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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목회, 신학 > 설교 등록일 2011-04-08
작성자 관리자 (admin)
십자가 승리
요 16:32-33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은 A.D 90년경에 기록된 책입니다. 복음서 중에는 제일 나중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미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빠진 부분들을 면밀히 기록해 나가는 세밀함을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최초의 이적사건인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나드셨던 사건을 유일하게 기록합니다. 이런 기적 사건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요한의 관심은 이 땅에서 베푸신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이 기적 사건을 기록하는 것에도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의 총 주제라 할 수 있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고 했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하는 목적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목적도 모두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어 구원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은 18장부터 21장까지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부활하시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고난을 받는 기사가 나오기 전에 13장부터 16장까지 3장에 걸쳐 예수님의 설교가 나옵니다. 사실 예수님이 병 고치고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다 뒤로하고 요한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기 전에 하신 설교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신 장면을 17장에 기록하고 18장부터 고난사건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건이 기록됩니다. 오늘 본문은 사건이 아닌 설교입니다. 그런데도 이 부분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은 그 마지막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 무엇이 달라지냐, 역사의식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고 역사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냥 사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위치가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의 설교 마지막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설교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인데 십자가를 보는 사람은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 종류의 사람은 멸망하는 자들이고, 다른 한 가지는 구원 얻는 자들입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많지만 이 모든 사람을 간단히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멸망하는 사람들과 구원 얻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는 하나이지만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람 중 종류에 따라서 십자가에 대한 반영이 다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다르게 들립니다. 십자가가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옛날 로마에서 노예나 혹은 식민지 백성을 극형에 처할 때 쓰던 아주 처참한 형구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십자가는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무서운 사형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천한 사람들만 못 박히는 처형 대에서 처형을 받은 어떤 사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니 미련하게 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로마 사람들을 위시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미련하게 들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십자가를 통한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너무 단순하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는데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니 너무 단순하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구원 얻는 것이 그렇게 단순할 수가 없다고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깊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에는 무슨 철학이 없다고 합니다. 옛날 철학을 많이 숭상하던 헬라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아주 미련하게 들렸습니다. 자기가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해서 도가 높아지고 덕이 부해져서(道高德副) 내가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타당하지만, 어떤 진리를 믿어서, 구체적으로 말해서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 얻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한 것을 비웃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크리스챤이 누구입니까? 도대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뭡니까? 크리스챤이라는 것은 바로 십자가 이해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어떤 측면에서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속성이 결정됩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 것은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아주 처참한 죄인에 대한 처형 방법입니다. 아주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인류역사상의 가장 비참하고, 가장 부끄럽고,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안에 무궁무진한 비밀이 숨겨있습니다. 그 속에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엄청난 생명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원문의 “이기었노라”(nikavw:니카오)는 동사 완료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인데도 이미 승리한 것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신 게 아니라 승리하시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미 승리하신 것입니다. 승리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 나타난 신비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승리하셨다고 선포하신 확신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이 싸워보지도 않은 싸움에서 왜 이기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신 것입니까? 자만입니까?
오늘 본문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입니다. 아버지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함께 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승리하는 겁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고 했습니다. 사람이 힘을 합하는 것도 이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힘에는 당해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세는 홍해를 건너고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출 15:2)고 노래했습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라고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성경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외울 수 있으면 다 외워야 합니다. 여기 아버지라는 단어가 무려 39번나옵니다. 7장이 26절까지 있는데 39번이나 나옵니다. 아버지를 부르신 것입니다.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아버지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일러주신 것 가운데 제일 우리의 관심이 가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자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후사’입니다. 후사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를 자녀입니다.
바울은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롬 4:14)고 했습니다. 율법으로 후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후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롬 4:16)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정된 것이요, 십자가는 계획된 것이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미리 약속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성경책 전부입니다. 총 주제입니다. 이걸 모른다면 성경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많은 이적이 무엇을 말합니까? 병든 자를 고치고 귀머거리를 열게 하고 아,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와라”고 소리를 칩니다. 죽은 사람이 걸어 나옵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십자가에 죽었다 이 말입니다. 그걸 설명하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이게.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말없이 십자가를 집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것이 알 수가 없어서 “이 사람을 보라.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말없이 죽어 가느냐” 고 했습니다. 거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가 발견되는데 ‘기노스코’라는 단어입니다. 이 뜻은 ‘진리나 주인의 뜻을 알다’입니다(요 16:3, 눅 12:47, 48) ‘알아채다’(마 22:18, 눅 8:46)에 나옵니다, 학문적인 지식을 넘어서는 단어입니다. 구약에도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나옵니다. 이 단어도 마찬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 모두 남녀간의 ‘동침하다’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러잖아아요. 부부문제는 부부만 안다고요?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관계에서만 아시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십자가에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승리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사랑 자체도 설명하기 어렵지만 사랑의 소위 말하는 커뮤니케이션, 사랑을 전달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쉽게 사랑한다는 말했다가는 뺨맞아요. 안 그렇습니까? 이 사랑이 전달이 돼야겠는데 이 사랑의 뜨거운 마음을 전달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의 진실한 언어는 희생밖에 없는 거예요.

또 하나는 여러분, 이것은 의의 개시입니다. 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죄란 그저 흐지부지 용서할 수가 없는 거입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누가 당하든지 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처럼 흐지부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분명하게 밝혀서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으로 벌을 받아야 됩니다. 얼렁뚱땅 그냥 슬쩍슬쩍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확실합니다. 인간의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죽지 않고는 절대로 살리지 못하니까요. 그걸 아셔야 됩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승리입니다. 죽음을 넘어섭니다. 죽음을 초월합니다. 십자가는 생의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믿고 죽음의 세계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 십자가의 말씀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명의 길입니다. 칼 바르트 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그의 교회 교의학 속에서 “사람의 생의 단 한번의 기회”라고 하는 논문을 씁니다. 사람에게 많은 기회가 있는 것 같으나 가장 중요한 기회는 딱 하나 있어요. 단 한번의 기회. 그것은 바로 곧, 죽음이다. 그 기회를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프리카 케냐 최동훈 선교사님의 글입니다. 제가 미션매거진에 제목을 ‘먹고 마실 물만 있으면 행복한 것입니다.’로 올렸습니다.
저희가 사역하고 있는 문요야야 사람들은 일본에 지진이 난 것도 쓰나미가 덮쳐서 수만은 사람이 죽고 원전이 폭발해서 세상을 뒤흔들 정도로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으며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깊은 광야 벌판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귀를 기울 릴 필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안으며 그저 오늘의 양식만을 알라에게 구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실 물만 있으면 이들은 행복한 것입니다.
옥수수 한 개가 있으면 한끼를 먹는데 그것도 반으로 잘라서 또 한끼를 위해 남겨두면서도 이들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답니다. 이들이 예수만 믿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아무리 위대해도 내가 지고 따르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실패와 낙망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승리의 십자가를 당당하게 지고 예수를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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