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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목회, 신학 > 설교 등록일 2012-01-23
작성자 관리자 (admin)
질투하시는 하나님(나훔)
나훔 1:2-3


“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나 1:2-3)

요나가 니느웨에서 회개를 선포 한지 100여 년이 흐른 뒤, 나훔의 니느웨에 대한 최후통첩이 선포되었습니다. 앗수르는 애굽의 등장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애굽은 B.C. 640년에 분열된 왕국을 통일 시켰고, 팔레스틴으로 진군해 왔습니다. 팔레스틴의 민족들은 애굽에 의한 보복의 잔인함을 보면서, 앗수르에 대한 축적된 증오를 표출하였습니다. 이러한 증오의 한 예가 예언자 나훔의 시들입니다(Meyer).
니느웨에 대한 최초의 성경에서의 언급은 창 10;11에서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 니느웨는 니므롯에 의해 건설된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중심지들과 함께 언급되었습니다. 또한 니느웨에 대한 언급은 왕하 19:36과 사 37:37에서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니느웨를 산헤립의 아들들이 그를 살해한 것을 증언하는 장소로 기록하였습니다. 보다 정확한 진술은 니느웨의 최후를 기록한 스바냐와 나훔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니느웨에 대하여 부수적으로 언급하였지만 나훔서는 ‘니느웨에 대한 묵시’라는 표제가 붙여질 만큼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생생한 감동과 상상력과 권능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분쟁을 그린 앗수르의 문학 작품과 비교해 볼 때 분명히 뛰어납니다. 한편 니느웨를 중심으로 다룬 다른 성경은 요나서입니다. 나훔서와 약 100년 간의 시차를 두고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요나서는 도덕적인 교훈을 주기 위해 재편집되었다는 주장(Ewald)에도 불구하고 니느웨가 누렸던 영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그 가치가 매우 뛰어납니다.

전설에 의하면 나훔은 메소보다미아에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다고 되어있으나 본서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이며 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로 나옵니다.

나훔서는 천재적인 시적 재능이 엿보이는 책입니다. 즉 나 1:2-9의 알파벳 시(acrostic: 각행의 처음과 끝을 맞추면 하나의 어구가 되는 시 형식인데, 본서에서는 시행의 첫 글자가 알파벳의 순서로 되어 있음)입니다. 알렙, 베트, 깃멜 등의 순서로 ‘답관체’ 형식의 시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시는 시편 119편에서 ‘팔진법시’로 나타납니다.

나훔의 시는 3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① 여호와를 모든 나라의 구주로 인정하는 점, ② 앗수르의 정책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다고 비판한 점, ③ 앗수르를 유다를 치는 도구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곧 나훔의 메시지의 요지는 여호와가 비록 열방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 유다를 치시더라도 여호와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다를 유익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나 3:8-17).

1. 보수자 하나님
나훔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언 가운데는 출 34:6, 시 103:8; 145:8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신실하심의 선언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그 후반부는 출애굽기나 시편의 언급과 다분히 유사한데, 여기에서 하나님은 본서에 강조된 대적에 대한 자비나 인내보다도 오히려 질투와 보수 정신에 가득 차 있음이 엿보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에서 인내에 대한 구절은 나 1:3의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는 표현에서만 암시되었을 뿐입니다.

1) 하나님의 두 가지 성격
본서의 시인은 하나님이 지니신 두 가지 대조적인 성격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택한 백성들에 대한 입장이십니다. 그런데 시인은 전자의 모습을 자연 가운데서, 자연의 힘을 통하여 하나님의 과감한 행동을 계속 묘사함으로써 제시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강을 말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바다까지도 말리는 맹렬한 열로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신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이 강조하고자 한 점은 자연의 힘이라고 불리는 것을 통하여 자연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관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선고와 평화의 선포
나훔은 그 대적과 대적으로 인하여 고통 받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예언적으로 선포하였습니다(나 1:12-14). 즉 여호와에 대하여 악을 꾀한다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압박하는 것은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죄목이라는 것이 시인의 관점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두고 피압박 민족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인 요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대적하는 대적자들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멸절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선고에는 보수자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고는 그 대적의 이름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이며, 그러므로 후손도 남지 않을 것이고, 그 백성들은 멸절하여 땅에 묻힐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더욱이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대적의 신전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고는 그 대적들의 최고 가치로 간주된 신전에서 그들을 파멸해 버리시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최고의 가치관을 가진 네 가지 중요한 기준에 의해서 그 대적들을 꾸짖으십니다.
① 강한 능력의 소유, ② 안정된 생활의 지속, ③ 자손을 통하여 그 가족의 이름을 계승시키는 것, ④ 우상 숭배의 실상 등 네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대적한 자들의 거짓된 가치관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거부한 것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악을 도모하는 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저들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아무리 강한 군대와 국력을 자랑할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허약하고 무기력한 것들이 됩니다. 곧 하나님의 선고는 하나님의 권위에 항거한 니느웨의 비참한 운명을 취급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본서에 나타난 여호와의 선고에는 고통 받는 신실한 자들에 대한 평화의 선언이 담겨져 있습니다. 곧 그들은 고통이 끝나고, 대적의 멍에가 깨뜨려지고 그들의 결박이 끊어져 자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식은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길이 산 위에 있을 대 한 전달자를 보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 전달자가 전한 메시지의 요지는 ‘평화’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히브리인들의 평화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면 평화는 무장 충돌이 단순한 정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곧 평화는 무장 충돌의 단순한 정지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평강과 그 백성의 평강과 번영을 가져오는 지역 사회의 평화, 그리고 신적인 혹은 국가 권력에서 확립된 생활 질서 등과 연관된 개념입니다. 특히 나 1:15에 선포된 평화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여호와는 평화를 선포할 때 절기와 서원을 통한 평화의 인식을 지시하였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 아래 주어진 생활 의식을 지키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유다를 대항하여 일어날 대적이 없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곧 진정한 평화의 도래는 무장 충돌의 단순한 정지를 뛰어넘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보수자 하나님의 모습은 결국 택한 백성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대적자에 대한 철저한 보수입니다.

2. 니느웨의 몰락
1) 니느웨에 대한 경고
유다의 선지자 나훔은 자신을 니느웨 멸망의 파수인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B.C. 612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파멸하기 적전에 니느웨를 향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전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니느웨의 멸망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악을 도모한 죄로 이하여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니느웨의 파멸에 대한 파수인으로 자처한 것은 왜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니느웨 파멸의 위기에 대한 이방 족속들의 태도를 살펴보자, 이미 이방에는 니느웨 파멸의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새로이 등장한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위협을 느끼고 있던 많은 이방인들은 앗수르의 폭압 정치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은 하나의 해방자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나훔이 니느웨의 위기에 대한 경고를 선포한 것은 니느웨 파멸을 안타까워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파멸의 때를 맞이한 니느웨를 들어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유다에서 예언을 선포한 것으로도 짐작 가능한 일입니다. 여하튼 니느웨의 파멸은 이미 정해진 바요 그것을 전달한 의무를 부여받은 선지자지만 그의 신앙의 모토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한 경외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선지자의 입장은 그의 야곱과 포도나무에 대한 언급에서도 잘 나타납니다(나 2:2). 즉 선지자는 포도나무의 가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야곱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언하였습니다. 그 가지를 꺾어 없이하여 버리는 약탈자들은 분명히 니느웨 백성과, 처음부터 자신들의 파멸의 요소를 내재하고 시작한 앗수르 군대의 침략에 대한 경고임이 분명합니다.

2) 니느웨에 닥친 혼란
나훔서의 생생하고 감동적인 표현을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은 니느웨성이 당할 혼란의 모습에 대한 시인의 묘사를 주목합니다. 즉 본서에는 니느웨성이 패배하기 직전의 혼란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었습니다(나 2:3-9). 최후 순간에 직면한 니느웨의 거리와 그 주변에는 백성들을 위시한 관리들, 그리고 병거들이 미친 듯이 내달립니다.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 백성들에게 무장을 하고 산성을 지키도록 사기를 고취시키지만, 이미 운명의 니느웨성에는 대적의 군졸들이 깃들어 있었고, 파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는데, 번쩍이는 색깔로 단장한 방패와 옷, 잘 다듬어진 창과 병거들의 위협, 그리고 의기양양한 병마의 대열과 사방으로 뻗친 병거의 날랜 모습들이 위협적입니다. 선지자는 공격하는 침략자의 모습과 아울러 허둥대는 니느웨성의 백성들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즉 급하게 허덕이며, 성에 이르러, 이 성읍을 둘러싸고 쳐들어오는 대적들을 막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패와 숨겨 논 무기를 찾는 피로에 지친 관원들의 모습을 선지자는 홍수가 난 상태의 혼란처럼 묘사하였습니다. 더욱이 선지자의 문학적인 예지가 번득이는 부분은 부녀자들의 허둥대는 모습이나 통곡하며 도망치는 처참한 모습입니다.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며,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모습은 한 나라, 한 도성의 파멸을 더욱 처참하게 만들었는데 이 같은 혼란 상태는 곧 하나님에 의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3) 폐허가 된 니느웨
패배한 니느웨성의 참상은 마치 공포에 사로잡힌 사자 굴과 같았습니다. 다시는 사자가 암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며, 그 새끼들을 위하여 짐승을 찢어 오지 못할 것이다. 폐허가 된 니느웨성에 대한 후대의 보고에 의하면 B.C. 401년에 이곳을 지난 헬라의 퇴각하던 군대들이 니느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Xenophon). 이처럼 폭력과 박해에 대하여 공의로우신 여호와께서는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고 니느웨성을 파멸시켰습니다. 이제 앗수르의 병거는 연기 속에 사라지겠고, 젊은 사자 앗수르는 이제 영영히 파멸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앗수르의 약탈이 끊어짐은 물론 앗수르 왕에 대한 공납의 의무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변의 민족들은 앗수르의 멸망에 갈채를 보냈을 것입니다. 실제 역사적으로 앗수르의 앗술 바니팔이 니느웨 몰락 이후 하란에서 앗수르의 통치권을 지속하려 하였지만, 그의 노력은 갈그미스 전투(B.C. 605)의 실패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고 그의 백성들도 바벨론에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3. 니느웨에 대한 조롱시
1) 포악의 대가
나 3장에 이르러 시인의 어조는 다소 조롱조의 위협적인 정서를 나타냅니다. 우선 정서적으로 예언이라는 선언적인 면은 한 걸음 물러나 있고 관조적인, 다분히 시적인 감상에 의해 포악의 대가를 비교하였습니다. 즉 시인은 이제까지의 예언 선포적인 위협과 경고의 어조에서 벗어나 니느웨성 안에 쌓인 ‘악의 소굴과 수 없는 죽음과 시체 무더기’ 속에 나타나 있는 악의 대가를 비교하였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관조적인 느긋한 정서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상당한 공포를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의 어조가 위협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앗수르의 악독한 행동에 관한 언급은 일종의 도덕적 관념에서의 정죄와 늑탈한 성읍에 대한 증오에 찬 형벌이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시인의 요지는 앗수르에게 임한 형벌은 정당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니느웨의 패배로 인하여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수치와 굴욕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호와는 니느웨를 벌하실 것이며, 음란한 행위와 그 외의 도덕적 타락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폭로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폭로의 목적은 모든 사람의 구경거리로 만들어 수치와 굴욕을 당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자비 정신은 은유적으로조차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비는 사전에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지 사후에 형벌을 감해 주는 것과 같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시인의 관점입니다.

2) 니느웨에 대한 조롱시
시인은 니느웨를 노아몬 성읍과 비교하여 조롱하였습니다. 노아몬은 앗수르가 B.C. 663년에 약탈한 성읍입니다. 시인은 이 성읍의 약탈 사건을 회상하면서 니느웨도 역시 그 몰락하는 날에 처음 익은 무화가 열매같이 그 요새지가 무너지고, 군대는 여인같이 행동하는 무능한 군대가 되어 버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시인이 노아몬을 비유로 든 것은 아마도 노아몬의 지형적 위치와 니느웨의 지형적인 위치가 비슷했던 때문인 듯합니다. 노아몬도 니느웨가 티그리스강에 둘려 있는 것과 같이 나일강의 물로 둘려 있고, 다른 이방의 도움을 받았으나 몰락하였습니다. 학자들은 노아몬과 니느웨의 몰락에 관한 조롱시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진 조롱시였다고 생각합니다(Smith, Davidson, Nowack, Sellin). 그만큼 두 도시의 몰락은 고대 근동의 역사 변화에 있어서 중요한 단락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두 도시의 몰락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대한 감사의 축제(절기 제사)를 드릴만큼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신년 축하 제사에서 이 조롱시를 불렀습니다(Smith).

3) 헛된 노력
니느웨 몰락에 대한 조롱시에는 니느웨 포위를 대비한 저항의 태세를 갖추라는 시인의 권고가 포함되었는데, 이는 주목할 만한 아이러니입니다. 즉 선지자 나훔의 권고는 포위한 대적들이 성으로 통하는 물줄기를 막을 지도 모르니 물을 길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어벽을 쌓고 군대를 준비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이 헛된 것임을 시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에 대비하라는 선지자의 권고는 이해가 잘 안됩니다. 그러나 나 3장이 니느웨 멸망에 대한 조롱시라는 것을 생각할 때 선지자의 권고 또한 조롱의 한 방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니느웨는 파멸에 앞서 많은 준비를 하겠지만 그것은 이미 닥친 운명을 모면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오히려 군비 확충을 위해 모든 백성이 허덕이고 허둥대는 운명의 도시, 패배의 도시에 대한 조롱이 역설적인 권고를 통하여 드러났습니다. 즉 그들은 헛된 노력에 동원되느라고 전쟁이 임하기도 전에 지쳐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의 준비가 완벽하리만큼 잘 되었다 할지라도, 또 그 백성들이 메뚜기 떼처럼 무수하게 많을 지라도 그들의 준비는 물거품이 될 것이며, 바람과 기후의 변화로 인해 날아가 버린 메뚜기 떼처럼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저항은 헛된 노력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4) 앗수르 마지막 날
선지자 나훔의 마지막 메시지로 앗수르 왕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조롱으로 군사적 지도력과 왕으로서의 특권을 한 몸에 지녔던 앗수르 왕의 최후에 대한 애가입니다(나 3:18, 19). 또한 니느웨 최후의 날에 목자들과 귀족들의 나태함에 대해서도 조롱하였습니다. 결국 선지자는 니느웨와 앗수르의 멸망은 하나님의 거역할 수 없는 징계라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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