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처음으로 | 기사입력 | 리포터(선교기자) 가입 | KCM 홈
 
   특별호 12호 바이블 웨이 [05-08]
   제375호 [05-07]
   제374호 [10-30]
속보(긴급기도제목)
선교현장
선교소식
 행사, 세미나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사람들
 선교정보
 선교학(역사,인물)
 의료/건강
 훈련, 모집
선교단체
푸른섬선교정보
AFMI
교계, 문화
오피니언
목회, 신학
청년, 대학생
기획, 특집
포토/동영상
해외한인교회
선교학자료
해외일반
한국일반
주앙교회
미션매거진을 만드는 사람들...
facebook 미션매거진 편집회의
섹션 선교소식 > 선교정보 등록일 2011-07-09
작성자 관리자 (admin)
선교지에서의 신학교육을 위한 제언2
안점식 교수
2. 신학의 생산과 신학자 양성


(1) 현지 교회가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신학적 대답

신학교의 목적 중 하나는 교회가 필요로 하는 신학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신학은 성경에 대한 인간의 해석과 이해를 조직하고 체계화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지만 신학에는 오류 발생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신학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작업이라기보다는 해석학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안에서 성령의 교제의 산물이 되어야 한다.

신학이 인간의 해석과 이해라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으로부터 제기되는 질문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초대 교회에서도 전도자와 함께 변증가들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복음이 헬라 문화 속으로 들어갔을 때 유대 문화에서와는 다른 문제들이 제기되었고, 거기에 대해서 헬라적 개념이나 범주 등으로 복음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상황화는 복음의 변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선교지에서 제기되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 선교변증론(missional apologetics)1)인데 이는 상황화와 함께 갈 수밖에 없다.

선교는 진공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선교지에는 항상 문화가 있다. 선교 사역은 본질상 초문화적(cross-cultural) 사역이다. 폴 히버트(Paul Hiebert)는 문화를 “관념과 감정과 가치의 통합된 체계 및 이와 연관된 행위의 형태와 그들이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는 것을 조직하고 규칙화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의하여 공유된 산물”로 정의하고 있다.2) 그러므로 복음이 문화를 넘어서 전해지면 복음과 문화의 조우(encounter)가 일어나고 새로운 질문들이 제기된다. 이를테면 인도인들은 인과업보, 윤회, 카스트 제도, 요가, 탄트리즘 등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질문할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은 가난, 질병, 전쟁, 일부다처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질문할 것이다. 중국인들은 기(氣), 음양(陰陽), 조상숭배, 풍수지리, 사주팔자 등의 타당성에 대해서 질문할 것이다. 한국인들에게는 통일, 경제 정의, 토지의 문제 등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질문들이 제기되고 이에 대한 성경적 대답들을 찾는 과정을 통해서 성경의 계시는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하고, 인간의 삶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서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지만, 질문이 던져졌기 때문에 더 풍성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3)

선교지에서의 신학 작업은 기독교적 전통, 즉 사도적 전통에 대한 탐구 뿐 아니라, 또한 문화와 상황이 제기하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적 해답을 탐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서구적 상황에서 제기된 질문에 따라 형성된 서구 신학을 선교지에서도 답습해서 담론화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교회의 요구보다는 신학자들끼리의 담론 차원에서 행해지는 상아탑 신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는 상아탑 신학과 엘리트주의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상아탑 신학이 전문 직업인의 길을 걸으며 자신을 교회보다는 학계에 대답을 제시하는 존재로 간주하게 된 것”이 오늘날 신학이 “통렬한 비판의 대상이 된 이유”라고 갈파하고 있다.4) 선교지에서의 신학의 생산이라고 할 때, 그것은 신학적 엘리트주의를 탈피하고 교회의 현장으로 시선을 맞추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신학함(doing theology)에 대해서 도전해주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신학의 본질과 신학자의 자질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맥그라스에 의하면, “신학은 교회의 종이다. 복음주의는 신학을 교회 전반의 삶과는 동떨어진 전문화된 분야로 보기보다 더욱 커다란 체계 속의 한 부분으로 파악하고 있다. 신학자는 공동체보다 높은 곳에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예배와 기도, 찬양과 복음 전도의 삶에 깊이 참여하는 자인 것이다.”5)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맑스주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제시한 “전통적 지식인"(traditional intellectual)과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이라는 두 가지 유형의 지식인이라는 아이디어를 차용해서 전통적 신학자와 유기적 신학자의 개념을 제시한다. 맥그라스에 따르면 “한 사람의 유기적 신학자는 행동가이며, 대중에게 무엇인가 널리 퍼뜨리는 사람이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체계를 뒷받침하고 세우며, 공동체 바깥에서는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변증하는 것이 바로 유기적 신학자의 과업이다.”6) 선교지에서 양성해야 할 신학자는 바로 이런 유기적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선교지에서 신학의 생산이라고 할 때, 그것은 또한 아더 홈즈(Arthor Holmes)가 제시한 바와 같이 “세계관적 신학”(worldviewish theology)을 형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이 또한 일상생활의 신학이 되고, 하나님의 영역주권이 구현되는 방식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아더 홈즈에 의하면 “세계관적 신학은 세계관에 대해 말하고, 세계관 안에서 특정한 문제를 다룬다. 세계관적 신학은 예를 들어서 창조의 교리가 삶과 도덕적 가치의 객관적 근거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를 묻는다. 또 인간 본성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심미학과 문학비평 이론과 인격이론에 대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과 상업과 여가선용과 예술과 지각과 자연과 과학기술과 사회변동과 사회제도와 성(性)과 우정과 정치와 교육 등의 신학적 의미에 관심을 가진다.” 이렇게 신학은 “세계관이 마땅히 포괄해야 하는 다양한 사상과 생활영역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7)

(2) 자기 신학화(self-theologizing)의 필요성

문화가 달라지면 복음을 이해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concept), 범주(category), 논리(logic) 등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으로 복음을 이해하게 된다. 앤드류 월스(Andrew Walls)는 복음이 문화를 넘어서 어떤 지역에 들어갔을 때 복음의 본질은 유지되면서 동시에 문화적 개념들과 범주들에 의해서 복음 이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말한다.8) 데이빗 보쉬(David Bosch)도 유대적 복음이 헬라 세계에 들어갔을 때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언급한다. 어떻게 헬라적 개념과 범주, 논리가 복음을 이해하는데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 보여준다.9) 데이빗 헤셀그레이브(David Hesselgrave)는 서구인들의 개념적(conceptual), 요청적(postulational) 사고방식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헬라적 논리가 어떻게 서구 신학에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10)

폴 히버트(Paul Hiebert)는 토착 교회의 원리로서 3자(三自; three self)에 덧붙여서 네 번째 원리로서 자기 신학화(self-theologizing)를 제안한다.11) 선교지에서의 신학교육에는 단지 서구신학을 전수하고 이식하는 것을 넘어서 현지인의 자기 신학화(self-theologizing)가 권장되어야 한다.

물론 문화와 상황화라는 개념조차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는 신학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상황화를 자유주의 신학의 개념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상황화라는 개념만 나와도 의심하는 눈초리로 보면서 경계한다. 물론 상황화라는 개념의 역사와 현재까지 나타난 상황화, 혹은 토착화 신학을 살펴보면 이러한 우려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상황화의 개념이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쇼키 코(Shoki Coe)에 의해서 먼저 시작되었고12), 또 여러 가지 혼합주의적인 상황화 신학들이 나타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 카토(Byang Kato)가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 국제대회에서 “상황화”라는 용어를 복음주의 입장에서 새롭게 소개한 이래로 이 용어는 정착되었다.13)

데이빗 헤셀그레이브(David Hesselgrave)는 신학적 성향에 따라 상황화에 대한 이해도 달라짐을 지적한다. 상황화는 자유주의의 급진적, 혼합적 상황화(syncretistic contextualization)나 신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 방식의 선지자적 상황화(prophetic contextualization) 외에도 정통주의의 사도적 상황화(apostolic contextualization)도 있다.14)

복음주의 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계몽주의적, 모더니즘적 인식론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인식론은 스코틀랜드 상식주의에 잘 나타난다.15) 그들은 인간의 이성은 문화, 시대와 인종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것으로서, 오류 없이 객관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바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든 못하든, 이성, 혹은 자율적 자아에 대한 데카르트적 맹신을 나타내는 것이고, 계몽주의적 모더니즘적 인식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16)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능력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제한되고 왜곡된 기능을 하게 되었다.17)

반면에 문화와 상황화에 대해서 거의 부담 없이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혼합주의에 빠지게 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자유주의 진영의 상황화가 상황에 초점을 두고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활용하는 것이라면, 복음주의 진영의 상황화는 상황보다 복음에 초점을 두고,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높아지는 방식으로 문화의 옷을 적절히 입는 것이다.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도 복음주의 진영의 상황화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혼합주의와 구분해서 명료하게 서술해주고 있다. “근본적인 차이는 복음이 문화적 흐름과 상관관계를 갖느냐, 아니면 복음이 문화적 흐름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맥그라스에 의하면, 복음주의적 상황화에서는 "복음의 주제들은 상황화(contextualization)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복음이다. 상황화는 부차적인 것이며 일시적이다. 복음주의는 오랫동안 복음을 이런 식으로 상황화할 변증적 필요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복음을 문화적 흐름 속에 이식하려는 자유주의적 전략과는 대조된다.”18)

데이빗 웰스는 복음주의 신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논한다.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하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시대에 자연스러운 개념으로 덧입히는 일이 신학의 과제다. 성경은 신학의 출발점(terminus a quo)으로 그 초문화적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탈상황화되어야(de-contextualization) 한다. 또한 그 내용이 우리 시대의 인지적 전제와 사회적 유형들과 맞물릴 수 있도록 재상황화되어야(re-contextualization) 한다.”19)

나아가서 성경적 상황화는 복음 선포를 위해서 단지 문화를 활용하는 것을 넘어서, 비성경적으로 왜곡된 문화를 변혁시킨다. 예를 들어서 아랍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라로 번역했을 때, 이것은 단지 아랍문화를 활용한 것을 넘어서, 알라를 올바로 믿는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의 아들로,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알라에 대한 인식에 변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화에는 기존의 개념에 새로운 성경적 의미를 투여하고자 하는 언어의 싸움이 있다.

동시에 복음주의 진영의 상황화는 긴장과 균형을 가져야 한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상황화는 혼합주의로 전락할 위험성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약성경이 로고스(logos)나 프뉴마(pneuma) 같은 헬라 철학적 개념들을 사용했을 때, 만일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면 대단한 혼합주의를 가져올 수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다른 종교의 세계관에 의해서 활용된 개념이나 범주가 상황화를 위해 사용될 때에는 혼합주의의 위험성을 더욱 커지고, 그 개념의 세탁비용은 더욱 커질 것이다.

(3)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교육의 필요성

문화에 대한 이해는 선교사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에게도 절실한 것이다. 문화라는 용어만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개념도 흔치 않을 것이다. 문화의 개념에 대한 적지 않은 혼란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문화 자체를 배척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문화명령(창1:26-28)으로부터 시작한다. 앤디 크라우치(Andy Crouch)가 언급한대로 복음은 문화적이다. 십자가도 문화적이다. 새예루살렘도 문화적이며 문화의 완성이다.20) 하나님 나라도 무미건조한 어떤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다. 다스림은 문화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문화명령은 타락 전에 주어진 것이고, 만일 타락 사건이 없었을지라도 문화는 발생했을 것이다. 다만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원치 않는 문화가 세상에 형성된 것이다. 여전히 일반은총적인 것이 있지만, 타락 후 인간의 문화는 죄성과 반역성, 사단의 역사와 영향력을 함께 갖게 되었다.

복음과 문화의 긴장은 사실상 천국문화(하나님 왕국)와 세상문화(이 세상풍속, 이 세대)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단순히 복음과 문화의 긴장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문화 자체가 부정적인 것처럼 왜곡되게 전달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또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문화는 타락 후에 발생한 문화이기 때문에 복음과 문화 사이에는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화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문화명령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옳지 않다.

여기서 복음과 문화, 복음과 상황 사이의 긴장에 대해서 좀 더 부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진공상태에 태어나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문화 속에서 태어나서 자란다. 선교 사역이 이루어지는 곳도 진공상태가 아니라 문화가 있는 어떤 곳이다. 따라서 복음은 문화의 옷을 전혀 입지 않을 수 없다. 의도하든 않든, 복음이 문화를 넘어서 어떤 지역에 들어가면 문화의 옷을 입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적어도 그 문화의 개념으로 성경은 번역되어지고, 그 문화의 범주, 논리 등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작동한다. 성경 그 자체도 어떤 문화 안에서 기록된 것이다. 즉 히브리, 헬라 문화 안에서 그 문화의 개념, 범주들을 사용해서 기록된 것이다.

복음주의 진영의 상황화는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는 방식으로 문화의 옷을 입는 것이다. 복음의 본질을 훼손할 정도로 문화에 의해서 복음이 잠식되었을 때 혼합주의가 된다. 그러나 상황화는 혼합주의와 구별되어야 한다. 혼합주의는 세상문화에 영합하고, 동화되고, 세상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복음의 본질이 훼손된 것이다. 그러나 복음이 혼합주의를 피하기 위해서 문화의 옷을 입지 않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우리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복음도 이미 문화적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복음이 문화의 옷을 전혀 입지 않는다면 복음은 외래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수용력이 약해질 것이다. 혼합주의는 비성경적인 세상 문화, 즉 이 세상의 풍속이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형태로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21)

그렇다면 문화와 시대와 인종을 초월해서 결코 달라질 수 없는 복음의 본질은 있는가? 만일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포스트모던 인식론을 따라서 상대주의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에 입각한다면, 문화와 시대와 인종을 초월해서 인식하고 공유할 수 있는 복음의 본질은 명백히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국제적 해석학적 공동체(international hermeneutic community)에서 합의된 정통교리이다. 그것은 최소한 성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인성과 신성 등에 관한 정통교리이다.22)

복음이 문화 안에서 그들의 개념, 범주, 논리, 세계관으로 이해될 때 혼합주의가 발생할 위험성도 있다. 그러나 올바른 성경적 상황화는 복음에 대한 이해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며 문화를 구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적 상황화는 단순히 문화를 활용하는 것 뿐 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문화변혁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하나님의 칭호는 한국 문화를 활용했을 뿐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함으로써 한국 문화를 구속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폴 히버트(Paul Hiebert)의 주장대로 올바른 상황화는 전통 문화를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변혁적 사역(transformative ministries)것이기 때문이다.23) 예를 들어서, 추도예배는 한국의 제사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해서 문화변혁을 일으키는 것이다.

복음이 올바로 상황화 되어졌을 때 하나님의 계시는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로 말미암아 어떠한 문화권에서의 개념과 논리와 범주도 하나님의 계시를 전적으로 온전히 이해하게 하지는 못한다. 어떤 문화는 다른 문화가 인식할 수 없었던 면을 인식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문화에서는 저지르지 않는 혼합주의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4) 지역신학과 범세계적 신학의 균형에 관한 강조

선교지의 신학 교육에서 자기신학화, 혹은 신학의 상황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에서 말하는 자기신학화, 혹은 신학의 상황화의 결과인 지역 신학(local theology)들은 복음의 본질과 정통교리를 훼손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상황화 신학, 아시아 신학, 한국 신학 등의 개념만 나와도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의구심의 눈으로 경계한다. 이러한 태도가 왜 형성되었는지는 한편 이해가 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행해진 토착화 신학, 상황화 신학들은 종종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혼합주의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의 상황화가 항상 필연적으로 혼합주의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 안에서도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상황화는 일어났다.24) 신약성경도 헬라적 개념들을 동원해서 복음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은 혼합주의로 흘러가지 않았는데, 그것은 상황화가 성령의 주도하심에 의해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서구 신학도 서구의 문화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서구적 개념과 범주, 논리, 사유방식이 복음의 이해와 해석에 작동한다. 또 한편으로 서구적 편견과 선호도가 성경해석에 개입될 소지가 있다. 한국 신학, 중국 신학, 서구 신학 등은 문화적 국수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드러내고 높여야 할 것은 어떤 특정 지역의 문화가 아니라 복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제한되고 왜곡된 인식 능력 때문에 어떤 문화에서도 성경의 계시를 오류 없이 전적으로 온전하게 이해하고 해석한다고 할 수 없다. 성경 계시에 대해서 서구인들은 한국인보다 잘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서구적 오류가 혼합될 수 있다. 한국인들이 서구인보다 잘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서구인이 범하지 않는 오류가 혼합될 수 있다. 그러므로 폴 히버트(Paul Hiebert)의 말대로 국제적 해석학적 공동체(international hermeneutic community)인 범세계적 교회 앞에 이러한 지역 신학들은 서로 검증되고, 격려되고, 배워져야 한다.25) 그렇게 함으로써 보편적인 신학(universal theology), 범세계적 신학(global theology)은 계몽주의 인식론에서처럼 보편적 이성에 입각해서 연역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범세계적 교회 안에서 성령의 교통을 통해서 귀납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문화와 시대를 초월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 해석을 온전히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계몽주의 사상일 뿐이다. 이런 인식론적 전제는 어떤 특정한 문화의 관점과 해석, 문제 제기를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문화 제국주의적 행태를 나타낼 뿐이다.

성경해석에서 개혁주의의 원리는 계시의존적 사색이다. 그러나 계시의존적이라는 개념에도 어떤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 즉 신학의 기초는 오직 성경이어야 하며 인간의 전통, 이성, 경험 등에 따른 자율적 사색이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석학의 문제는 남는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해석학의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며 상황화의 문제도 여전히 남는다.26) 한편, 비록 인간의 타락으로 인식 능력이 전락되고, 그 결과 인간이 제한되고 왜곡된 인식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복음의 본질까지 모호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문화가 다르다 해도 복음의 본질은 명확한 것이다. 이 복음의 본질은 국제적 해석학적 공동체인 종교회의, 적어도 니케아,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다. 정통교리는 단지 인간의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국제적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성령 교제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모든 해석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모더니즘 인식론에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던 인식론으로 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다양성(diversity)은 인정하되 다원주의(pluralism), 상대주의(relativism)로 가는 것은 아니다. 신학의 상황화에서 인식론적으로 전제되는 것은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이다. 모더니즘 인식론이 단순한 실재론(naive realism)이며, 포스트모던 인식론이 관념론(idealism)이라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인식론적 최선은 비판적 실재론에 입각하는 것이다. 비판적 실재론은 실재(reality)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실재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말씀은 실재(reality)가 있다. 모더니즘 인식론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으로 문화와 시대를 초월해서 그 실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스터모던 인식론은 모든 것은 문화와 시대의 상황에 의해서 해석되어진 것으로 본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지양(止揚; aufheben)해야 한다.27)

서구 신학, 한국 신학, 중국 신학 등 지역 신학은 그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상황화의 일환이다. 동시에, 지역 신학은 범세계적 교회를 향해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복음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연합의 노력이며, 성령의 교제의 산물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 신학은 한국적인 것보다 성경적인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며, 중국 신학도 중국적인 것보다 성경적인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서구 신학도 서구적인 것보다 성경적인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지역의 상황화 신학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범세계적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 보완하고 견제하면서 온전한 성경적 계시를 드러내는데 자기의 역할을 해야 한다.28)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이다. 몸의 지체들은 서로 의존하는 것이지 독립적인(independent) 것이 아니다.29) 그런 면에서 오늘날 토착화의 원리, 소위 삼자(三自) 원리에 대한 비판이 있어왔다. 실제로 선교 역사를 통해서 헨리 벤(Henry Venn), 루푸스 앤더슨(Rufus Anderson), 존 네비우스(John Nevius) 등이 주장한 삼자원리는 선교지 현지 교회들이 의존심을 버리고 복음사역의 주체 의식을 갖도록 한 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지나치게 자립의 원리를 강조했을 때 현지 교회가 올바로 서기도 전에 선교사들이 지원을 중지하거나 리더쉽 이양을 했기 때문에 교회가 약해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30)

어떤 지체가 스스로 자기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어떤 다른 지체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몸의 지체들은 유기적으로 상호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상호의존하면서 전체 몸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지역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신학의 지역성, 신학의 상황화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국제적 해석학적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기독교 전통도 중요하다. 지역 신학들은 지역 신학 상호간의 견제, 격려, 통찰력 제공도 중요하지만, 기독교 전통 및 서구 신학과도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물론 여기서 기독교 전통과 서구 신학은 구분되어야 한다. 기독교 전통은 국제적 해석학적 공동체 내에서 형성된 정통교리라면 서구 신학은 서구의 문화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서구적 개념과 범주와 논리로 대답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필자는 선교지에서의 신학 교육에 있어서 서구 교회와 한국 교회가 해온 신학 교육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선교지에 이식하거나 도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21세기 선교는 계몽주의 모델을 탈피하고 내부자 중심 모델로 돌아서서 현지인이 선교의 주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선교지에서의 신학교 사역에서 현지 교회와의 연계성은 매우 중요하다. 선교지에서의 신학교 사역은 헬라적 진리관과 학문관을 과감히 탈피하고, 이론과 실천, 그리고 신학과 영성과 사역이 통합되는 전인적인 방식으로 교육과 훈련이 이루어지도록 창의적 시도를 해야 한다. 선교지에서의 신학교 사역은 신학과 교회, 신학과 사역 현장이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선교지에서는 현지 교회와 사역자, 현지인들이 제기하는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는 선교변증론(missional apologetics)과, 현지인들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하는 자기 신학화(self-theologizing)가 절실히 필요하다. 선교지에서의 신학 교육에서는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역 신학과 범세계적 보편 신학 사이에 균형도 필요하다. 교육의 방식에서도 서구적 표준과 서구적 방식에 집착하지 말고 진리를 체득할 수 있도록 하는 창의적인 훈련 방식들을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출처 : 바울선교회지 131호 2011년 7~8월호
프린트 메일보내기
관리자 모드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