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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학자료 > 등록일 2012-04-13
작성자 관리자 (admin)
기독교 신학과 역사의 연구
-기독교의 이념화 과정과 복음적 대응-
들어가는 글

분열과 다원화의 지구촌시대에 구속과 완성의 성경의 메세지는 실제적인가? 문명 충돌의 파편과 경제위기란 이름의 기존체제의 균열음이 세계를 뒤덮는 이 때에 세상을 하나되게 하고 충만케 하는 그리스도교회의 사명과 그 역할은 어떻게 성취되어야 하는가? (참조 에베소서 1:10, 21) 오늘의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타락의 결과물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역사의 현장이다. 교회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도구이다. 교회로서 우리는 주어진 사명을 이루도록 세상을 섬겨가는 중심에 서서 자신을 추스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제 본고를 통해 지금까지 그려진 교회의 자화상을 성찰하고, 세상의 신음에 귀 기울이며, 주님의 도구로 세상 앞에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 보고자 한다. 본고는 앞으로 저자의 연구주제 설정이며, 인생 후반 선교사역의 핵심과제인 세계기독교포럼을 위한 연구과제 전체의 밑그림으로 개략의 윤곽을 담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차후 이에 따른 각론의 전개를 기대한다.

1. 삼위일체의 신학 : 정통과 그 한계
개신교, 로마 카톨릭, 정교회를 막론하고 기독교 정통주의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의 중심에는 삼위일체의 신론이 자리잡고 있다. 때때로 삼위의 한 위가 강조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이는 모든 정통주의 기독교회의 공통분모인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신론 중심의 교회의 경향은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창조, 구속 역사의 보내시고 나아가는 원심적인 활동과 역행하는 구심력으로 작용하는 원인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의 세상과 격리되어 게토화 되어가는 교회와 또한 세상의 동력에 이끌려 가는 신자들의 모습 속에서 개념화 되어진 신앙의 무력함을 보게 된다. 심지어 무력해진 교회 앞에 세상의 동력은 그 자체가 신격화된 우상으로 다가와 교회로 굴종케 하고 세속화의 길을 걷게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의 외침으로 시작된 생철학과 역사주의, 실존주의, 다원주의의 등장과 폐해는 먼저 우리의 자화상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계기가 아닌가?
이제 각 교파별로 오늘의 교회의 자화상을 살펴 자신을 진단하므로 세상을 다스리고 구원하는 살아있는 능력의 그리스도의 몸으로 치유되고 회복되는 첫걸음을 옮겨보도록 하자.

1) 동방 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
동방교회는 오늘날에 와서는 서구신학 중심의 기독교회로부터 거의 단절되고 잊혀져 연구되지도 않고, 심지어 일부 인사들에 의해서 이단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오는 기독교회사에 지리적으로나 교부시대로부터의 전승과 전통에 있어서 적통의 위치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 신학을 정초했던 대부분의 초대 교부들이 동방교회에 속했으며, 니케아회의를 출발점으로 하여 기독교 신학의 틀을 놓았던 교부회의들이 그곳에서 열렸다. 또 그 전승이 동로마제국의 천년 통치로 이어지면서 그 연결성을 보게 된다. 물론 황제 통치의 폐해, 이슬람의 침입, 공산주의로 인한 교회의 몰락의 또 한 천년의 비운의 역사를 지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시련이 오히려 교회의 순전함을 보존하는 특별처방이 되지는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종교개혁의 선두주자였던 루터교회의 로마교회로의 회귀의 현실을 보면서 동방교회와의 교제를 염원했던 칼빈의 소망을 떠올려 본다.
신약의 모든 저자들의 출신과 배경이 동방에 기초했고, 그 서술의 언어도 동방의 그리이스어였다. 히브리 신앙의 그리이스 사상과 언어로의 표현, 그리이스 문화와의 연관에서의 전개가 기독교신학의 모체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이스 철학에 기초한 형이상학의 존재론적 추구가 삼위일체론으로 나타나고 이것이 기독교신학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기독교회를 둘러싼 그리이스 문화에 기초한 로마제국의 배경에서 이는 적절한 기독교회의 변증적 대응이었음을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텍스트가 아닌 컨텍스트(상황)를 중심에 놓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류역사 상 유일이라고 할 수 있는 장기간의 견고한 로마제국의 통치도 결국은 풀의 꽃 같이 스러지고 또다른 세상의 현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회 태동기에 동방교회를 통해 교회의 초석을 놓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 의미를 당시 세계의 중심세력이었던 로마제국을 통한 인류역사를 관통하는 세계선교와, 물질 중심의 물신적 세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중심을 두는 기독교의 영적 가치 구현에서 찾을 수 있겠다. 모든 시대 상황은 변할지라도 인류역사의 저변을 흐르는 영원을 향한 인간 정신의 추구는 기독교의 신적 진리 안에서 구원의 빛을 발견하고, 완성의 소망을 품는 동방교회의 영적 추구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존재론적이 아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셨지 결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아니셨다. 모세의 하나님의 이름 곧 신의 존재를 묻는 질문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즉 '나는 나'라고 답하심으로 더 이상의 논의를 거절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의 중심에 인간 사고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신의 존재 논의를 세워 놓는 커다란 오류를 동방교회로부터 물려 받았다. 따라서 하나님은 더 이상 살아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으로가 아니라 인간 사고에 의해 빚어지고 제한받는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되었고, 급기야 6세기의 다메섹의 요한에 이르러는 결국 인간의 손에 의해 그려지는 성화(이꼰)의 주인공이 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이는 오늘날에 이르러 현실의 삶과는 상관 없는 형식화된 신앙과, 세상과 교회가 단절된 극단의 이원론적 세계관의 흐름 위의 사두개파적인 세상과의 야합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이는 이신론, 자유주의, 이에 반기를 든 실존주의, 신정통주의, 사신신학, 다원주의 등의 인간 이성과 감성의 자아 중심의 현란한 신학사조의 배경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 로마 카톨릭의 정통주의 신학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로의 개종과 동로마의 중심이었던 콘스탄티노플로의 천도는 기독교의 주류를 동방으로 확정짓는 결정적인 계기로 보여지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당시 제국의 변방으로 전락했던 로마와 서방의 교회를 더 왕성케 하는 결과를 보여 주었다. 이는 결코 주님의 교회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주님의 몸이며 주님의 소유인 것을 역사로서 보여주는 증거라 할 것이다. 서방에 남겨져 황제의 통치로부터 멀어지고 야만족의 침입에 신음했던 로마와 서방의 교회는 로마법으로 알려진 세상의 현실에 기민하게 응답하는 로마의 정신적 전통에 따라 실제적인 대응을 보여주었고, 교회가 실제적인 민중의 지주가 되어 심지어 정치적 권세를 손에 넣었던 이방 주권자들을 능가하는 세력이 되었다.
로마교회의 관심은 어떻게 민중의 현실적 필요에 응답하는가에 있었고, 이는 스콜라주의에 이르러 자연과 은총의 융합에 그 신학적 핵심을 놓게되는 결과를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집대성된 카톨릭 스콜라주의는 그 신학작업의 도구로 다시 그리이스 철학에 의존하므로 존재론적인 신에 대한 추구를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비록 카톨릭의 관심이 형이상학적인 신 존재 자체에 머무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신학 작업의 출발점부터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한 인간 자아에 매여 있고 민중의 필요에 먼저 그 관심을 집중하므로 결국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구원의 참된 기독교 진리의 중심에서 벗어져 나간 기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하겠다. 이는 천부적이고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실재론적 로마의 경향에 따라 초월을 인정하나, 삼위일체의 이해에 있어서도 인간 자아 중심의 추구를 근거로 하며 종교적, 철학적, 정치적, 사회적, 학문적인 다른 모든 사안에 대하여 인간 중심적 절충주의의 행태를 보여주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신론에 있어서도 성령의 성부로부터만이 아닌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발생을 시작으로(이의 성경적 진위 논의는 별개로 함), 삼위의 위치에 성모 숭배를 연결하고, 심지어 교황을 신격화하는 모습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와같은 로마 카톨릭의 경향은 일상을 초월화시키는 구조를 갖고 있다. 현실의 필요에 대응하되 이를 초월과 연관지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초월이 현실을 회복케하고 인도하는 정반대의 방향에 놓여 있다. 초월과 현실의 절충이나, 초월이 현실에 의해 질식하거나, 초월이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닌 초월의 하나님이 구체적인 오늘의 삶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는 분명히 초월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창조물인 자연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아예 그 순서부터 자연을 은총 앞에 두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의 이러한 신학적 경향은 많은 민중을 수용할 수 있는 접촉점을 제공하였으나 인류역사의 영적 동력을 제공하는 면에서는 약점을 보인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 중 다수파였으며 민중에게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바리새주의의 일상으로의 율법주의적 접근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결국은 영적 질식의 상황에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구원으로 여기고 이를 추구하다 파괴되어진 예루살렘의 최후였다. 그러면 이들에게서 우리는 어떻게 변화의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철저한 바리새인이었다 극적으로 변화된 사도 바울의 삶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살아계신 절대자, 부활의 주님을 몸소 체험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진정한 초월로의 동참이 그 해결책이다.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역사의 현장으로 다가가는 참된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습 속에서 새롭게 되어질 세상의 소망을 바라본다.

3) 개신교 정통주의의 신론과 그 한계
중세 로마 카톨릭의 초월(은혜)과 일상(자연)의 절충과 혼합의 영적 암흑으로부터의 여명은 십자군 이후 진리를 향한 영적 추구의 동방의 새로운 발견으로부터 동터왔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를 거쳐 성경으로의 회복을 통해 종교개혁의 불길은 타올랐다. 칼빈에 이르러 그 신학적 집대성에 이르게 된 종교개혁운동은 다름 아닌 사도신경을 근간으로 한 삼위일체론의 회복이 그 중심에 있었다. 칼빈은 자신의 신학사상을 기독교강요의 저술을 통하여 구체화하고 확장시킨 바 그 기본틀은 자신이 분명히 밝힌대로 사도신경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의 기독교강요는 당시의 문제와 과제를 사도신경의 틀에서 조명하고 해설한 사도신경의 적용이요, 확장된 해석이라 할 것이다. 제1권 신론(제 13장 삼위일체론), 제2권 기독론, 제3권 구원사적 성령론, 제4권 교회론은 삼위일체를 축으로 한 사도신경의 확장이다. 칼빈의 신학적 작업은 초대교회의 신학적 틀을 제공한 동방교회가 중심이 된 삼위일체론의 회복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 인간 이성이 중심이 된 그리이스 철학의 뿌리와 이의 인문주의적 적용을 동시에 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제3권 성령론의 전개를 보면 개인 구원의 관점에서 구원의 서정을 중심으로 삼위일체의 신학적 적용이 세세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와같이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교감은 신학에 있어서도 인간 자아에 대해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의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발현과 서구 개인주의의 토대가 되어진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이는 풀뿌리 민주주의, 개인 직업의 소명을 토대로 한 시장 자본주의로 전개되어 현대사회의 틀을 만드는 기초가 되었으나 인간 소외, 물신주의의 번창, 인류 공동체 파괴의 역효과를 초래하는 뿌리로도 작용하였다.
물론 신자 개인의 강조와 자유스런 성경 해석을 토대로 한 개신교의 전개는 종교개혁 초기부터 다양한 신학적 경향과 전개를 보여주었다. 루터의 기독론, 구원론을 중심으로 한 신학 전개, 개인의 의식을 신앙의 중심에 두려한 재세례파 운동, 칼빈 이후 삼위일체론 중심의 신학적 스콜라주의에 반기를 든 신자 개인 중심의 경건주의, 인간의 감정을 기독교 신앙의 모태로 하려는 흐름, 인간의 실존을 토대로 신앙을 규명하려 한 신정통주의, 회심과 부흥운동에 이어진 성령의 은사와 성령 세례를 강조한 오순절운동, 모라비안, 구세군, 여러 형태의 파라처치로 활동하는 선교회 운동의 실천의 강조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흐름은 삼위일체 신학의 큰 틀에서의 신자 개인의 영적 추구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데로 개신교 신학의 중심에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추구와 인간 개인의 자아가 위치한다. 따라서 살아계신 인격으로의 하나님과 그 분의 세상을 향한 통치, 그분의 몸으로 세상을 섬기고 다스리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신자의 삶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개신교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으로 오늘날의 세계의 결핍과 갈등,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다고 할것이다. 실로 오늘의 세계 문제는 현대사회 시스템을 제공한 기독교회, 특별히 서구와 현대 세계문명의 중심축이 되고 있는 개신교의 한계와 문제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오늘 우리가 접하는 세계의 신음을 해결하는 그 걸음은 이와 같은 교회의 자화상을 들여다 보므로 조절하고, 수술하며, 보완해 가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2. 인류역사의 현장 : 교회와 문화의 과제
인류역사의 실체는 무엇이며, 교회는 이 역사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오늘의 교회의 한계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역사의 새 지평을 열어갈 수 있는가? 인간의 타락 이후 해 아래 벌어지고 있는 역사의 현장은 그 어디에 사탄의 갈고리를 숨기고 있는 것인가? 이 세상 곧 사단의 권세 아래 속한 문화의 뿌리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그 첫 걸음을 내어디딜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첫번째 과제는 우리의 대적 사단의 정체를 인류역사의 현장 우리가 몸 담고 숨 쉬고 있는 문화 가운데서 발견해 내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탐구의 작업을 우리의 눈 앞에 현기증을 일으키며 펼쳐지는 역사의 현상에 대한 논의를 뒤로하고 그 근본을 파헤치는 원리적인 작업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결국은 그 전제가 결론을 이끌기 마련이며, 모든 현상의 뿌리에는 인격체로서의 생명이 놓여 있기에 이미 그 생명력을 잃은 역사와 문화의 결과물을 가지고 논의를 제기하는 것은 우리의 최우선의 관심사는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인류의 터전인 역사 현장과 문화 가운데서의 살아계신 참된 인격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 자아이다. 펼쳐진 역사의 지평 가운데 오늘 우리 교회의 자화상을 걸어두면 정말로 무엇이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인지를 보고 오늘 우리의 삶과 역사 가운데 살아계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기독교의 궁극적 부흥의 새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1) 인류역사의 알파 포인트로서의 창조와 타락 가운데의 인격의 문제 :
'우리-나'의 역전(참조 창세기 1-3장)
기독교의 역사 이해에 있어서 그 중심에는 인격이 놓여 있다. 창조주이신 인격으로의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고,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격인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릴 역사의 주인공으로의 사명과 위치가 주어졌다. 따라서 이 두 인격을 살펴보면 인류역사의 뿌리와 전개 및 그 결국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태초부터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우리'로 계심을 성경은 그 첫 장에서부터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에 대해 반복하여 '우리'를 언급하고 계시다.(창1:26) 특별히 하나님의 자신의 형상에 대한 언급은 사람의 창조와 연관하여 사람의 근본이 어떠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임에 의미심장하다.(창1:27) 사람은 그 창조부터 '우리'의 공동체적 일치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은 그 근원으로부터 '우리'로 계신 하나님께 속해 있고, 또 그분과의 관계에서 역사의 현장 가운데서의 삶이 빚어진다. 또 하나님은 아담의 독처를 좋아히지 않으시고 한 몸으로서의 배필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이 '우리'로 함께 있게 하셨다.(창2:18-24) 인간은 그 출발부터 '우리'로 있도록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만 참된 인격의 온전함을 누리도록 지어졌다.
그러나 죄와 타락은 이러한 인간 본래의 형상과 인격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깨뜨려 놓았다. 심지어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했을 때까지도 유지되었던 인간의 공동체적 '우리'의 모습은(창3:1,3,4,5-'너희') 하와가 유혹되어 선악과를 바라본 순간부터 '자아' 우상의 사탄의 갈고리에 낚여 '우리'의 하나님의 형상은 휘어채이고, 결국 범죄 후에는 더 이상의 '우리'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나', '인간 자아'의 깨어진 세상이 되고 말았다.(창3:9-19) 인간 원죄와 타락 이후로 인간의 삶과 인류역사의 뿌리에는 바로 이 자아 우상의 죄의 뿌리, 사탄의 갈고리가 놓여 있고 어느 누구도 심지어 어떤 교회도 이 사탄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인류역사의 현실이며, 오늘날 기독교회의 한계요, 참된 개혁과 변화, 부흥의 실마리이다.
실로 우리는 고대 기독교 정통주의의 형성의 뿌리에 놓여진 인간자아 중심의 신앙 이해와 동시에 진행되어진 교회의 화석화의 끈질긴 죄의 세력을 보게 된다. 이의 반동으로 유일신론의 다른 형태로 나타난 이슬람은 유대주의의 복고를 기본으로 인간 사유의 가능성으로 말미암은 자아 우상을 원천적으로 배척하려 했으나 인간 행동에 의지하는 우상적 신관으로의 또다른 걸림돌에 넘어지고 말았다.
현대 인류문명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서구문명은 데카르트를 태두로 하는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한 자아 이해로부터 시작하여, 슐라이에르마허의 감정 중심 인간 이해, 칸트에 와서는 실천 이성으로의 인간의 윤리적 의지를 그 마지막 토대로 삼으려는 안간힘을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 실존주의를 지나면서 인간 자아에 있어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것도 찾을 수 없는 절망의 선을 넘고 말았다. 그리하여 결국은 어느 것도 절대적 진리일 수 없는 다원주의의 정신적 무정부 상태가 오늘의 세대이다. 프란시스 쉐퍼의 살아계시며 인격적인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의 절대 진리를 향한 추구도 이후 최근의 복음주의 운동의 흐름을 보면 정치화 되어진 일방주의적인 행태로 말미암아 오히려 세계 문명의 갈등과 파괴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정통의 부흥을 추구하는 최근의 복음주의, 개혁주의 운동의 뿌리에는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 대로 오도된 주체로서의 인간 자아에 대한 몰지각이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한마디로 대상에 대하여 열려진 인간의 시야는 주체인 '자아' 우상에 대하여는 절대 감지할 수 없는 영적 소경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것이다. 실로 인류역사의 문제는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요, 인간 자신이 문제임을 자각하고 이에 대응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 없는 '우리'로서의 인류 공동체 추구는 이미 지난 세기의 공산주의의 실험과 그 비극적 결말을 통해서 해결책이 되지 못함을 분명히 확인한 바 있다. 그러면 서구 사상의 몰락 이후에 대두되고 있는 동양사상의 재발견과 부흥의 오늘의 흐름이 인류역사의 회복을 가져올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동양의 역사를 통하여 참된 하나님 없는 인류의 영적 추구의 그 결국이 어떠함을 익히 알고 있다. 동양 사상의 한 축을 형성하는 인도사상의 흐름에 있어서 그 추구의 주류(힌두교)는 물신주의의 다신론 우상 숭배의 비인간화로 귀착되고, 그 반대로의 흐름(불교)은 어느 것에도 실재의 의미를 두기를 거부하는 극단적 허무주의임을 보아 왔다. 물론 인도사상만이 아닌 그와 흐름을 같이 하는 여러 종교들(예: 샤머니즘, 중국의 도교, 일본의 신도 등)이 동양의 영계를 뒤덮고 있다. 또한 인본주의적인 동양의 사상은 유교로 대표되는 공동체적 인간자아 실현에 그 중심이 놓여 있는데 그 결국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에 이르러 그 극대성에 이르렀다. 이는 퇴계 이 황으로 대표되는 주리론과 율곡 이 이로 대표되는 주기론으로 나뉘어지고, 여기에 그 논쟁의 한계 상황에서 다산 정 약용의 실학파에 이르러는 실용에 중심을 놓는 서양의 이성, 감정, 의지의 인간자아 추구의 동일한 행보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대로 동양의 인본주의적 추구는 서양보다 먼저 그 한계에 달했고, 그 문명은 퇴락의 길을 걸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역사는 그 결국이 인도의 미신화, 중국의 무력증, 한국의 분열, 일본의 파괴주의로 마무리되었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의 복고의 추구도 허황된 것임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실로 인류는 하나님과 그의 계시 외에는 그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없는 인간자아 우상의 갖혀진 어둠 가운데 있다. 동, 서양의 모든 역사와 문명의 흐름은 실로 해 아래 새 것이 없는 사탄의 죄의 권세 아래 파괴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자아 우상을 안고 신음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인류역사의 문제가 '우리'의 파괴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자아'임을 명백히 확인하고, 그 해결로 자아의 탐구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따라 하나님 자신의 역사로 하나님 형상으로 인류가 회복되는 '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임를 믿음으로 누려야 한다.

2) 인류역사의 하나님의 대응으로의 교회와 그 한계에의 도전 :
'나'(자아)로부터의 구원(참조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인류를 창조하시고 그 역사와 문화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탄의 자신의 형상대로의 창조물인 인간의 삶과 역사에의 침입을 방관치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간으로 오셔서 인류역사에 개입하셨고, 인간 스스로 끊을 수 없는 사탄의 죄의 사슬의 고리를 끊으셨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의 새 길을 여신 하나님의 역사를 향하여 우리의 눈과 귀를 열자. 죄된 인간자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고(참조 고후 5:21), 이제는 자신(인간자아)을 버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심으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참조 갈 2:20)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되신 하나님께서 사심으로 인간과 인류역사는 더 이상 '자아우상'의 포로된 노예상태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다. 이제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며 승천하셔서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는 우리로 그 분 안에 하나되게 하시며, 또한 세상으로 하나되게 하는 일을 '우리' 곧 자신의 택한 백성인 교회를 통하여 하시고 계신다. 우리는 그저 포도나무되신 그분과 연결되어 있음으로 잃어버린 영혼과 세상을 회복케 하고 열매맺게 하는 포도 나무의 가지요, 그분의 몸이 되어진 것이다.
우리는 최근 한계에 부딪쳐 파산하는 동, 서양 문명의 막장에서 인간 영성 회복의 몸부림을 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번의 자아우상의 다른 모습으로의 발호일 수 있음을 동양의 복고와 기독교 정통주의의 한계를 통해 살펴 보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새롭게 빚어지는 교회와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지금까지 인류를 죄의 어둠 가운데서 구원의 빛으로 이끌어온 참된 동력인 하나님의 통치와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는 무엇을 근간으로 하는 것인가? 이는 어떻게 교회와 인류의 역사에 변화의 요인으로 적용되어지는 것인가?
초대 기독교회의 생명력에는 율법주의적 자아의 실현과 유대의 자기 민족주의를 넘어선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모든 민족을 포괄하는 선교적 이상의 포용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결코 자아중심적 추구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그 반대 방향에 놓여있음이 자명하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또 십자가로 죄악된 인간자아를 못박으신 그분의 복음 안에서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본연의 모습을 찾게 된다. 또한 이 복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전 인류를 한 공동체로 포괄한다. 그렇다면 기독교회는 어느 순간에 이 하나님 은혜 중심의 복음의 핵심을 놓치고 인간자아 중심으로 회귀하고 말았는가? 갈라디아교회들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복음에서 율법으로의 회귀에는 무슨 문제가 그 근본에 놓여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이 경로를 되돌려 참된 기독교의 부흥과 인류 회복의 하나님 나라 구현의 역사를 이룰 수 있을까? 교회의 세속화와 세상으로의 회귀가 아닌 세상을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로 이끄는 교회의 사명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 것인가?
초대교회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던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 위치한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와 동일한 문제인 교회 안에서의 율법주의와의 갈등과 분열의 문제를 대하는 사도 바울에게서 우리는 그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교회와 세상의 '자아 우상' 문제의 해결책은 바로 '하나님 앞에 서는 믿음'에 있다. 죄의 늪에 빠진 인간 자아는 그 어떠한 발버둥에도 그 늪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음이 자명하지 않은가? 오히려 인간의 발버둥은 더 이상 그를 구원할 수 없는 함몰과 죽음으로 몰아갈 뿐이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은 그리스도와 그 구원을 갈망하고 이를 믿음으로 수용하므로 그분의 은혜로의 믿음의 새 삶을 누리게 된다.
필자가 현재 거처하는 시베리아를 거쳐간 러시아의 대문호들인 도스토예프스키, 솔제니친 등의 인류를 향한 '부활'의 구원의 메시지는 어디에서 울려져 나온 것인가? 펼쳐진 끝없는 하늘과 땅, 광활함과 혹한의 대지에서(본 글을 작성하는 오늘의 최저기온은 섭씨 영하 34도였음) 그들은 철저하게 인간의 한계와 부딪치고 절대자 앞에 무릎을 꿇으므로 인간의 한계 너머의 영원의 하나님을 만남으로 그 안에 새롭게 되어져야 할 인류의 길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이제 더이상 인종, 계급, 성별이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는 한 몸, 한 공동체가 되었다.(참조 갈 3:26-28)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참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었으며,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로 옷 입음으로(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인도에 동행하고 순종하므로) 하나되는 인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결국 교회와 인류의 오늘의 문제 해결의 핵심에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과 그 믿음으로의 삶이 놓여 있다.
여기에 초대교회의 생명력이 있었고, 종교 개혁으로의 인류의 새로운 도약이 있었다. 이것이 천부인권과 신앙의 자유를 갈구했던 퓨리턴의 신대륙 개척의 동력이었고, 피부색을 초월하는 평등과 자유의 링컨과 마르틴 루터 킹의 새로운 인류에의 소망의 메세지가 있었다. 또한 여기에 오늘 한국을 비롯한 중국,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제3세계 기독교회의 생명력과 부흥의 동력이 있다. 기독교회는 결코 장소나 인종에 매인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며, 인간자아가 이루어 놓은 전통과 교리가 그 핵심에 놓여 있지 않다. 기독교의 중심은 결코 서구문화나 그 교회의 조직이 아니며, 그들이 이루어 놓은 국가와 사회의 체제가 아니다. 참된 기독교와 그 교회는 가난한 심령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믿음과 그리스도로 옷입은 그들의 삶 가운데 있다.

3.기독교 구원의 복음 : 神國의 顯現(주기도문의 신학-'우리’의 회복)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새로운 삶을 살 것인가? 사도신경과 신조를 넘어 하나님의 주권의 공동체 가운데서의 기독교회와 인류의 새로운 전개의 소망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외치셨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며 완성되어져 갈 것인가? 오늘 인류 역사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어떻게 정결하며, 성숙한 모습으로 세워지며 머리되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것인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는 이미 그의 몸인 교회로서의 우리의 새 삶에 대한 설계도를 마련하셨고, 그 삶의 주권자 되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드리셨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인 교회의 세상에서의 하나됨과 그들의 선교적 사명을 위한 간구(참조 요한복음 17:11-23)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의 삶과 이를 위한 간구(주기도문 마6:9-13)의 기도 가운데 우리는 너무도 분명하게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위해 마련하신 로드 맵을 보게 된다. 주님께서는 간절하게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도록'(요 17:11, 21, 22) 반복해서 기도하셨고, 이를 통해 그들이 세상을 믿음으로 인도할 것을 바라보셨다.(요 17:18, 20, 21, 23)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인 교회의 하나됨과 연합을 통해 능히 세상을 이끌어갈 인류역사의 주인공으로의 동력을 기대하셨다. 교회는 결코 그 지경을 자신의 울타리로 제한할 수 없다. 그 머리이신 주님은 온 세상의 주요, 오직 한분이신 통치자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가운데 오직 '우리'로서 하나님 앞과 그의 나라에 드려지는 새로운 삶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주기도문 가운데 더이상 '나', '인간 자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 나라에 삶으로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인간이 '자아 우상'의 위치에서 내려 앉고 하나님께서 온전히 주권자의 위치에 계시는 것을 우리 주님의 삶과 죽음에서 보았고,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그 생명의 흐름을 보아 왔다. 사도 바울로부터 시작하여 어거스틴, 칼빈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분명하게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 가운데서 새로워지는 인류의 조망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들을 통해 우리는 역사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건으로 보게 되었고, 오늘의 세계는 그 사건들의 흐름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선교는 로마제국과 이방선교로 오늘의 세계 선교와 기독교의 위상을 이루는 동력이 되었다. 어거스틴의 '신국(神國)'의 이상은 로마 천년의 역사와 중세를 넘어 종교개혁의 새로운 기독교 부흥의 기틀과 하나되는 교회의 소망을 보여 준다.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신정을 제네바에서 시현하므로 오늘 세계 민주시민사회의 정치와 경제의 틀을 놓은 주인공이 되었다.
이후 우리는 청교도의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사회 건설과 세계로의 영향력을 보게 되었고, 화란의 신칼빈주의의 시민사회 개혁운동을 통해 다시 한번 그 생명력을 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번번히 그 생명의 기운이 막히는 것을 우리는 또한 보고 있다. 화란의 카이퍼와 바빙크를 이어 도예베르트에 이르러 구체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난 '영역 주권'으로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구조의 이해는 하나님 나라 계시의 인류의 확대된 시야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자아 우상'의 개인주의의 망령이 그림자와 같이 이를 따라붙어 그 생명력을 고갈시키고 질식하게 하는 것을 서구 유럽교회의 화석화와 오늘의 '세계경제위기' 가운데서 다시 한번 보게 된다. 따라서 오늘의 위기와 그 문제 해결의 핵심에는 주체로서 자리 잡은 '인간자아'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함을 절규한다. 인간소외와 깨어진 사회에 대한 공산주의의 몸부림과 '나와 너', '너와 나'를 외친 마틴 부버의 안간힘도 결코 인류의 오도된 역사를 되돌리진 못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UN의 설립과 반세기가 넘는 활동에 이어, 오늘 세계 열방의 수천명의 지도자들이 스위스의 작은 산골 마을 다보스에 모여 세계의 문제를 놓고 만나 토의하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었고(이 글의 작성 시점에 2009년 다보스포럼의 하이라이트인 셋째 날 세계경제위기 진단과 처방의 토론이 진행 됨), 선진국 7개국 정상들의 모임이 8개국으로 확대되고, 세계경제위기 이후에는 20개국으로 또 그 범위가 확대되어 빈번히 만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인류는 결코 반목하고 나뉘어서는 생존할 수 없음을 양육강식의 죄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 역사의 현장에서도 보게 된다. 인류는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역사를 결코 거역할 수 없다.

그러면 오늘의 교회는 신음하는 세상과 인류를 위해 어떠한 모습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주체로서의 하나님과 그분의 주권 가운데의 도구로 '우리'로서의 교회가 역사의 중심 그 동력으로 드러나도록 할 것인가? 이는 분명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그 가운데 '우리'로의 삶의 문제임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주권 아래의 인류공동체의 이상과 이의 실천의 삶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사명의 중심에 놓여 있다. 기독교회는 더이상의 자아우상의 망령에 사로 잡혀 분열을 고착화 시키는 자리에 머물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됨의 섬김의 삶을 교회 내에서 먼저 실천해야 한다. 세상을 통일하고 충만케 하는 사명과 책임, 그 권세는 세상의 지도자들이 아닌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주님의 몸된 교회에 있다. 따라서 교회는 믿음과 순종 가운데 진리의 교사이신 성령의 교회의 하나되게 하심을 따르며, 하나님이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세계 인류의 고통의 현장과 그 영, 육의 필요에 총체적으로 그 몸을 드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산제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불은 불탐으로 존재하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자신을 못박고 세상을 위해 자신을 산제사로 드림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적 논의의 중심을 우리를 주체로 하는 이해와 관계로부터, 믿음과 그 믿음을 따르는 삶으로 옮겨야 한다. 주체로서의 하나님과 그분의 주권에 대한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의 이해의 토대 아래, '나'(자아)로부터 '우리'(공동체)로의 객체인 삶의 내용의 전환과 헌신의 삶이 오늘의 위기의 현실에 귀가 따갑도록 들리는 '패러다임 쉬프트' 그 내용의 전체이리라. 자, 이제 이를 위해 그 첫 발걸음을 함께 옮겨 가자! 함께 모여 하나됨을 확인하고, 주님의 계시의 세상 역사를 꿰뚫는 영적 지혜로 오늘의 역사를 감당하고 이끄는 동력이 되자!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니엘과 바울을 통해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인 것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 가운데 새롭게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빚으시므로 세상을 하나되게 하시며, 충만으로 새롭게 하실 것을 믿는다.

나가는 글
우리는 지금까지 정통기독교회의 한계 및 그 문제의 근원과 우리 귀에 울리는 세상 고통의 절규를 들어 보았다. 또 주님께서 마련하신 인류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설계를 들여다 보았다. 주님의 교회를 통한 세상 통치의 핵심은 '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우리'의 새 삶임을 기억하자. 이제 주님의 인도하심에 믿음으로 순종하므로 주님의 역사를 세상에 이루어 드리는 도구들이 되자. 이제 우리 하나되어 구원의 길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걸음을 옮김으로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참된 교회의 사명을 이루어가자.

출처 : 우동수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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