄한 것을 보면 모든 신자들이 세상적인 일에 항복하는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일관된 내용은 교회는 유일신론의 유대적 전통과 하나님께 대한 도덕적인 복종으로 차 있으며 예수의 모범과 사역은 교회로 하여금 이교적 혼합주의의 더러운 물에서 멀리 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취설(成就說)에 대해 동정적인 입장을 취한 스피어 역시 그의 유명한 저서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성⌋에서 “예수는 메시지의 수정이나 타협없이 절대적 진리와 완전한 사랑의 태도로 대하였다.그는 수가성 여인에게는 그녀가 믿는 신이 불완전함을 설명하고 그녀를 사랑으로 그가 계시한 완전한 신앙으로 인도했다. 그는 타종교인에게는 아주 인격적이었으나 진리에 대하여는 분명히 ‘노’라고 하였다.그는 유대교를 정죄하였다.”고 하면서 초대교회의 타종교에 대한 원리를 밝혔다.
바울의 타종교와의 만남은 루스드라인데,그는 신으로 예배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그들의 자연종교를 찬양하기 보다는 분명하게 그들의 종교와 신관을 책망하면서 헛된 일을 버리라고 권고하였다. 물론 여기서 바울이 인간숭배를 금하였지만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개종을 권하였다. 성경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말하는 교훈이 많이 있다. 끝으로 로잔대회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성명서를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전도의 방법은 다양하지만 오직 하나의 복음만 있음을 확신한다.우리는 자연에서 일반계시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음을 확신한다.그러나 이것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왜냐하면 인간은 그들의 불의로 진리를 억눌렀기 때문이다.또한 그리스도는 동일하게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룰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어떤 종류의 혼합주의와 대화는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모독으로 거부한다.”

B.교회밖의 구원의 문제

우리는 종교다원화에 대한 대답으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은 발트,틸리히,후프트 등 “신만인구원론자”들도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은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점에서 복음주의와 차이가 있음으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느냐를 논해야한다. 종교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다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론을 포용적 기독론으로,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지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복음주의 입장을 배타적 기독론이라고 한다.
복음주의가 종교다원화를 심각하게 논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다원화란 용어 자체는 우리에게 그리 유쾌하게 들려지지는 않으나 종교다원화의 우리 사회에서 갈등과 대립을 피하고 상호 공존해야 하기때문에 용어자체도 무조건 배격할 수 만은 없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종교다원화의 이면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신,불신에 상관없이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적 휴머니즘의 사상이 깔려있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비교종교학은 기독교를 변증하는데 기여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어졌고,100년후에 등장한 종교신학은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종교신학의 창시자 슐레테도 19세기의 종교학은 반기독교적 정신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비교종교학의 책 95%는 자유주의 신학자나 비기독교 학자들에 의한 것이다.
종교다원화의 신학은 노골적으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인도의 천주교 신학자 파니카는 그의 유명한 저서 The Unknown Christ of Hinduism에서 힌두교도 사람을 “우주적 그리스도로 안내하는 구원의 구조”라고 말하는데,많은 개신교의 신학자들도 이러한 구원관을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영국의 신학자 존 힉은 예수로만 구원얻는 다른 기독교적 도그마를 뒤집어 엎는 것을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하면서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한다. 존 힉은 다음고 같이 말한다.
“예를 들어,기독교에서의 이와같은 경배의 절대성과 배타성은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신이며,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하느님의 아들이며,하느님과 같은 유일한 존재이며,하느님과 인간과의 유일한 중매자라는 교리에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인류의 전체적인 종교생활을 잘 알지 못했던 무지한 세대에 태어난 이와 같은 교리는 오늘날 그 모순을 드러내고 말았다. 한편으로,하느님은 모든 인류의 창조주이며 주님으로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모든 인류의 구원과 선을 찾으신다고 가르치고,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대다수의 인류를 제외한 특수한 방법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모순이다. 인류 역사 이래 대다수의 인간은 그리스도 이전에 태어났거나 기독교 국가밖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칼 브라덴 역시 신자등록 카드만으로,믿는 자만이 천국간다는 특수주의 구원론이 옳다면 하늘에는 천사가 하나님을 찬양할 자리가 모자랄 것이라고 전통적 구원관을 배격하고,이것을 복음주의의 특수주의 종말론으로 규정한다. 신약성경에 영원한 형벌로서 위협하는 교훈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안에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 경고한 것이다. 이 점에서 복음주의자들은 보편적 종말론의 냄새를 풍기는 성경은 배제한다고 복음주의 구원관을 신랄하게 공격한다.
구원관에도 이러한 신학적 대립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신학의 전제가 다른 데도 있지만 성경관과 성경의 인용에 기인하다. 종교다원론자들은 성경비평주의에 신학의 기초를 두거니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인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로마서 5장과 사랑의 복음인 요한서신을 주로 인용하는 반면 복음주의는 믿지 않는자에게 영원한 형벌이 있음과 제 2의 기회가 없음을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면 모든 종교는 동일한 한 손에 손가락에 불과하다.그러나 성경은 분명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지만 불신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고 하였다. 그들이 전혀 듣지 못하였을 때는 교회가 책임을 져야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천주교는 제 2바티칸 공회에서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하느님을 진실로 찾고,하느님의 은혜로서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함으로 하나님을 창조주와 심판자로 고백하는 회교도에게 대한 구원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복음주의는 인색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다른 종교의 사람들에게 전도 긴급성만을 강조한다.
내세가 없는 종교는 종교로서의 아이덴티를 스스로 포기하거니와 종교는 불가피하게 사회운동으로 전락하게 된다. 종교적 휴머니즘에서 타종교의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비기독교 종교에서 야기되는 비인간적인 인권유린과 정치,사회,경제에 미치는 역기능을 말하지 않는다. 이에 우리는 종교의 구원관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Ⅳ.구원론적 변증

구원은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관심이다.구원에 대한 개념 이해는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학자에 따라 다양하게 논의되어 왔으므로 그것을 획일적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엄연히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구원관은 구별되며 기독교의 독특성과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규범성이 성립된다.

A.타종교의 구원 개념

(1) 주술- 위해(危害)와 재화를 푸닥거리하여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모르는 일로서 이것이 민간신앙에서의 구원이다. 이들의 구원은 히브리인과 같이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며 죽음 자체를 큰 피해로 본다. 무당 신앙의 세계는 자연 세계 바깥에 있는 힘이나 감응에 둘러 싸인 세계인데 이 힘은 선하게도,악하게도 활동한다. 일상 생활에 있어서 부정과 악,재해와 불행등은 이 힘을 주의없이 취급할 때 따른 것인데 힘이 악하게 활동한 것이 살이기에 이 살의 힘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구원이며 이 구원의 행위가 살풀이다.
(2) 불교- 불교에서는 피안의 인생을 괴로움과 근심 걱정과 부자유하고 타율적인 것으로 본다. 해탈이란 이 그릇된 인생의 인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며 열반은 해탈을 통해서 얻은 안락으로 본다.
불교의 교조 고오타마 붓다는 대장경의 주제를 “바른 길”로 왜쳤는데,“이것은 기도도 아니고 주술도 아니고 초자연적이거나 남의 권유에 의존하는 것도 아닌 것으로서,내 안에 충만한 빛이고 인간이성의 통찰로 번뇌를 제압할 수 있는 길이다.”라고 말하였다.
이같이 불교에서는 인간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보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스스로 수양하면 누구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범신론적이라고 본다.
(3) 카톨릭- 구원은 모든 사람을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오늘날의 카톨릭 신학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구원받기에 충분한 은혜를 확실히 베풀고 계시다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16조에서는
“...사실 자기의 잘못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자는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구원이란 인간의 어떤 실적이나 기획 수행이나 성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현실화하고 현존하는 하나님의 역사화이다. 곧, 영원한 멸망과 진노의 심판에서의 구원으로서 종말론적 구원을 뜻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오는 것(행4:12,요14:6)이라고 볼 때 카톨릭의 구원은 기독론이 약한 잘못된 구원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B.기독교의 구원개념(성서적 입장)

성서적인 구원관은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론적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때문이며(요3:16) 하나님의 뜻(딤전 2:4)이며 하나님의 은총(엡3:16)에 의한 것이다.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에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속하시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시고 인간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총과 공로의 댓가로 구원을 얻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는 어느 한 시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창조 때부터 시작하여 현재에까지 계속되는 것이다.호네(Charles M.Horne)교수는 구원교리는 “성경의 핵심을 이루어 창세기 3장에서 요한계시록 22장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드라마로 나타나고, 인간이 타락하는 즉시 하나님께서 구원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특히 창세기 3:15은 원복음(Protevangelium)으로 불리우는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질 구원의 성취를 예고하고 있다. 신약에도 어디에서나 구약에서 대망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알리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에서 주장하는 구원의 뜻은 고통스럽고 어려운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러한 구원관을 토대로 모든 종교에서 구원이 이루어짐을 긍정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구원은 그렇게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원죄(原罪)로 인해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죄의 굴레(개인적 및 집단적)로부터 해방되는 사면이 있은 후에, 영생을 누리면서 하나님과 접촉되는 삶의 궁극적인 상태를 구원이라고 생각한다면,그러한 구원이 모든 종교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Ⅴ.결 론

이상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북음주의 종교신학을 살펴보았다. 종교다원주의는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이성적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 끝에 그리스도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비성서적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명백히 성경의 진리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오도하는 것이다. 첫째, 모든 종교의 신이 이름만 다를 뿐이지 실제로 동일한 신이라는 주장은 비성서적이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한 성경이 이를 입증한다. 이것만 다르지 실제로 동일하면 왜 신을 섬기지 말라고 경고했겠는가? 둘째, 종교 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계시 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인도주의에 근거했다. 인간의 구원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다원주의는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과 좁은 문을 넓히려는 인간적인 시도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요14:6),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는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고 이를 다른 복음으로 대치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은 물론 구원의 범위는 세계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을 구원하셨고 때로는 이스라엘 밖에도 특별한 계시를 주신 일이 있다. 그러나 반면 진리를 거짓으로,참신을 우상으로 대치하는 이방종교와 그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아나테마”를 발하셨다.복음주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성경의 진리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그러나 우리는 다른 종교는 진리를 억누르고 비진리로 대치한데 대해 유감을 표하지만 그러나 타종교의 사람들은 사랑하고 개인적으로 대화를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J.C.라일이 말한 것 같이 신자라도 성령의 열매를 보이지 못할 때는 역시 “그리스도 밖에 있다”(엡2:12)는 말을 명심하면서 신자는 개인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보이며,아울어 제도권의 교회는 항상 자체의 갱신을 힘쓰며 전도와 봉사가 함께하는 통합적 선교로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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