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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소식 > 선교하는 사람들 등록일 2012-02-01
작성자 관리자 (admin)
21세기 세계선교 패러다임
우동수 선교사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한복음 7:17)

... 필자는 선교 초기 사할린에서 1년여의 길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곳에서 선교준비의 11년 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선교의 원리들을 현장에서 점검해 볼 수 있었다. 성경 연구와 기도, 묵상을 통하여 마음에 그려진 선교의 이상이 살아있는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무엇보다 기독교의 진리, 신앙은 삶의 현장을 통하여 그 실재를 갖게 됨을 실감한다. 이상과 현실, 원리와 현장의 조우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 현장에서의 실천과 체험을 통해 만들어진 원칙들은 ‘총체적 성육신선교’, ‘다문화적 다민족선교’, ‘공동체적 자립 선교’였다. 이제 이것들을 통해 이 시대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고 세워가야할 선교의 패러다임을 살펴 보자!

1. 총체적 성육신선교

기독교 선교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찾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그들의 모습으로 되어짐’이다(고전 9:22). 바로 낮아지고 겸손으로 섬김에 선교의 핵심이 있다. 개신교 선교가 본격적으로 서구교회에 의해 진행된 후 받게 된 가장 혹독한 평가와 실패는 바로 이 원칙을 거스른 것이었다. 바로 자민족, 자국가의 문화의 이식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문화 식민지주의였다. 그 결과 서구선교는 막을 내리고, 서구교회는 쇠퇴의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본질을 거스르고 거기에 기독교를 세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지금 ‘한국형 선교’의 논란이 한국 선교계에 일어나고 있다. 한류의 흐름을 타고 문화의 우위와 시장 독점력을 바로 선교와 연관지으려는 공개적인 작업도 있다. 90년대 들어 소련이 개방되고 북방을 중심으로 한국교회가 세계선교계에 선봉으로 등장함과 동시에 보여진 현상의 하나가 이러한 흐름이었다. 공산주의의 실패로 피폐해진 삶의 현장에서 경제 전도사들처럼 자본주의의 우위를 선전하는 것이 의례 선교사들의 설교와 전도의 강조점이 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심지어 한국교회의 이름을 그대로 선교지 교회의 이름으로 복사하여 쓰는 것이 다반사였다. 심지어 선교사들은 한국 후원교회용의 한국식 이름과 현지에서 부르는 교회의 이름을 두개로 짓는 묘수를 선보이기도 했다. 한국의 고질병 개교회주의와 함께 한국문화를 무작정 이식하는 방식이었다. 이름을 짓는 것, 명칭과 언어는 문화의 핵심과 심볼이 아닌가! 만물을 다스리는 아담의 행위는 그들의 이름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돈을 쥐고 있는 한국교회의 주문은 선교지에 별 어려움 없이 실현되곤 했다.

사할린에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처음 조직된 순간부터 교회의 명칭이 문제가 되어졌다. 이 문제로 소련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한국교회의 소련 선교가 사분오열된 가슴 아픈 얘기를 했다. 그러나 현장에 우후죽순처럼 교회가 들어서 이들을 정식으로 등록하고 명명해야할 시점에서 이는 일대 논쟁거리가 되었다. 아마 한국에서 후원하고 연관된 교회의 이름을 현지교회의 이름으로 삼으려는 주문에서 자유로운 선교사와 현지교회는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그러한 예나 가르침을 찾을 수 없다. 또 조금만 생각한다면 이는 서구교회의 실패를 가장 극단적으로 반복하는 하나의 예임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개교회주의에 눈 먼 한국교회는 이러한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실상이었다. 필자에게도 동일한 선택의 순간이 닥쳤다. 생각지 않게 1년이 되지 않는 기간에 10개의 현지교회를 등록하고 공식적으로 명명해야 했을 때 이는 실로 현지 선교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차대한 일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물론 당시 주로 후원하고 연관된 교회의 이름을 이식하라는 노골적인 주문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말은 하지 않았을지라도 선교사의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와 순종을 시험하는 시금석으로 차후 선교 후원과 관계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의 순간에 어렵지 않게 결단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하다. 물론 이는 즉시 어렵지 않게 후원과 관계가 틀어지는 일이 되었지만… 성경에서 선교의 원리를 찾아 온 나로서는 성경의 가르침과 예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찾게 된 이와 연관된 가장 일반적인 원리는 교회가 위치한 지역의 지명을 따르는 방식이었다. 이는 물론 성경에서 지역교회를 부를 때 쓰는 거의 유일한 방식일 뿐 아니라 모든 나라들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사할린에서 설립된 10개의 교회는 교회가 위치한 지역의 명칭, 그 도시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원리를 따라 선교의 첫단추를 꿰는 작업은 이렇게 되어졌다.

물론 현지인을 세우고 섬기는 선교는 이름과 명칭의 문제만이 아님이 분명하다. 현지의 언어가 주 사역언어가 되어야 하고, 현지의 사회와 공감하며, 현지인들이 리더로 세워지는 작업이 실제 그 내용일 것이다. 사할린에서의 사역 기간은 짧았고 또 사역이나 모든 면에 서툴기는 했지만 이러한 섬김의 내용이 실제 선교가 되도록 하는데 심혈을 기울일 수 있었다. 또 뿌린대로 거두는 원리대로 현지인과 현지교회가 세워진 것이 감사하다. 가족과 함께 현지에 도착해서 약 3개월의 현지 언어 적응을 거치고는 바로 현지 러시아어로 설교하는 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사할린에서는 거의 모든 동포 2세들이 완벽하게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구사하고, 그들이 당시 장년층으로 교회의 핵심 일꾼들이었다. 이미 준비된 통역자들이 교회에 즐비한 셈이었다. 그러니 선교사들이 수고로이 그 어려운 러시아어로 사역을 하지 않아도 될 유혹은 상존하였다. 그러나 현지어 특별히 선교지의 주종족 언어는 선교사의 삶과 사역에는 필수이다. 이것이 장기적인 사역의 열쇠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통역 없이는 아무 사역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선교의 비용과 효율 면에서도 이는 자명한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처음으로 노어 설교를 시도한 것은 어린이 주일학교 예배에서였다. 심지어 이를 위해 주일학교 설교를 자청하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은 그림 시청각 자료를 이용한 설교를 좋아하고, 전달에도 효과적이라 이는 서툰 러시아어를 보완하는 데도 적절했다. 사할린의 아이들은 이전에 대하지 못하던 성경의 내용을 그것도 준비되어진 흥미있는 그림으로 대하니 구름떼처럼 몰려 왔다. 그래서 주간 중 노어 수업을 할 때 개인 교수의 도움을 얻어 가며 설교 자료를 노어로 번역하고 쓰는 작업까지 했다. 주일 전에는 이를 여러번 숙독하고, 아이들 앞에서 설교하는 언어실습까지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효과적인 언어훈련은 없었다. 물론 설교 후 피드백까지 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이렇게 노어설교를 시작하고 두번째 설교를 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 기억에 난다. 정성껏 설교와 자료를 준비해 그 날도 설교를 하였다. 그런데 설교를 작성하고 읽고 나서 원고를 정리할 때 페이지의 순서가 뒤바뀐 것을 몰랐다. 그림 자료를 OHP에 올려 놓고 그 그림을 가지고 메시지를 전하는 식이었다. 첫째 그림을 올려 놓고 설교하고는 두번째 그림을 올려 놓았다. 그런데 아뿔사 설교 원고는 세번째 그림에 대한 내용으로 뒤바뀌어 있는 것을 몰랐으니… 설교를 계속하는데 아이들의 눈치가 이상했다. 그림과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원고에 집중하느라 무슨 그림이 올려져 있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거의 그림 한 장면의 설교를 마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올려 놓은 그림을 쳐다보니 전혀 엉뚱한 설교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러시아어 설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수고는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시베리아로 선교지를 옮겨 한국어 통역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러시아인들을 사역의 주 대상으로 삼게 되었을 때 노어로 사역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설교 원고를 붙들고 한 2년을 씨름하고는 원고를 보지 않고도 자유스럽게 설교하게 된 것이 감사하다.

현지인을 세우기 위해서는 현지 사회의 형편과 필요를 민감하게 파악하고 적절하게 섬겨가는 것이 필요하다. 사할린에 도착해서 우선 동포들과 현지 러시아인들을 대하고 그들의 필요를 보게 되었다. 당시는 우선 빵이나 쌀도 제대로 구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일용할 양식의 필요를 먼저 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한국에서는 쌀이 넘쳐 이를 소비할 현장을 필요로 하고, 한국교회에서는 이를 기회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마침 교단의 중직에 계신 장로님이 그 일의 실무를 진행하고, 그 쌀이 사할린 동포들을 위해 전달되었다. 선교사들이 나서지 않아도 현지의 가장 급박한 필요가 한국교회의 섬김을 통해서 채워졌다. 이는 선교사들이 현장에서 힘껏 전도하고, 영적 사역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또 고국과 강제적으로 단절되어 한국어와 문화를 후대들에게 전수할 수 없게 된 동포들의 문화적 필요도 간절했다. 마침 이는 동역하였던 교사 출신의 평신도선교사님을 통하여 감당할 수 있었다. 1세 노인들을 섬기는 복지의 필요도 있었다. 이도 또한 때때로 사할린 현장을 찾아 봉사했던 한방 의료팀을 통해 공급되었다. 그러나 사할린에서 오래 머물지 못해 현지 러시아인들을 위한 섬김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전개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론 러시아 대륙의 한가운데 시베리아로 사역지를 옮겨 러시아인들을 주로 섬기게 되었을 때에는 만연한 알코올중독자와 노숙자, 버려진 아이들과 난민들을 섬기는 사역을 지속할 수 있었다. 현지 사회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감당하는 섬김의 사역을 진행하므로 이들과 하나되어 이들을 품고 생명과 삶을 실제적으로 나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교회가 하나님 백성의 새로운 사회이며, 그분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증거하고 가르쳐 현지인을 세워갈 수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 현지인을 세우는 일의 핵심은 그들을 가르쳐 세워 그들이 스스로 지도자로서 교회와 민중을 돌보도록 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현지 평신도 지도자들을 세워 그룹을 지도할 리더로 세우고, 그룹을 활성화하는 전형적인 한국교회의 사역이 제자훈련을 기초로 전개되었다. 사할린에서는 우선 구역의 형태로 교회를 그룹으로 나누었다. 구역장을 세워 이들을 교육하여 이들이 직접 교인들을 돌보고 사역케 하였다. 시베리아로 와서는 철저한 제자훈련이 시행되었다. 평신도지도자만이 아니라 교회를 담임해 이끌어갈 목회자로서의 신앙의 지도자를 세우는 것 또한 중요하다. 실로 선교사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역의 계승과 열매를 위해서는 준비된 목회자를 세우는 것이 그 핵심에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전기한 대로 교회들이 개척됨과 거의 동시에 현지 신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 사역을 지속하고 이들이 현지교회를 담임하게까지 되었다. 물론 교회 내에서의 사역만이 아닌 사회와 세상을 감당할 크리스천 사회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특별히 이원론으로 세상을 섬기기를 거부하는 러시아에서는 중대한 선교의 과제였다. 이는 이후 지성인 선교와 기독교세계관 사역으로 시베리아에서 이루어졌고, 현재와 앞으로의 주사역으로 지속되어야 할 과제이다.

선교는 실로 전 인격과 온 세상을 섬기는 사역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따른 ‘총체적 성육신선교’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주님의 사역을 이어가야 하리라.

2. 다문화적 다민족선교

선교는 성육신과 섬김과 동시에 열방을 향한 비전과 열정이다. 이는 특별히 우리의 울타리와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단일 민족국가이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여러 기원이 있다고 하나 이미 혈통, 언어, 문화에 있어서 차이점을 느낄 수 없도록 통합되어졌다. 물론 한국도 현재 이주민들과 국제결혼으로 다민족사회로 나아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선교지에서는 모든 나라가 다민족사회이다. 러시아만 해도 러시아 정부 통계로는 130여 민족이 있고, 선교학자들에 의해 세분된 통계는 180여 종족에 달한다. 따라서 다종족을 감당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이다. 그러나 한인선교사들은 무의식적으로 한 민족에 천착하는 습성이 배어있는 듯 하다. 심지어 다민족 회중을 민족별로 구분하는 것을 세련된 선교인양 착각하는 일이 종종 있다. 물론 이는 한국의 기성교회를 한 세대 이상 휩쓴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에서 제시된 개념이었다. 한국선교사들의 무덤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 특히 그 도가니의 중심LA의 풀러신학교를 중심으로 전염된 사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 개념은 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미국의 실용주의에서 나온 물질주의적이고 실적주의, 성공지상주의에 의해 오염된 가르침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선교적 교회의 모델을 보여주는 안디옥교회가 있다. 그 교회 성립의 출발은 유대인이 헬라인에게 나아가 전도한 일이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맥가브란의 주장처럼 교회성장을 위해서 유대인 따로, 헬라인 따로 모이지 않았다. 얼마를 지나 교회의 리더십이 세워지고 본격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여러 민족과 계층이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행 13:1-3). 여기에 주님의 제자들인 교회가 하나되고(요 17:21-23), 세상을 통일하는 교회의 이상이 실현된 모습을 보게 된다(엡 1:10). 선교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과 나라와 언어와 권세가 통일되는 현장이다(계10:11). 따라서 선교의 실재는 갈라지고, 싸우고, 전쟁으로 죽고 죽이는 세상에 나아감이다. 그들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적대하는 민족들과 세력들이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약속(사 11:6-9, 65:25, 계 5:9,10, 7:9)은 선교로 세워진 교회를 통해 현실로 드러난다. 교회는 이 약속을 이루는 예수님의 하나되고 유일한 몸이다. 또 교회는 그 나라의 실재를 전시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로 세상에 존재한다.

사할린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동포 한인들이 1세를 중심으로 유일한 회중이었고, 교회의 구성원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어로만 사역이 이루어지는 한인교회 형태였다. 그래서 처음 방문에서는 각 도시에 교회를 개척하고, 동포 2, 3세들을 위한 사역의 틀을 놓는 일을 진행 했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정착했을 때는 러시아어로의 현지 주종족인 슬라브계와 한국어로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 동포 2, 3세가 사역의 초점이었다. 물론 동포 1, 2세가 주 회중이었지만 각 교회들에는 러시아인들과 청소년들이 몰려들었다. 한에 어린 우리 동포들만이 아니라 러시아 변방의 사할린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 회중처럼 영적으로 갈급해 있었다. 또 러시아인들은 지적인 갈망도 커서 신학교를 개교하자 말씀과 신학을 접해보고자 지원자들이 모였다. 1년이 채 되지 않아 사할린을 떠나올 무렵에는 각 교회들에 러시아인들이 회중의 한 부분으로 함께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물론 현지의 주종족인 러시아인들을 주 사역대상으로 하는 일은 시베리아로 선교지를 옮겨 왔을 때 되어졌다. 러시아어로 사역했지만 고려인 한인동포들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왔다. 심지어 상업 차 러시아로 방문하는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도 모였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음악대학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모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어로의 사역의 필요가 대두되었으나 언제나 사역의 중심은 러시아어 예배와 러시아 회중이었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의 사역은 주종족인 러시아인을 그들의 언어로 감당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사할린 사역 초기부터 미전도종족으로 나아가게 하신 주님께서는 시베리아에서 교회와 사역의 발판이 마련되자 중앙아시아에서 내전을 피해 피난온 타직인들을 시초로 여러 중앙아시아 민족들과 집시, 시베리아 원주민 민족들, 중동에 뿌리를 둔 쿠르드인들에게까지 선교토록 하셨다. 또 이들이 한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공동체로 세워지는 모습을 보게 하셨다. 또 이는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화의 틀에서만 머무는 현지 개신교회들에게 사역의 모델과 자극이 되었다. 시베리아를 떠나올 무렵에는 현지교회들이 중심된 선교단체가 시베리아 소수 미전도종족들을 섬기는데 사역의 촛점을 맞추기도 했다. 쿠르드족 선교는 함께 연합한 사역 프로젝트가 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현지 개신교회들이 러시아인들만 모이고 이들을 위해서만 사역해 오던 패턴을 반성하고 타민족을 향해 사역의 필요를 느끼고 이를 시작하도록 도전을 던지게 된 일이 의미가 있었다.

실로 러시아도 슬라브민족주의의 등장으로 민족문제의 몸살을 앓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푸틴의 집권 후 노골화된 민족주의와 ‘강한 러시아’로의 복구의 추구는 그 그늘에 신나치주의 스킨헤드의 등장을 낳았다. 매년 수백명의 소수민족들이 이들의 테러로 거리에서 목숨을 잃고, 폭행을 당했다. 2007년 한해의 공식 통계로는 89명이 살해되었다. 공식통계가 이러하니 실제 희생된 숫자는 몇 배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으로 교체되기까지 누구하나 잡히거나 재판에 회부되는 일조차 없었다. 심지어 한인선교사들과 유학생들도 표적이 되었다. 필자 본인이 사역하던 교회와 한인교인들에게도 문제가 닥쳤다. 급기야는 한인 유학생이 피살되는 일이 시베리아 인근의 도시 바르나울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러시아 현지 개신교회는 이에 대해 문제의식 조차 느끼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매일 눈 앞에 수 많은 타민족을 보고, 이들과 만나 부딪치는 삶을 살아가지만 자민족중심주의의 죄는 이들의 눈을 가린듯하다. 심지어 어떤 민족이건 상관 없이 러시아어로 말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 또한 여전하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조차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관 없이 세상과 동일한 모습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며,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몸일 수 있겠는가! 모든 민족들을 제자 삼으라는 예수님의 지상위임령(마 28:19)은 만물을 통일하고 충만케 하는 교회의 지상 목적(엡 1:10,23)과 연결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이루어지고 그분의 나라가 임한다. 이 세상 구속역사의 전 과정이 선교이다. 이를 볼 때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상에 세우는 선교는 모든 민족을 품는 선교이어야 함이 자명하다. 그리고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민족이 주님 안에서 평등하며 조화를 이루는 다민족, 다문화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간혹 미주 등지에서 대하게 되는 다민족이 회집하는 교회도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주종족의 문화가 그 교회를 이루는 근간이다. 또 교회 리더십은 주종족의 사역자에 국한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안디옥교회와 같이 다민족, 다계층이 리더십으로 참여해 통일된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가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회의 모델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민족들이 자신의 문화와 언어로 함께 하며, 리더십에도 이 모든 것들이 동참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선교하는 교회 자체가 다민족, 다문화 사회를 품는 모습으로 세워질 때 교회는 자연스럽게 이 세상을 감당할 수 있다. 마치 초대 안디옥교회가 자신들의 선교를 통해 로마제국 전부를 품었듯이… 다민족, 다문화교회는 우리가 성경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선교의 도구이며 우리의 과제이다. ‘다문화적 다민족선교’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얻게 될 것이다.

3. 공동체적 자립선교

선교의 완성은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스스로 자립하는데 있다. 이 자립은 자식을 낳아 키워 성인으로 독립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라도 그가 스스로 서도록 하지 못한다면 자식 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자립은 영적이며 정신적일 뿐 아니라 재정적인 면도 중요하다. 이 모든 것들이 삼위일체가 되어질 때 자식은 온전한 사람이 된다. 자신이 가정을 이루고 번식하며 그 생명을 후대에 전한다. 또 사회의 일원으로 동참하며 세상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만일 자립하지 못한다면 끝까지 부모는 뒷치닥거리를 하다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결국은 자식의 장례를 치루고야 막이 내릴 것이다. 우리의 선교도 이와 동일하다. 자립하는 모습으로 현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자식을 자립심이 강한 아이로 키우는 수고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부모가 어떻게 자식을 양육하느냐에 따라 그 성장과 인생이 결정된다. 선교사는 동일하게 현지교회와 교인들을 자립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록 그 시초부터 세워가야 한다. 그러나 자립의 핵심은 세우고 키워가는 양육을 기반으로 떠나보내는 독립의 결단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받더라도 결국 부모를 떠나 자립하는 결단을 하지 못한다면 부모가 죽기까지 성인아이, 마마보이로 남게 될 수 밖에 없다. 오늘 복지로 죽어가는 유럽의 청년세대의 문제가 이와 동일하다. 유럽만이 아니라 강자독식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낳은 폐혜는 미국과 한국까지 청년세대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더구나 선교는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게 하는데 그 사명이 있다.(엡 4:11-16) 곧 신자 각자가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창조의 원형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신국의 완성에 선교의 목적이 있다. 물론 이는 이미 한국선교계에 금언이 되어진 삼자원리의 자립, 자치, 자전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또 최근까지 서구선교계를 이끈 랄프 윈터의 선교지교회의 3단계론(양육단계, 동반자 관계, 리더십 이양과 지도자 단계)과 연관된다. 그러나 한국교회와 한인선교사는 제3세계교회의 세계선교 선두주자로 이의 새로운 이해와 적용, 실천의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다. 한국교회 선교는 서구교회를 이어 다음 세대의 선교주자인 제3세계교회(중국, 남미, 인도, 아프리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중대한 시점에 와 있다. 우리가 어떠한 선교의 패러다임을 세워가느냐에 따라 우리 이후 세대의 선교는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선교가 서구제국의 변방으로 그 유산을 따른다면 서구선교의 몰락과 함께 그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일으키는 초석을 마련한다면 장래 세계선교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역할과 위치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는 회피할 수 없는 역사의 부름과 책임이 되었다. 세계선교계는 2015년이 되면 한국선교사의 수가 미국을 추월하여 세계 제일의 선교국가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중국이 경제 규모에 있어서 미국을 앞지르는 것보다 그 시점이 빠르다. 결국 이 말은 한국교회 특히 한국선교에 의해 세계의 영적 장래가 달려있다는 말이다.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책임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세대의 한인 신자와 한국교회, 한국선교사들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와 한국선교의 실상은 암울하기 그지 없다. 한국교회는 중세교회보다 더 타락했다는 말이 점점 더 신빙성을 얻어가고 있다. 한국선교도 그 규모나 역사에 있어서 태두라 할 수 있는 장로교 합동교단 선교부인 GMS 부터 혼돈의 구렁에 빠져 있다. 이미 종교개혁 차원의 뿌리로부터의 구조적 변화 없이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실정이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바른 성경의 교훈을 토대로 창조적인 변신과 새로운 방향을 찾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경의 교훈과 예를 찾는 것이리라. 구약의 선교적 삶을 산 믿음의 선진들과 이스라엘을 향한 선교적 소명,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의 행적 특히 선교사로 로마제국 전역에 교회를 세워 이들로 제국을 변화시킨 바울의 삶과 사역을 생각한다. 성경의 기록들을 상고할 때 우리는 그 혁명적 발상과 역사의 진행에 놀라게 된다. 평생을 방랑하는 나그네가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그로부터 온 세상 민족들이 영적인 근원을 찾고 복을 받는다. 한치의 소유도 없던 그의 후손들에게 세계의 요충지 약속된 땅이 상속된다. 빈털터리 이주민이 당대의 거부가 된다. 뿌리 없는 노예, 약소국의 볼모가 당대 세계 최고 제국의 모사와 통치자가 된다. 노예 백성, 민족이 세계역사를 새롭게 하게 될 왕 같은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 된다. 자기 집에서도 별볼일 없었던 천덕꾸러기 막내가 민족 역사의 최대 군왕이 되며, 그가 건설한 국가가 하나님 나라의 예표가 된다. 자기 생애 동안 그 누구도 따르지 않고 피살된 선지자로부터 민족 회복과 구속역사의 제국들의 새로운 세계사가 준비된다. 가축우리 짐승들의 먹이통에서 태어난 이가 세상을 그 뿌리부터 개조하고, 역사를 새롭게 할 절대자가 된다. 식민지 하에서도 가장 천대받던 지역의 서민들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 이끌 새로운 사회와 조직의 지도자와 전파자가 된다. 이제 겨우 새로운 신앙과 진리를 접한 이들이 그 종교의 근원된 조직을 지원하며, 그 운동의 후원자가 된다. 서로 개라고 부르며 적대하던 이들이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동지가 된다. 주인과 노예, 권세자와 백성의 차별이 허물어지고 이들은 함께 다스리며, 함께 종이 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교로의 참된 개혁은 기존의 구조를 개조하는 새로운 역학이다. 이는 권력과 재정의 새로운 질서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치와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동반한다. 변화의 근원은 하나님의 존재와 영원한 진리에 뿌리를 두지만, 그 현상은 이러한 극단의 변화를 가져온다. 진리는 반드시 이 변화의 동력을 수반한다. 이 변화의 동력을 상실한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단지 철 지난 주장, 도그마일 뿐이다. 참된 진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다. 이 진리는 세상을 창조하고, 구원하며, 다스리며, 회복케 한다. 진리는 오늘 살아있는 현실이다. 선교는 다름 아닌 이 진리의 전파와 실현이다. 이러한 진정한 선교로의 성경적 패러다임에는 새로운 사회 창조를 위한 두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 첫번째는 권력과 정치에 있어서의 리더십의 공유이다. 또 하나는 재정과 경제로 물질의 상부상조를 그 내용으로 한다. 이것이 인간 사회구조 변화의 핵심이다. 내면으로부터 새롭게 된 이들의 새로운 사회는 이전의 세속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의 틀로부터 반드시 이러한 변화를 초래한다.
필자의 선교에 있어서 한많은 사할린동포들로부터 시작된 선교는 그들의 눈물을 씻겨주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표현대로 이는 더 큰 축복을 위한 연단과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위한 준비였다. 이들은 복음을 받았을 때 이를 전파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었다. 극한 고난 가운데에도 자신의 것을 내어주어 선교의 동역자와 후원자가 되었다. 자신들이 사회의 소수로 멸시와 배척받는 처지에 있었지만 오히려 다수인 러시아민족교회의 필요와 어려움을 돕고 지원했다. 시베리아에서도 힘 있고 돈 있는 이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던 버려진 이들을 먹이고 돌보았다. 그곳에서 소수로 꺼려지고 박해받는 이교민족들을 품고 그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며 섬겼다. 심지어 이들 현지교회의 신자들은 선교황무지를 향해 나아가는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 개척선교사들의 동역자와 후원자가 되었다. 이들은 그저 믿고 구원받아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교회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선교를 통한 열매로의 현지교회와 신자의 참된 성숙은 함께 섬기고, 함께 다스리는 리더십의 공유에 있다. 또 자신의 것으로 약한 자를 돌볼 뿐 아니라 먼저 된 자신들에게 선교한 나라와 교회, 선교사들도 재정적으로 함께하여 돕고 섬기는 모습에 있다. 여기에 참된 성숙의 열매가 있다. 이를 통해 모든 민족이 한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예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있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지금도 리더십을 독점하는 교권주의가 지배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본다. 이는 중세 카톨릭교회의 성직계급제도와 동일한 현상이다. 얼마전 GMS의 선교재정을 오용한 지도자들에 대한 시정의 촉구와 조직적인 대응이 ‘하극상’으로 공공연하게 교단신문에 언급되었다. 한 줌 안되는 교권을 가진 자들은 상전이고, 나머지는 모두 하인이란 말이다. 이런 세상적인 권력의 원리는 성경과 기독교와는 반대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그러나 상명하복의 원리는 후원교회와 선교사와의 관계, 한국선교사와 현지교회의 관계 어디에나 널려 있는 것이 현실인 바에야… 또 이는 한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양길에 접어든 서구와 미국교회도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의 우위로 선교계와 영적 지도력을 독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자본의 독점이 초래한 문제가 온천하에 드러난 현재 다시 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인재주의는 이 독점권력을 유지하려는 안간힘이다. 이는 신식민주의로 불려 마땅한 새로운 소수의 다수에 대한 지배전략이다. 그러나 세속에 물든 세계의 기독교회는 필시 이것이 세상구원의 복음이라도 되는 양 이들의 뒤를 따라 합창하리라는 것은 정해진 걸음이다.

권력만이 아니라 재정의 문제는 또 다른 논의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소유권에 대한 청지기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세상의 주인은 부자, 가진 자가 아니다. 하나님만이 물질과 재정의 주인이시다. 어느 민족, 어느 교회, 어느 개인이 이를 소유한다 해도 이는 관리의 책임이 맡겨진 것 뿐이다. 따라서 재정은 잠시 섬김의 용도로 주어진 것이다. 이 재정은 하나님의 복과 충만을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유일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를 얼마나 과시하고, 주장하며 지배하는 용도로 오용해 왔는가? 심지어 교회는 자신의 부를 섬겨야할 민중을 착취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혁명 전 정교회의 토지의 독점과 민중의 농노화와 착취가 부를 독점한 교회의 모습이었다. 미국의 남부 바이블벨트의 교회들의 노예제의 주장과 지지가 이와 동일한 것이다. 한국의 교회들이 성장지상주의의 세상 경영의 이념을 교회에 도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불꽃목사로 불려지던 어떤 이는 자신은 CEO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불꽃은 세상의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열정임이 틀림없다. 자신이 독점적인 지배자의 위치에 오르고서 다른이들을 섬길 방도는 없다. 아무리 그들이 사랑을 외쳐도 이는 지배의 욕구라는 것을 모를 이가 없다. 다만 자신들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속이는 자는 자신의 과업을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모든 이들이 속이는 재주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참된 성숙과 충만의 선교의 과제는 가시적으로 ‘리더십의 공유’와 ‘물질의 상부상조’에 있다. 이를 통해 모든 민족들은 하나님 앞에 장성한 자로 세워지며 자립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함께 세워지는 모습임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자립의 원리가 개교회주의, 개인주의로 곡해되는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공동체적 자립선교’이다. 어느 시인은 ‘홀로 서기’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참된 연합과 하나됨을 위해서는 먼저 홀로 세워짐의 절차를 필요로 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시다. 그러므로 그 연합은 완전한 하나됨이다. 여기에 우리의 참된 하나됨의 근거가 있다. 이 기초 위에 교회와 세상은 연합하여 하나되고 통일되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 자립하므로 온전함 가운데 공동체로 하나되는 선교, 이를 위해 선교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1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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