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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목회, 신학 > 설교 등록일 2011-08-28
작성자 관리자 (admin)
험악한 야곱의 일생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창 12-25장까지(10장)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 24-28장까지(5장) 이삭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 25:19-창 50장(25장:마지막) 까지 나옵니다.
창 37-50장까지 야곱의 아들 요셉이야기가 끼어서 나옵니다.
이렇게 창세기의 절반이 야곱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얼마나 길어질지 모릅니다. 오전에 못하면 오후에 계속됩니다. 아주 오늘 창세기 마지막까지 뿌리를 뽑아야 됩니다. 지독한 야곱을 만났기 때문에 우리도 대충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기록이 말해 주듯이 야곱의 일생은 단순하게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성경을 보면서 기존의 생각을 버리고 다시 성경을 보았습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 요셉을 만나 바로에게 자신을 소개하는데 성경 한 줄에 나옵니다. 이 간단한 성경 한 절이 야곱이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때 야곱의 나이가 130세입니다.
본문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하였습니다. 이삭이 180세를 살았습니다. 아브라함 175세를 살았습니다. 아직은 130세 살았지만 아버지 할아버지에 비하면 아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후에 17년을 더 살고 147세에 죽었습니다. '험악한'의 어근은 '라'([r')입니다. 이 뜻은 "악한, 나쁜, 고난, 해로운, 슬픔" 입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180세까지 살았습니다. 늙어서 눈이 어두워 에서와 야곱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눈이 어두워 졌습니다. 이삭이 마지막으로 자식에게 축복하려고 큰아들에게 사냥하여 고기를 가져오고 그것을 먹고 기쁨으로 마음껏 축복해 주려고 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삭은 큰아들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입니다(창 27:1). 우리는 야곱 이야기를 할 때 이 일을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합니다. 피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100세에 준 아들입니다. 어머니 사라는 여인으로 아기를 낳을 수 없는데 하나님의 축복으로 얻은 자식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에게 철저히 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에 속이고, 빼앗고 이런 사람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리고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이삭의 삶은 다 주면서 살았으니까요. 또한 이삭의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사라입니다. 사의 원래 이름은 사래인데 하나님이 사라(여주인, 왕비)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열국의 어머니 즉 만인의 어머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와에게 주어졌던 것을 다시 누구에게 주어진 것입니까? 하와는 자격 박탈이구요 여자의 어머니는 사라라는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에게서 교육받고 산 사람이 이삭입니다. 그런 이삭이 비록 눈은 멀었지만 생각이 잘못되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한번도 거역한 적이 없는 이삭의 생각은 당연히 형 에서가 비록 쌍둥이로 조금 빨리 태어났지만 장자로 축복을 잇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어머니와는 달리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문제였습니다. 아들이 연약해 보인다고 지나친 편애를 한 것입니다. 에서는 허탈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야곱과는 반대입니다. 마치 이삭을 닮은 것이지요. 다 달라면 다 줍니다. 아버지 이삭이 볼 때는 야곱보다는 에서가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교육은 역시 어머니가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문제입니다. 어떻게 어머니가 되어 가지고 아들보고 아버지를 속이자고 합니까? 이렇게 교육해도 되는 것입니까? 사라 같으면 이렇게 교육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야콥이 아버지에게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말합니다(창 26:12). 아들이 이렇게 말하는데도 어머니는 계속 밀어부칩니다. 좌우지간 치마바람 치마바람 해도 야콥의 어머니 리브가는 못 따라갑니다. 치마바람의 원조입니다.
그러니까 리브가가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창 27:13)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식은 그만두자고 하는데 어머니가 밀어부친 겁니다.

야곱(야콥)은 '발꿈치를 잡다'는 뜻입니다. 야콥에게 한번 걸리면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천사가 야콥을 모르고 왔다가 잡혀서 나중에 억지로 빠져나갔습니다. 아주 지독한 사람이 야콥입니다. 이삭이 나중에 온 에서에게 이미 야콥에게 축복을 했다고 말할 때 에서가 말합니다.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와야아크베니)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창 27:36)라고 말합니다. 야콥은 '속임'이라는 의미가 히브리어 어근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의 형태는 족장시대나 이스라엘 역사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누가 속이는 자를 좋아하겠습니까? 야콥에게는 가까이 가기도 싫어합니다.
나중에 헬라시대에 '야코보스'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만 그 이전에는 없습니다.

고대에 축복이란, 이미 말해버린 것은 마치 왕이 한번 명령한 것을 취소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취소할 수 없습니다. 끝난 것입니다(이 당시에 발견된 누찌 서판에 의해서도 확인됨).
결국 이 일로 에서는 가만히 있기 어려워 졌습니다. 사실 누구라도 에서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호탕하고 잘 참고, 쌍둥이지만 동생이니까 다 너그러이 이해했지만 정말 이건 아니지... 그러면서 이를 닥닥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밧단아람에 있는 하란 친정집으로 피신시킵니다.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있다가 오라고 합니다.

그 사이에 야곱이 자식을 낳습니다. 레아가 야곱에게 사랑을 못 받으니까 하나님은 자식으로 야곱의 사랑을 받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르우벤(보라 아들이라:창 29:32), 둘째 시므온(들으심:창 29:33), 셋째 레위(연합함:창 29:34), 그리고 넷째 유다(찬송:창 29:35)을 낳고 태의 문을 닫으십니다. 이 때 동생 라헬이 자식을 못나니까 자기 시녀 빌하의 소생을 보내서 다섯째 단(억울함을 푸심:창 30:6), 여섯째 납달리(경쟁함:창 30:8)을 낳습니다. 레아도 이제 하나님이 태를 닫으셔서 자기가 자식을 못나니까 자기 시녀 빌하를 야곱에게 보내 일곱째 갓(복되도다:창 30:9-11), 여덟째 아셀(기쁨:창 30:13)을 낳습니다. 그리고 다시 레아에게 태를 여시어 아홉째 잇사갈(값:창 30:18), 열째 스불론(거함), 그리고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사 11번째 요셉(더함:창 30:24)이 태어납니다. 여기까지 네 명의 여인에게서 11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요셉을 낳고 야곱은 라반의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습니다. 야콥 이름이 속이는 자이지만 이제 더 이상 라반과 함께 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양이 잘 되어도 결국은 라반이 이렇게 저렇게 다 차지합니다. 야곱은 라반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야밤도주를 합니다. 얼마나 감쪽같이 떠났느냐 야곱이 떠난지 라반이 3일 동안 몰랐습니다.
여러분! 라반도 라반이지만 야곱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인간관계를 이렇게 하면 안되잖아요. 어쨌든 두 딸과 여종들까지 4명의 여자를 취하고 장인어른인데 인사는 드리고 떠나야지요. 그런데 아주 조용히 떠나버렸습니다. 인사는 무슨 인사... 그냥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 무서워 할 필요 없습니다. 세상 사람이 뭐가 무섭습니까? 이삭 같으면 이렇게 했겠습니까? 야곱의 인품이 이정도 밖에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보세요. 반드시 인물들에게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에녹에게는 "나와 동행한 자"라 하셨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가리켜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4)고 했습니다. 시편과 다윗의 전체 주제가 뭐냐하면 정직과 공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거짓으로 얼룩진 사람입니다. 꼭 속이는 사람은 또 속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라반에게 된통 당하고 요셉까지 11명의 자식들을 데리고 밧단아람을 떠납니다. 라반이 이 사실을 알고 따라갔는데요 7일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만났습니다. 이 거리가 서울에서 부산거리입니다. 아이들하고 7일을 걸어갔으니 얼마나 많이 간 것입니까? 쫓아가서 마치 죽이려듯 하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고 천사를 내려보내 라반에게 "... 삼가 선악간에 야곱에게 말하지 말라"(창 31:24)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이 야곱을 무슨 의인이나 완전하다라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선악간' 선한 점도 있지만 동시에 야곱에게는 악한점도 있다는 것입니다. 선은(b/f:토브) 이고요 '악'은 '라'([r')입니다. 이 말은 아시지요, 본문에서 야곱이 직접 "험악한 세월을 살았나이다"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라반이 말하기를 내 딸들을 포로처럼 강아지 끌고 가듯이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창 31:26). 그러니까 야곱이 31절에서 딸들을 억지로 빼길까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절대 대장부가 아닙니다. 의인하고도 거리가 멉니다. 믿음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거짓말장이에 비겁자 입니다. 그럼 왜 복을 받았느냐. 그건 야곱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브라함 때부터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는 노아, 아브라함, 이삭은 복 받을 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최초로 복 받을 사람이 아닌데 복을 받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최초의 사람이 야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야곱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슨 복 받을 일을 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복 받을 사람이 못되는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받는 겁니다.

야곱은 71세에 에서의 분노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내려가 20년을 보내고 11명의 아들과 아내들을 데리고 91세에 고향으로 갑니다. 외삼촌 라반에게 20년 간 봉사한 결론은 품삯을 10번이나 어겼다는 겁니다. 아주 야곱이 호되게 당한거지요. 그리고 이들의 관계는 겨우 천사의 중재로 "51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창 31:51-52)고 하고 마칩니다. 20년 함께 한 인간 사이가 이렇게 험악해서야 되겠습니까? 서로 이제 땅을 넘어가는 일이 없고 각자 잘살자 그런 이야기입니다. 으른바 미스바 언약입니다.

그리고 고향 땅 에서가 있는 곳에 다다랐습니다. 야곱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사실 자기 잘못을 알면 형에게 무릎꿇고 자기의 잘못을 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죽을죄를 짓고 도망 다니다 90세가 넘어서 왔으면 이제 무슨 목숨에 그렇게 겁을 냅니까? 그런데 세일 에돔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사람을 보내 형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염탐하게 합니다.
염탐꾼이 와서 보고하기를 "에서가 야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400명을 거느리고 달려오고 있습니다."하였습니다 야곱은 두 패로 나누고 선물을 골라 보내고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 32:22-23) 라고 나옵니다. 자기혼자 강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니까 이거 그대로 놔 뒀다가는 아무것도 안되겠으니까 천사보고 내려가 보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야곱 앞에 섰는데 그만 야곱의 특성을 잘 모르고 너무 가까이간 모양입니다. 갑자기 천사를 잡더니 붙들고 늘어지는데 세상에 천사가 이런 사람 처음 본 것입니다. 아니 뭐 이런 게 다 있어 내가 천사를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지만 이런 인간은 처음이야 그러는 겁니다. 어떻게 붙들고 늘어지는지 새벽이 다 되어서 이제 그만 가야되는데 안 놓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천사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습니다. 저는 천사가 사람에게 구타했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처음 봅니다. 그리고 무슨 사람이 보통 천사를 보면 다 놀라 떨어지는데 야곱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나타날 때마다 하는 말 있잖아요. 형사는 범인 체포 할 때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뭐 그러잖아요. 천사는 사람들이 다 놀라 떨어지니까 "무서워 말라! 놀라지 말라!" 이것이 천사가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인간이 놀라지도 않고 아니 아침까지 붙들고 늘어집니까?

그래서 천사가 내 이름이 무엇이냐? 그렇게 물어봅니다. 야곱이라고 하니까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창 32:28-29) 그리고 그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하였습니다.

천사는 사실 야곱하고 씨름하려고 내려왔던 것은 아닙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 야곱이 원하는 무슨 축복을 준다고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냥 "형이 너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 하려고 온 것인데 괜히 붙잡고 무슨 축복을 달라고 난리를 떤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천사와 밤새 씨름을 하고 와서 보니까 아들들과 아내들은 이미 에서를 만났고 에서가 보니까 90세가 넘은 사람이 저 쪽에서 오는데 머리는 감았겠습니까? 도망 나오는 길이잖아요. 거기다 강가에서 천사하고 밤새도록 씨름하다가 오는데 그 몰골이 가관입니다. 창 32:31 '절었더라'고 합니다. 천사한테 얻어맞아 그런 겁니다. 아무리 독한 마음을 먹고 있던 에서라도 자기 동생이 20년 만에 그런 모습으로 오는데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무슨 선물이라고 소와 양 이런 것을 가지고 왔는데 형 화 풀라고요. 에서가 말합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창 33:9)고 하고 가축 떼를 빨리 몰면 죽을지 모르니까 천천히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종 몇 사람을 머물게 합니다. 에서가 나쁜 사람입니까? 에서는 야곱 때문에 나쁜 사람으로 몰린 사람입니다. 억울한 사람이지요.



야곱은 이제 형의 분노에서 벗어나 세겜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살게 되었습니다(창 34:1).
라헬에게서 낳은 어린 딸 디나가 친구를 사귀겠다고 팔딱 팔딱 뛰면서 새로운 동네에 이사왔겠다 구경을 간 것입니다. 디나는 눈이 크고 초롱초롱하며 얼굴은 작고 이쁘게 생겼습니다. 그 때에 세겜 땅을 자기네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 하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아들의 이름이 세겜입니다. 이 성의 이름도 세겜이구요. 그러니까 성주의 아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대게 이런 사람들은 그 성에서 무서울 것이 없는 그런 버릇없는 사내들입니다. 디나가 팔짝 팔짝 뛰면서 성으로 들어오는데 그만 마음을 빼앗겨 세겜이 디나를 강간을 했습니다.
고대에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시집을 가버리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하몰이 딸을 달라고 그리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다 들어주겠다고 야곱에게 제안을 했습니다(창 34:12). 야곱은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하면서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으면 디나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창 34:18) 즉시 할례를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아직 야곱을 잘 모르나 봅니다. 야곱이 누굽니까? 속이는 자 아닙니까? 그래서 할례 받은 지 3일이 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쳐들어가 하몰과 그 아들 세겜과 그 성 사람 남자들을 다 죽이고 디나를 데려옵니다.

이제 여기도 살 곳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야곱이 다른 곳으로 가려고 길을 떠납니다. 베들레헴쯤 갔는데 라헬에게 산통이 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하도 아프고 힘들어서 라헬이 '베노니'(슬픔의 아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라헬이 마지막으로 베냐민을 낳고 베들레헴 거리에서 죽습니다(창 35:19).
야곱이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치고 이제 여기서 살아볼까 하는데 아버지가 나갔다 왔는데 큰아들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한 것입니다. 빌하는 단과 납달리의 어머니입니다.

우리는 여기쯤에서 한가지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해서 얻었다는 축복 말입니다. 도대체 그 축복이 어떻게 된 축복인데 딸 디나는 강간을 당하고 큰아들 르우벤은 어머니와 같은 사람하고 자고 도대체 이게 무슨 축복입니까? 야곱은 아직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습니다. 야곱은 결국 그의 아버지가 살던 가나안 땅에 살게됩니다.

이 때 요셉의 나이가 17세입니다(창 37:2). 야곱은 요셉을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그를 더 사랑하여 채색 옷을 입혔다고 했습니다(창 37:3). 그러나 사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야곱이 처음 사랑한 여인이 라헬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어렵게 난 아들이 요셉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동생 베냐민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직 베냐민이 태어나기 전에 세겜 땅에 살 때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라헬에게서 낳은 자식은 요셉 하나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더 사랑스럽지만 다른 형제들이 볼 때는 지나친 것입니다. 그리고 얼굴을 이쁘장하게 생겨 가지고 채색 옷만 입고 다니고 정말 꼴불견입니다.
거기다 심심하면 무슨 꿈을 꿨다고 하면서 형들의 곡식 단이 자기 곡식 단을 보고 절을 한다는 둥,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 절을 한다고 떠들어대는 데 더 이상은 참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놈에 새끼 이제 죽여버려야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형들이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야곱이 자식들 교육을 어떻게 한 겁니까? 아무리 시기하지만 동생을 죽일 생각을 다하게 하다니요. 그러니까 야곱은 속고 속이는 통에 자식이 다 망가진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세겜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 날도 색동옷을 입었습니다. 도시락을 싸 가지고 양치는 형들에게 갔다주겠다고 헤브론 골짜기에서 세겜으로 그리고 도단까지 가서 형들을 만납니다. 형들이 멀리서 보니까 저쪽에서 요셉이 색동옷을 입고 나타난 것입니다. 저놈의 새끼 오늘 여기서 죽이자! 그러면서 야! 저기 꿈꾸는 녀석이 온다. 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색동옷에 염소 피를 묻히고 사나운 짐승이 찢어 죽였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고 있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이 죽이지는 말자. 죽여서 좋을게 뭐있냐! 그러는데 유다가 용돈도 궁색한데 차라리 팔아 넘기자. 그러니까 형제들이 굳 아이디어! 그러면서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대상(카라반)들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아버지에게 이 옷이 요셉의 옷입니까? 그래 맡다 분명히 요셉의 옷이다. 그런데 요셉은? 이 옷만 있었습니다. 악한 짐승이 요셉을 찢었도다 하면서 야곱이 웁니다. 어느 정도 우느냐하면 "차라리 내가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창 37:35)그러면서 슬퍼합니다. 이삭이 제단에 올라갈 정도로 순종한 것하고는 야곱의 아들들의 행동은 완전히 다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야곱에게 임한 것이 축복입니까?
딸 디나는 강간을 당하고, 큰아들 르우벤은 어머니와 같은 사람하고 잠자리를 같이하여 창피해서 말도 못하고, 사랑하던 아들 요셉은 죽고(?), 유다는 집을 뛰쳐나가 자기 멋대로 장가를 가더니 몹쓸 짓은 혼자 다하고 다니고 무슨 인생이 이렇습니까?

한편, 하나님의 역사는 참 신기합니다. 버린 자식인줄만 알았던, 형들이 팔아먹은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창 39장).
요셉은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습니다. 보디발이 보니까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는 일마다 복을 받는 겁니다.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창 39:6)고 합니다. 요셉은 총각인데다가 키가 크고 잘 생겼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 눈짓을 하며 동침하자고 유혹을 합니다.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창 39:10)고 했습니다. 떠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의 형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결국 이 여인의 모함으로 왕궁 죄인들이 갇히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고 그는 그 꿈대로 풀려나 바로 곁으로 가게 됩니다.
바로도 꿈을 꾸었는데 도무지 알 수도 없고 해서 애굽에서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다 불러 물어보았지만 알지 못하는 겁니다(창 41:8). 그때 곁에 있던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 있는 요셉이 생각났습니다. 요셉을 불러들여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게 했습니다. 꿈의 내용은 7년 풍년에 7년 흉년이 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7년 풍년일 때 곡식을 잘 비축해 놓고 7년 흉년을 대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창 41:40) 그래서 요셉이 30대에 애굽의 젊은 총리가 되었습니다.

애굽 땅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근방 온 나라 사람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사기 위해서 몰려들었습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창 42:2)라고 했습니다. 앉아서 죽을 수 없고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오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형 10명이 애굽에 양식을 사러 갑니다. 야곱이 막내 아들 라헬이 죽으면서 난 아들 베냐민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혹 그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이 지금 요셉 대신 누구를 껴안고 있는 겁니까? 베냐민입니다. 요셉과 베냐민만 어머니 라헬이 같은 겁니다.

곡식을 사러 왔다고 와서 무릎을 꿇는데 요셉이 보니까 자기 형들입니다(창 41:6). 아마 10명의 형들은 애굽의 총리인 요셉을 고개 들고 쳐다보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어려서 팔려가 애굽에서 잘 먹고 살이 찌고 그러니까 당연히 못 알아보고, 요셉은 형들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의 얼굴은 잘 안 변합니다. 그러나 못 먹고 먼길을 온 형들의 모습은 피골이 상접해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바로의 총애를 받았고 고관인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흉년이 들기 전에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장자가 므낫세인데 이름의 뜻이 '잊어버리다'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형들이 자신을 팔아먹은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을 잊으며 살기 위해서 큰아들 이름을 므낫세(잊어버림)으로 지은 것입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창 41:51)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눈앞에 형들이 곡식을 사겠다고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엎드려 있습니다.
요셉이 너희는 가나안 땅의 정탐꾼들이다. 간첩이 분명하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아버지의 형제 12명으로 하나는 아버지와 함께 집에 있고 하나는 없어졌고 자기들 10명이 왔다는 겁니다. 요셉이 간첩인 것 같으니까 감옥에 쳐 넣으라 하고 3일을 가두었습니다. 3일이 지나서 꺼내어 그러면 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가서 막내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막내를 데라고 온다면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창 42:20).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죄를 지어서 이렇게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 그러면서 르우벤이 거봐 그 때 내가 그러지 말자고 했잖아, 죽이지는 말자고 했잖아 그러면서 떠들고 있는데 중간에 통역을 세웠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떠듭니다. 중간에 통역이 있었지만 요셉은 다 알아듣고 있었습니다.
그럼 하나만 여기에 남아있고 9명이 떠나가서 막내를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둘째)이 결박당하여 옥에 갇히고 나머지가 길을 떠납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곡물을 채워 넣고 돈 자루도 그대로 넣어두라고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보니까 돈이 그대로 나오는 겁니다. 돈도 주지 않고 곡물을 가지고 온 꼴이 되었으니 큰일입니다. 거기다 둘째 시므온이 결박당해 있는데 어찌 이런 일이... 하면서 갑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돌아온 형제들은 애굽에서 사건을 모두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막내 베냐민를 데리고 가야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보니까 이놈들이 시므온을 팔아서 곡식을 사온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한다고 합니다. 야곱에게 이제 막내 베냐민은 네 이놈들 내가 그럴 줄 알고 처음에 베냐민을 보내지 않았는데 이제 베냐민까지 팔아서 사느니 죽는 게 났지 하면서 죽어도 못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그 때 유다가 아버지 이제 그만 고집을 버리시지요. 우리가 다 여기 앉아서 죽느니 애굽에 가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럽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 42:36).
이 때 르우벤이 모처럼 장남 노릇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무리 아버지 밑에서 거짓말이나 하면서 자랐지만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는 것이지요. 이렇게 인생을 살아서는 안되겠다. 아마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을 죽일 때도 그 때 내가 완강하게 했어야 하는데... 하면서 이번에는 향 노릇을 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창 42:37). 반드시 두 아들 모두를 데리고 오겠다고 하면서 만일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식을 죽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가서 죽어도 두 동생은 데리고 오겠다고 하지만 못 믿는 겁니다. 자기는 속이고 축복도 가로챘는데 누구를 믿습니까? 그러나 앉아서 다같이 굶어 죽느니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하는 수 없이 베냐민을 내어줍니다. 그러면서 만일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스올로 내려가겠다고 하면서 아들들에게 내 얼굴을 다시 볼 생각은 마라고 난리를 떱니다.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창 43:15) 요셉은 자기 집에서 잔치를 준비하라고 일러둡니다. 그리고 형들의 나이대로 돌아가며 앉게 합니다. 그리고 11번째 비워 놓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자기 동생 베냐민을 앉힙니다. 베냐민은 라헬이 낳은 어머니가 같은 유일한 친동생입니다. 요셉이 올 정오시간까지 기다리다가 요셉이 들어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냐고 물어봅니다. 우리 아버지는 아직까지 살아 계시고 우리 중에 하나라도 가지 못한다면 아마 죽으신다고 난리를 떨겁니다. 그러다 잔치자리에 요셉이 자기 자리 11번째에 가서 앉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만 요셉이 동생 베냐민을 보는 순간에 마음이 복받쳐 울음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갑니다. 거기서 엉엉 웁니다. 그 소리가 바로의 왕궁에까지 들렸습니다. 바로가 아니 총리가 왜 저렇게 우냐고 가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베냐민 옆에 가서 앉아서 다섯 배나 먹을 것을 많이 주면서 속으로 동생에게 '짜샤 많이 먹어' 그러면서 정을 느낍니다.

가는 길에 곡식자루에 곡식과 돈을 그대로 다 싫어주고 은잔을 베냐민의 보따리에 숨겨 넣으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막내 베냐민을 사랑하여 옆에 두고 있을 요량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루를 풀어서 은잔이 나오면 그 사람은 애굽의 종이 되리라 한 것입니다. 형제들이 길을 떠나는데 바로의 군대가 쫓아옵니다. 그러면 그렇지 뭐가 이상해. 우리를 그냥 보내는 게 찜찜해. 그러면서 길을 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의 군대가 뒤따라와서 은잔이 없어졌는데 너희 짐 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은잔이 나오면 애굽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럴 리가 있냐고 하면서 형들부터 자루를 하나 하나 다 풀어봅니다. 11명 다 풀었습니다. 형들은 확신합니다. 베냐민은 자기들하고 달라서 곱게곱게 컸잖아요. 요셉처럼 베냐민을 위했기 때문에 형들도 다 안심하고 있는데 그만 마지막 베냐민의 보따리를 푸는데 거기서 뚝 떨어지는 겁니다. 형들은 일제히 주저앉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르우벤은 거봐 우리가 요셉을 살렸어야 하는데... 죄 값을 받는 거야... 하면서 있는데 유다가 말합니다. 이제 여기서는 죽어도 된다 아마 그런 생각을 했나 봅니다. 유다는 에서와 같은 기질의 사람입니다. 호탕합니다. 유다가 많은 죄를 지었지만 족보는 유다로 이어집니다. 자기가 책임을 져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아버지가 죽습니다, 아버지가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하시는 것을 우리가 억지로 데리고 왔는데 우리가 그냥 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창 44:30) 아버지가 죽습니다. 그러면서 배 다른 형들이 서로 죽겠다고 나오는 겁니다. 요셉은 사실 형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판 형들을 믿지 못하고 있었고 막내 베냐민만 가까이 두고 있으려고 했는데 형들이 이렇게 나오니까 요셉이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다 나가라 그럽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우니까 그 소리가 바로의 궁에 들렸습니다. 바로가 '야 요세 총리가 왜 자꾸 우냐!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 그럽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내가 형들이 판 아우 요셉입니다. 형들은 놀라서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그럽니다.

아직 5년이나 흉년이 더 있어야 하는데 야곱을 모셔 오라 합니다. 그리고 바로가 타는 왕궁마차를 보내 야곱을 모셔옵니다. 이 때 야곱과 함께 모든 가족이 다 애굽 고센 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창 46:8-27). 야곱은 이후 애굽에서 17년을 더 삶니다. 이 때의 야곱의 삶은 신령한 삶을 삽니다. 이제 아무 욕심이 없습니다. 예전에 거짓말하고 아등바등하며 살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마음껏 자식들을 축복하면서 생애를 마감합니다. 야곱의 생애는 그의 말대로 험난한 사람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축복은 육신의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축복이란 죄인이 받는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축복이었습니다.

창세기는 아담으로부터 요셉까지 2300년의 역사를 기록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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