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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학자료 > 논문 등록일 2011-03-24
작성자 관리자 (admin)
16세기 Anabaptist 운동에 관한 선교학적 평가
안희열 교수(선교학)
들어가는 말
안희열 교수(침신대 선교학)

한국교회가 지속적인 선교부흥을 이루기 위해 살펴봐야할 기독교 역사의 한 그룹이 있다면 Anabaptist 운동이다. 이 운동은 얼마 있으면 500주년을 맞이하게 되면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재침례교도들에 대한 평가는 학자들의 잘못된 이해와 편견으로 오랫동안 평가절하 되어져왔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츠빙글리, 불링거, 루터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부당한 비평에 대해 이스텝(William R. Estep) 박사는 “유럽 학자들의 무관심과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자료만을 취급하는 미국 역사가의 무성”이 빗어낸 결과라고 꼬집어 비판하였다.
재침례교도들이 역사가들 사이에서 멸시를 받아온 사실을 이들의 이름을 통해 먼저 알 수 있다. 이들은 스스로 사도 형제단으로 불리기를 원했지만 오히려 광신자, 신령주의자, 종교적인 자유사상가, 종교개혁의 서자 등으로도 불리어졌다. 이들이 무엇보다도 재침례교도들이라고 불리어 진 이유는 유아세례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자의 침례를 믿기에 유아세례 자체를 거절하였다. 정부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또 다른 새로운 분파를 형성하는 집단으로 여겼기 때문에 재침례교도들(Anabaptists 혹은 re-baptizers)라 불렀다. 설상가상으로 재침례교도들 가운데 있었던 몇 몇 광신자들은 무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다. 1533년에서 1535년에 뮌스터에서 일어났던 이 비극적인 사건은 Anabaptist 운동이 오랫동안 왜곡된 평가를 받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그렇다면 Anabaptist 운동의 정체성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는지가 문제이다. 본 연구자는 그 답변을 이들의 선교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재침례교도들은 선교에 있어서 종교개혁가들과는 달랐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후버마이어, 뎅크, 해츠, 그레벨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선교활동은 독일, 화란, 스위스 등지로 확산되었다. Anabaptist 운동의 핵심은 영적인 회심이지만 종교개혁가들은 교회의 풍습과 수정된 교리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다보니 개혁자들은 정치적 보호를 좋아했고, 재침례교도들은 아무런 시민의 보호 없이 활동을 하다가 가톨릭과 개신교도들에 의해 박해를 받게 되었고 한 지역에서만 사역하는 개혁가들과는 달리 늘 떠돌아다니면서 선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본 논문의 목적은 한국침례교회가 21세기 선교황금시기를 이루기 위해 Anabaptist 운동의 기원과 지도자들을 살펴보면서, 이들의 선교신학과 선교전략이 어떤 것인지 연구하고, Anabaptist 운동이 선교에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평가하면서 한국 침례교 선교의 바른 길잡이를 삼고자 함이다.

I. Anabaptist 운동의 기원

Anabaptist 운동의 실재 기원은 오랜 세월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여러 학자들이 재침례교도들의 기원에 대한 자료들을 제시하지만 이들의 모든 이야기를 밝힐 수 는 없다. 최근 들어 1525년과 1529년 사이 대부분 독일에서 활동하던 재침례교도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이 소개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Anabaptist 운동의 기원을 설명하는 두 가지 이론을 찾아볼 수 있는데 첫째로 재침례교도는 왈도파 운동으로 시작되었다는 이론이고, 두 번째로는 재침례교도가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는 이론이다.
첫 번째 이론으로 재침례교도들이 왈도파, 위클리프와 관련이 있다는 학설은 재침례교도들과 중세후기분파 간에 공통점이 있다는 학설이다.

몇 몇 학자들은 Devotio Moderna가 재침례교도들로 하여금 세상과 분리할 수 있는 비밀집회의 개념 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경건생활을 형성하는데 기초를 이루었다고 주장을 하였다. 재침례교도들 중에 몇 몇은 스스로가 영적으로 왈도파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급진주의자들과 중세 분파 간에 역사적인 고리가 발견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Anabaptist 운동은 14세기와 15세기에 왈덴파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지역에서 성장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로웬(Harry Loewen)은 왈도파가 재침례교도의 선구자였다는 이론을 역사적인 연속성으로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영적인 영속성을 설명하려는 그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진실한 교회는 사도시대 이후로부터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며 영적 고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 이론으로는 지난 세기 미국의 메노나이트 역사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이론으로 Anabaptist 운동이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는 학설이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스위스와 남부 독일 Anabaptist 운동의 기원을 종교개혁 당시 유아세례 교리로 인해 츠빙글리와 갈라서기 까지 그와 함께 일하던 그레벨(Conrad Grebel)과 취리히의 소그룹에서 근원을 찾고 있다.
다른 많은 학자들도 Anabaptist 운동의 기원에 관해 두 번째 이론에 동의하는 편이다. 맥도우(Malcolm McDow) 교수는 언급하기를 1523년 10월 츠빙글리의 제자 가운데 그레벨, 만츠, 스틈프는 츠빙글리의 리더십에 만족하지 못하며 갈라서게 되었다. “[츠빙글리의 제자들의] 이러한 각성은 츠빙글리가 미사를 폐지코자하는 변론을 강행하는데 실패하게 되자 이들은 다른 사항에 관해서도 츠빙글리와 갈라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 .분열이 있고 난 이후에 재침례교도 그룹이 형성되었다.” 1525년 1월 17일 취리히 변론에서 논쟁이 있은 후 재침례교도들과 츠빙글리 사이에 공식적이 결별이 일어났다. 며칠 후 1525년 1월 21일 스위스 형제단은 만츠의 집에 모였고 이 때 그레벨이 블라우록(George Blaurock)에게 침례를 행하였는데 이 사건이야말로 복음적 자유교회 운동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다.

재침례교도 역사가로 유명한 이스텝 박사 또한 이와 동일한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는 「재침례교도의 역사」에서 취리히에서 재침례교도가 시작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작은 신자의 그룹은 만츠의 집에서 다음과 같은 모임을 가졌다.

그 기도가 끝난 후 야곱 가문의 조지는 일어서서 그레벨에게 자신의 믿음과 지식에 근거한 참된 그리 스도교의 침례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가 이러한 간청을 하며 침례 받을 의향을 갖고 무릎을 꿇자 그레벨은 그에게 침례를 주었다. 그 당시 안수받은 목사라면 그 누구도 이러한 것은 시행하자 않 았었다. 그레벨이 직접 침례를 베푼 후에 블라우록은 그곳에 있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침례를 주었 다. . .이것은 종교개혁의 가장 혁명적인 행동이었음에 분명하다.

이런 학자들과 역사가들 외에 두 번째 이론을 지지하는 자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비록 재침례교도들이 중세분파와 흡사한 성격을 지녔다 할지라도 Anabaptist 운동은 종교개혁 이전의 운동에서 파생되지는 않았다.


II. Anabaptist 운동의 주요 분파와 지도자들

16세기 Anabaptist 운동에는 여러 분파가 존재하였다. 1538년에 헤디오(Kaspar Hedio)는 13개의 재침례교도들이 있음을 언급하였고, 1544년에 가스트(Johannes Gast)는 7개의 재침례교도들을, 1566년에 아츠트(Wendel Arzt) 역시 7개의 재침례교도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스위스 형제단, 메노나이트, 후터파는 19세기가 지나고 나서야 역사가들에 의해 알려졌다. 본 논문에서는 재침례교도들이 독일, 스위스, 화란 등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주요 지도자들을 연구하고 이들이 선교학에 미친 영향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독일 중부 및 남부 Anabaptist 운동
재침례교도들이 스위스에서 급속도록 확산되어 나가면서 스위스 시 당국으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재침례교도들의 핍박이 심해지자 이들은 독일 남부로 선교센터를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주로 활동한 Anabaptist 운동의 지도자들은 후트(Hans Hut), 마르펙(Pilgram Marpeck), 후버마이어(Balthasar Hubmaier) 였다.

1) 필그람 마르펙 (Pilgram Marpeck)
마르펙은 종교개혁가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나 활동을 하였다. 마르펙은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가족은 라텐베르그에서 유지였다. 그는 라텐베르그 하급 및 상급의회의 회원으로 활동을 하다가 1525년 4월 20일 페르디난드 1세로부터 채광책임자로 임명을 받기도 하였다. 1528년에 그는 페르디난드에게 5%의 이자로 1천 길더를 빌러줄 만큼 부자였고, 1524년 이전에 소유하였던 두 채의 집은 자그마치 3,500 길더나 되었는데 1528년에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 이유는 마르펙이 광부들로 하여금 재침례교도들의 설교에 동정을 갖도록 인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함께 라텐베르그를 떠나 보히미아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재침례교도들을 만나 침례를 받고 성직자로 임명을 받아 1546년 죽을 때까지 활동을 하였다.
마르펙은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스위스 형제단과는 달리 사랑과 믿음을 강조하였다. 자신의 재산을 함께 나누는 자만이 구주를 발견할 것이라는 후터파를 따르기 보다는 오히려 신앙적인 핍박으로 어려움을 겪던 빈민자들과 난민들을 직접 돌보기 위해 돈을 모으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 하였다. 그는 또한 저술과 소책자를 포함해 약 2천여 편을 펴냄으로 더취 시몬스와 함께 재침례교도 저자들 중 최고로 많은 책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의 뛰어난 저술로는「새로운 대화」(1531-32), 「경고」(1542), 「아름다운 대화」(1543-44) 등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마르펙은 재침례교 출판과 증쇄의 주요 스폰서일 뿐만 아니라 공헌 자이기도 하였다.

2) 발타잘 후버마이어 (Balthasar Hubmaier)
로마가톨릭 사제이면서 뛰어난 설교자였던 후버마이어가 스위스 개혁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22년의 일이었다. 2년이 지난 1524년에 그는 자신의 회심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면서, “나는 몇 해 동안 어느 곳이던 설교자로서 섬겼지만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수 없었음을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 앞에 진솔하게 고백하는 바이다. 지난 2년 동안 그리스도가 내 마음가운데 자리를 잡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기에 이제부터 과감하게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다”고 고백하였다.
후버마이어는 1525년 취리히 변론에서 성경의 원리에 맞지 않는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그 해 4월 25일 유아세례가 잘못되었음을 처음으로 전하던 재침례교도인 루빌린(Wilhelm Reublin)으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같은 해에 그는 약 3백 명에게 침례를 베풀고 이어서 침례식, 주의만찬, 세족식도 함께 거행하였다. 후버마이어는 누구보다도 침례의 정당성을 밝히는데 뛰어난 자였는데 그는 침례의 두 가지 면을 기본적으로 밝히면서 물침례의 외적인 행동과 성령의 내적인 행동은 인간의 반응과 헌신을 이끈다고 주장하였다.
후버마이어는 다른 재침례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비엔나 감옥에서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하다가 1528년 3월 10일 사형장으로 끌려 나가 연기가 피어나는 말뚝에 묶어 화형을 당하였고, 3일이 지난 후 그의 아내인 엘스베스(Elsbeth)는 목에 큰 돌이 매달린 채 다뉴브 강물에 익사시키는 처형을 당하였다. 후머마이어의 죽음이 강하게 비치게 되자 당시 영적지도자들과 재침례교도들의 초기 신학자들의 목소리와 펜은 침묵을 지키고 말았다.

2. 스위스 Anabaptist 운동
스위스 취리히에서 Anabaptist 운동은 1525년 1월 21일 이후로 시작되면서 스위스 형제단은 가가호호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취리히에서부터 선교의 열기를 스위스의 가까운 여러 도시로 확산시켜 나갔다. 스위스 재침례교도들은 원래 츠빙글리의 제자들에 의해 취리히에서 형성되었는데 두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첫째 그룹은 츠빙글리의 개혁보다 더 강하고 빠르게 원하는 자들로 그레벨, 만츠, 블라우록이 속하고, 두 번째 그룹은 취리히를 중심으로 작은 읍내에서 모여든 사제들로 이루어졌는데 스틈프(Simon Stumpf), 루블린(Wilhelm Reublin), 브로틀리(Johannes Brotli)가 여기에 속한다.

1) 펠릭스 만츠 (Felix Manz)
그레벨이 죽고 난 이후 재침례교도의 지도력은 만츠에게로 넘어 갔는데 만츠는 인기와 말하는 능력에 있어서 그레벨을 능가하였다. 그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 능하였고 츠빙글리의 모임 때 한 부분을 맡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신자의 침례(believer's baptism)가 처음으로 열린 곳이 만츠의 집이었다.
신자의 침례가 일어나기 얼마 전 만츠는 취리히의 소의회와 대의회에서 침례의 정당성을 밝히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는 12월 13일과 18일 사이에 편지를 써 의회에 침례에 대한 자신의 뜻을 피력하려고 하였지만 츠빙글리는 그로 하여금 성경을 인용하도록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만츠는 이에 굴하지 않고 취리히 지역에 있는 개종자들을 지도하는 데 앞장섰고, 시골 농부와 직공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만츠는 여러 번 체포되어 취리히에 있는 세인트 갈, 그루닌겐, 마녀성과 같은 감옥에 투옥되어 그가 들어가 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만츠는 침례로 인해 개신교도의 손에 죽은 최초의 재침례교도교이며 취리히에서는 최초의 순교자이기도 하였다.

2) 조지 블라우록 (George Blaurock)
블라우록은 원래 카자콥(Cajacob) 이었지만 그가 푸른 코트를 자주 입는 관계로 그에게 붙어진 별칭이었다. 사역에 있어서 사실 그는 그레벨과 만츠를 능가하였다. 복음에 대한 열정을 대단하여 그는 설교자로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실례로 그는 큰 방에서 2백 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울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여 150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고 한다.
블라우록 역시 자주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고, 만츠가 사형을 당하던 날 블라우록은 등에 피가 날 정도로 태장을 맞고 난 후 그는 죽기까지 2년 6개월 동안 이단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주력을 하였다. 마침내 1529년 4월 14일 인스버럭(Innsbruck)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교를 받아 1529년 9월 6일 이탈리아 클라우센(Klausen)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취리히 재침례교도의 최초 지도자들은 모두 죽게 되었다.

3. 독일북부와 화란 Anabaptist 운동
화란의 Anabaptist 운동은 뮌스터의 비극으로 인하여 일어나게 되었는데 폭력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뮌스터에서 침례를 받은 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화란의 재침례교도들을 이끌 리더가 필요하였고 그가 바로 시몬즈였다. 그래서 그는 화란과 독일북부 지역에 재침례교도 비전을 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 메노 시몬즈 (Menno Simons)
시몬즈는 원래 가톨릭 사제였지만 사역한지 3년이 지난 후에 도저히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 후 다시 성경과 루터의 저술을 읽기 시작하다가 침례에 대한 의구심으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큰 혼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유아세례는 비성서적이라고 확신을 하게 되어 1535년에 회심을 하고 이듬해에 필립스(Obbe Philips)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시몬즈는 거의 25년 동안 화란과 독일 북부 지역에서 박해를 당하던 재침례교도들을 직접적으로 관리하며 조직하는 일을 하게 되어 이 공동체는 그가 죽고 난 이후에도 꾸준히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화란에서 자유를 갈망하던 영어권 난민들을 15세기 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그가 바로 시몬즈이요 메노나이트 교회를 세운 창시자이다.
박해가 끊임없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북부에서의 Anabaptist 운동은 성공을 거두어 많은 이들이 회심을 하고 교회가 개척되었다. 시몬즈는 성공을 하게 되어 1561년 1월 31일 그가 죽을 때까지 독일 북부와 어느 지역에서든 재침례교도들은 메노나이트로 여겨졌다. 또한 화란에서의 재침례교도들은 급속도록 증가하여 재침례교도들의 숫자가 화란 전체 인구의 1/4을 차지하게 되었다.

III. Anabaptist 운동의 선교신학과 선교전략

Anabaptist 운동은 스위스 취리히를 시작으로 하여 독일,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화란 등지로 확산되어져 갔다. 재침례교도들은 모든 민족을 제자화 삼기 위하여 5가지 선교목적을 지니고 진행하였다: (1) 전 세계로 가라; (2)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 (3) 인류가 복음에 반응을 보일 때까지 참여의식을 지니고 전하라; (4) 믿음을 보이는 자에게 침례를 주라; (5) 구원받은 자를 신자의 교제에 참여케 하라. 재침례교도들은 바람직한 선교목적이 있었기에 남부 티롤(Tyrol)에서는 2만 명이, 모라비아의 니콜스버그(Nikolsburg)에서는 2년도 채 못 되어 6천에서 1만 2천명이, 1536년까지 모라비안 공동체는 2만에서 7만까지 그 숫자가 증가하였다.
본 연구자는 Anabaptist 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어떤 선교신학이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그 선교신학이 오늘날에도 유효한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또한 재침례교도들은 지역적 팽창을 할 만한 어떤 전략들을 갖고 있었는지를 연구하고, 이 전략들은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1. Anabaptist 운동의 선교신학

선교신학이란 성경의 선교적 본질이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의 선교활동에 대한 기록이기에 성경을 통해서 선교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16세기 재침례교도들이 선교지역을 팽창시켜 나갈 때 이들의 선교적 본질은 성서적이었는지 평가 해 볼 필요가 있다. 본 연구자는 16세기 Anabaptist 운동에서 세 가지 선교신학을 밝히며 이것이 성경의 원리에 적합한지 그 효과는 어떠하였는지를 분석하려고 한다.

1) 성경관
종교개혁가들과 로마가톨릭간의 차이점은 성경의 권위였지만, 종교개혁가들과 재침례교도들간의 주요 논쟁점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원리를 크리스천의 삶 속에서 이행하는 것이었다. 개혁가들은 믿음을 오직 성경으로 재발견하는데 포커스를 두었지만, 재침례교도들은 신자의 삶을 강조하는 제자화를 재발견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후버마이어는 1523년 9월의 논쟁에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피력하면서 미사 및 성상(聖像)과 관련하여 야기된 잘못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규정에 따라 검토하고 시정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츠빙글리에게 교회에서 미사를 금하지 않고 계속 드리도록 결정한 것에 대해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설명해 보라고 반박을 하였던 것이다.
재침례교도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만 오직 신약만이 크리스천 생활의 규범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실례로 마르펙의 성서관은 그리스도 중심의 성서해석을 강조하였기에 구약은 하나의 상징이며 신약은 그 상징으로 나타나던 것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스위스 형제단이나 후터파 역시 성경해석이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 이전의 계시는 부분적으로 보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완성된다고 보았다.
성서관에 관해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였지만 성경의 원리를 적용하는 데는 미약하였다. 개혁가들은 신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교리를 체계화하는데 성경을 사용하였기에 ‘being’ 중심의 신학을 만들었다. 반면에 재침례교도들은 자신들의 삶의 영역에 성경을 생활 규범으로 여겼기에 ‘doing’ 중심의 신학을 이루는데 강조점을 두었다.

2) 신자의 침례
종교개혁가들과 로마가톨릭간의 경계선을 성경의 권위로 본다면 개혁가들과 재침례교도들간의 경계선은 신자의 침례이다. 신자의 침례는 재침례교도들에게 있어서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한 sola scriptura을 실재적으로 실천한 것이었다. 신자의 침례를 강조한 재침례교도의 대표자들은 그레벨, 후버마이어, 마르펙, 시몬즈 등이다.

침례에 관한 재침례교도들의 입장을 가장 먼저 서술한 문헌은 스위스 형제단이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그레벨은 “침례는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고 죽어야만 하고 새로운 삶과 성령으로 사는 것이며 자신이 믿음으로 사는 내적인 침례가 있다면 분명히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뮌처에게 유아세례를 거절할 것을 권하였다. 그는 유아세례는 의미가 없고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성경에 위반된다고 분명히 지적하였다.
16세기 침례에 대해 재침례교의 견해를 가장 잘 변호한 사람은 후버마이어였다. 그는 침례에 관하여 여러 권의 책을 1727년에 출판하였는데「침례에 대하여」,「유아 때 세례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누구나 그가 100세가 되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침례를 받을 의무가 있는 이유와 원인」,「신앙의 가르침 받은 사람들의 물 침례에 대한 원리」가 있다. 이 책들을 통해 후버마이어는 지적하기를 침례는 제자의 삶의 상징하기 때문에 침례가 없이는 가시적인 교회도 존재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물 침례가 없는 곳에는 교회도, 사역도, 형제도, 자매도, 형제적인 권고도, 배척도, 회복도 없다. . .가시적인 형제와 자매가 서로를 알 수 있는 외적인 고백이나 간증이 존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마음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유아세례에 관해 유아에게 세례를 주고 몇 살 뿐이 안 된 아기들을 가르치라는 성경의 구절을 발견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이유는 츠빙글리 때문이 아니라 교황정치에 다시 한 번 문을 열어 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재침례교도들은 유아세례의 정당성과 로마 가톨릭의 성례전을 수용하지 않았다. 시몬즈는 “어린 아이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기 때문에 이들에게 침례를 강요해서는 안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성찬식이 왜곡되기 때문이다”고 명확히 언급하였다. 더욱이 그는 우리의 죄 용서가 그리스도의 피로 하지 않고 침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금송아지를 빚어서 그리스도의 자리에 대신 놓아두는 것과 같다며 침례에는 구원의 의미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3) 교회론
이스텝 박사는 “교회관에서 우리는 16세기 재침례교의 가장 결정적인 통찰력”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재침례교도에게 있어서 교회관이 분명치 않고는 이들의 복음전파가 발전한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그렇다면 16세기 재침례교도들은 어떤 교회관을 지니고 있었기에 복음팽창의 원동력이 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6세기 재침례도들은 신약교회를 회복시키는 것이 교회의 바른 사명으로 여겼다. 시몬즈에게 있어서 신약교회를 회복한다는 것은 6가지를 의미하였다: (1) 순수하고 정결한 교리; (2) 성례전의 성경적 사용; (3) 말씀에 순종; (4) 형제애; (5)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담대한 고백; (6) 주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고난. 재침례교도들은 교회를 효과적으로 혁신시키기 위해 개혁가들의 개혁(reformation) 보다는 회복(restitution)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교회는 교회의 머리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출발해야 하며 각 지체들은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를 나눠야하는 유기체가 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다.
재침례교도들은 콘스탄틴대제로 인하여 교회는 정치력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통합을 하게 되었음을 비난하였다. 개혁가들은 sola scriptura로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교회는 주어진 지역의 모든 사회를 위해 궁극적인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다보니 선교도 정치적인 색채를 뛸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자면 루터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당시 복음에 은혜 받은 자들이 자원하여 열방으로 나가기보다는 국가교회(state church)의 정책에 복종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재침례교도들에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궁긍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기에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어야 할 것임을 믿었다. 이들은 개혁가들과는 달리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만 이러한 책임은 교회가 국가와 통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선교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으로 확신하였다. 시몬즈에게 있어서 “회복된 교회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존재를 진실 되게 표현하는 것이지만 심판과 영광이 있는 그리스도 나라의 완성은 미래에 펼쳐져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현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되기에 복음을 들고 이방인들에게 나가야 할 것임을 피력하였다.
재침례교도들에게 있어서 교회관은 제도화된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약교회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신자들이 서로 돕고 자신의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 나가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은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다보니 교회는 세상과 분리하였고 세상을 향한 책임으로 선교를 강조하다보니 복음이 급속도록 팽창될 수 있었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선교에 눈을 뜨며 부흥을 이루게 된 것은 16세기 재침례교도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2. Anabaptist 운동의 선교전략
16세기 재침례교도들이 확산되어져 나갔을 때 과연 전략적으로 선교하였는지가 의문이다. 이에 대해 카스도르프(Hans Kasdorf) 교수는 이들이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팽창하였고 나중에는 전략적인 팽창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재침례교도들이 실시한 모든 선교전략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효과적으로 세우려는 선교목적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1) 평신도 선교
16세기 Anabaptist 운동의 가장 뛰어난 선교전략 중의 하나는 종전의 성직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의 선교시대를 활짝 열었다는 점이다. 16세기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분명한 구별이 있어서 평신도는 교회사역이나 성경을 해석하거나 설교를 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1179년 라테란(Lateran) 회의 때 평신도는 설교할 수 없음을 의회는 결정을 하여 중세에는 선택받은 극소수의 선교사(성직자, 사제)를 제외하고는 어떤 평신도라도 선교대사명에 동참할 수 없었다. 그래서 평신도들은 열방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 싶다 할지라도 선교사역에 대해선 수용적인 순종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1517년 마틴 루터는 평신도를 일깨우는 전신자 제사장 직분설(priesthood of all believers)을 주장하였다. 라토렛(Kenneth Latourette) 교수는 루터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며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신자로부터 동의를 받아 활동하는 자들에게 위임된 사역을 말하고 안수식은 교회에서 설교자를 택하는 하나의 예식”이라고 하였다. 루터는「사역에 관하여」라는 책자에서도 “모든 신자는 제사장으로서 이들은 가르치며 침례를 주고 성찬식을 거행하고 중보기도자로서 기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전신자 제사장 직분설은 평신도가 안수 받은 사제들처럼 똑같은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루터가 전신자 제사장 직분설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신학은 제한이 있음을 야르넬이 주장하였다. “루터가 회중주의를 이루고자 하는 확신은 아직 잘 무려 익지 못하였다. . .그의 주요목적은 교회의 개혁이지 제사장의 구체적인 견해를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루터는 성직자와 평신도 직책간의 장벽을 제거하지는 않았다. 모든 종교개혁가에게 있어서 성직자는 교회봉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유일한 권한을 소유하고 있음을 확신하였다.
이와 반면에 재침례교도들 사이에서는 학식이 있는 성직자급과 일반 평신도 사이에는 아무른 구별이 없었다. 각자는 설교자였고 선교사였으며 자신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더 좋은 사역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웨버(Max Weber)는 “루터의 전신자 제사장 직분설이 영적부흥의 특징을 지닌 재침례교운동에서 실제적인 현실을 이루게 되었다”고 강조하였다. 재침례교 신앙이 16세기에 확장되고 있을 즈음 평신도 가운데 여성들이 사역에 참여한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여성들은 복음을 전하거나 침례를 줄 수도 없고 이들은 장로 선출에도 허용치 않았다. 하지만 재침례교도 중에 여성 평신도였던 프레이베르그의 헬렌(Helene of Freyberg)은 1528년 그의 가족과 함께 다시 침례를 받고 재침례교운동에 동참하였다. 당시 프레이베르그 지역에서 많은 재침례교도들이 체포되어 핍박을 당하고 있을 때에 그녀는 이들에게 숙박을 제공하였고, 재침례교도의 리더였던 바울(Paul)과 라트(Hans Rat)을 보호하는데 심혈을 기울려 Anabaptist 운동이 프레이베르그에서 음밀하게 확산되어져 나가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처럼 재침례교도들은 평신도로 하여금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며 나아가 복음전파에 동참할 수 있도록 각성시키며 훈련시키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2) 소그룹 선교
종교개혁시기에 재침례교운동이 확산되어져 나간 것은 성경공부를 하는 소그룹 운동이 곳곳에서 활성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1527년에서 1528년 사이 재침례교도들은 아우스버그(Ausburg)에서 소그룹 모임을 가질 때 33개의 가정에서 모여 성경을 공부하였고, 아우스버그 바깥에서도 14개의 그룹이 따로 모여 활동을 하였다. 큰 모임은 박해로 인하여 점차 사라졌지만 소그룹은 개인가정에서, 여인숙 같은 렌트방에서, 추방지역의 외곽에서 모였다.
재침례교도들은 당시 세 가지 유형의 그룹이 있었는데 대형그룹은 100명에서 500명, 중형그룹은 20명에서 90명, 소그룹은 20명 이하로 모이는 그룹이었다. 이 세 그룹 가운데 재침례교운동에 이바지 한 것은 소그룹이었다. 소그룹 모임에 관해 웨그너(John Wegner)는 “이곳에서 모인 재침례교도들은 주로 밤이나 동트기 전에 모였다가 체포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이들의 모임은 4시간 혹은 5시간씩 모였고 혹은 밤새도록 모이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며칠 동안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상적인 모임은 1시간 혹은 2시간이었다”고 언급하였다.
재침레교도들의 소그룹은 성경공부, 기도회, 침례식, 성찬식, 찬양, 간증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평신도들은 이 모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군사로 철저하게 준비될 수 있었다.
재침례교도들의 소그룹 모임의 목적은 전 가족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블랑케(Fritz Blanke)의 보고에 의하면 1525년 1월 22일부터 29일까지 한 주 동안 가정에서 소그룹 모임이 열렸는데 이 모임을 통하여 참석한 성인들은 모두 회심을 하고 침례를 받고 성찬식도 함께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언급하기를 8일 동안 열린 이 모임은 마치 “영적운동”처럼 느껴져 몇 몇 사람이 아닌 대다수의 참여자들이 회개하며 구원의 기쁨을 함께 누렸다고 하였다. 16세기 재침례교도들의 선교전략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소그룹 모임을 통해 양육하고 훈련을 시켜 신약교회를 회복시키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순교 선교
1527년에서 1560년까지 Anabaptist 운동에 대한 끔직한 박해는 스위스와 남부독일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까지 뻗어나갔고 이는 재침례교운동의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로마가톨릭, 루터, 츠빙글리의 권력이 행하는 작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재침례교도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그리스도를 따라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받아들었다.
유럽 전 지역을 통해 재침례교도들이 겪었던 박해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다.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와의 논쟁과 시당국이 재침례교에 반박이 있고 난 이후에 재침례교도들의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필히 침례를 주어야만 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침례를 주지 않는 자는 그 처벌로 가족과 함께 도시를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어려움은 재침례교도들이 도시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성직자위원회가 파송되어 이들을 회심시키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몇 몇은 회심하여 24명이 풀려났고, 14명은 1526년 4월 5일 도주할 때까지 마녀성에서 감금되어 있기도 하였다.
1527년에서 1532년까지 취리히에서 6번의 처형이 있었다. 만츠는 1527년 1월 5일 처형된 최최의 인물이었다. 그는 손이 묶인채 배에 실려 림마트(Limmat) 강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마지막 끔직한 사형은 1532년 3월 23일 일어났는데 칼피스(Heinrich Karpfis)와 헤르조그(Hans Herzog)가 참수를 당하였다. 외국인들은 추방을 당하여 로마가톨릭지역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대부분 초기의 재침례교 지도자들은 처형을 당하였다. 블라우록은 채찍을 맞아 쫓겨나서 1529년 클라우센(Clausen)에서 화형을 당했다. 후버마이어는 왈트슈트(Waldshut)로 피신을 했다가 마침내 1528년 3얼 10일 비엔나에서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아내 역시 남편이 죽은 지 3일이 지나 다뉴브 강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재침례교도들 가운데 가장 끔직한 순교를 당한 자 중의 한 명은 샤틀러(Michael Sttler)가 1527년 5월 21일에 당한 순교였다. 그는 광장에 끌러가 혓바닥이 잘리고 체인으로 묶어 마차에 실려 그의 몸이 두 번이나 찢긴 상태에서 다섯 번 이상이나 대문 앞으로 끌려갔다. 마침내 이단자라 불리며 몸에 파우더를 덮으신 채 화형을 당하였다. 1525년에서 1530년 사이 티롤(Tyrol)과 주변 지역에서 수천 명의 재침례교도들이 살해를 당하였다. 린츠(Linz)에서는 6주 동안 76명이 살해를 당하였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재침례교도들이 16세기에 당한 박해는 이들의 신앙을 깊게 만들었다. 박해는 오히려 Anabaptist 운동을 확산시켜 나갔고 종교개혁에 관한 한 재침례교 기록자는 2,173명의 순교가 당시에 있었다고 전한다. 재침례교도들은 유럽 전 지역에 선교대사명을 이루기 위해 견디기 힘든 박해가 닥쳐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였기에 스위스에서 출발한 복음의 불길은 점차 유럽 구석구석까지 확산되었다.

나가는 말

2006년은 한국침례교 선교사 파송 100주년이 되는 축복과 감사의 해이다.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침례교 선교에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이 재침례교 운동이라 확신한다. 재침례교도들은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비전이 있었고 그것은 신약교회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비전은 선교를 통하여 점차 이루어져 갔다. 이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처형과 참수를 당한다 할지라도 이 비전이 그들 마음속에 박혀 있었기에 16세기 재침례교 운동은 시들지 않았다.
16세기 재침례교 운동이 선교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평가해 본다면 첫째로 재침례교도들은 교리를 바르게 정립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재침례교도들이 가장 강조하였던 것은 신자의 침례였다. 로마가톨릭은 침례에 구원의 효과를 믿었고 유아세례를 행하였지만, 재침례교도들은 침례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주장하였고 신자의 침례를 행하였으며 물에 잠기는 물침례를 시행하였다. 재침례교도들에게 있어서 침례는 외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는 것이며 내적으로는 삶의 변화를 고백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신자의 침례는 신약교회를 회복하는 상징이었으며 이를 성취시키는데 따르는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아 점차 신자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재침례교도의 영향은 성직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의 선교 패러다임으로 물줄기를 바꾸는데 큰 이바지를 하였다. 16세기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성직자(사제) 만이 선교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렇다보니 현지인(수용자)의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여 선교하기 보다는 거의 일방적으로 성직자(전달자)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루터가 전신자 제사장 직분설을 주장하기는 하였지만 완벽하지는 못하였다. 웨버가 주장하였듯이 루터의 전신자 제사장 직분설은 재침례교도들에 의해 실현화 되었다. 재침례교도들 사이에는 성직자와 평신도 간에 구별이 없이 누구든지 선교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평신도 선교가 활성화되어 재침례교 운동은 로마가톨릭과 루터와는 달리 힘차게 뻗어나갈 수 있었다.

반면에 재침례교 운동이 선교에 동참하면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먼저 재침례교도들 사이에 너무 많은 분파가 형성되어 각 분파끼리 갈등과 분열이 생겨 선교사역에 해를 끼쳤다. 재침례교도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강조하였기에 근엄한 직책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통제를 받거나 억압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에 이러한 견해는 오히려 정부 요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그 다음으로 재침례교도들의 지나친 극단주의는 선교에 방해가 되기도 하였다. 특별히 뮌스터 사건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어 복음전파에 걸림돌이 되었다.
재침례교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매각되어 그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독특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교회 문화에 강력하게 대항하였고 우리에게 커다란 영적 유산을 물려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재침례교도들로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거나 수집할 수 있어야 한다. 재침례교도들이 오늘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침례교인(Baptist)에게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한국침례교회는 상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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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신대 안희열 교수(선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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