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처음으로 | 기사입력 | 리포터(선교기자) 가입 | KCM 홈
 
   특별호 12호 바이블 웨이 [05-08]
   제375호 [05-07]
   제374호 [10-30]
속보(긴급기도제목)
선교현장
선교소식
선교단체
푸른섬선교정보
AFMI
교계, 문화
오피니언
 발행인칼럼
 선교칼럼
 목회칼럼
 QT
 아름다운이야기
 간증문
 기행문
 무지개편지
목회, 신학
청년, 대학생
기획, 특집
포토/동영상
해외한인교회
선교학자료
해외일반
한국일반
주앙교회
미션매거진을 만드는 사람들...
facebook 미션매거진 편집회의
섹션 오피니언 > 선교칼럼 등록일 2011-01-29
작성자 관리자 (admin)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남아공 정양오 선교사
남아공 정양오 선교사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도록 신앙의 선조들이 얼마나 눈물을 뿌리며 기도하였고, 얼마나 마음을 조이며 고뇌하였을까를 생각하며 생명을 걸고 진리를 외치던 개혁자들의 비장한 모습을 떠올린다.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그대학에 게시판에 95개 조항을 내걸어 사실상종교개혁이 폭발하였다. 1520년 7월 15일 교황 레오 10세는 파문장(破門狀)을 발포하여 루터로 하여금 그 주장을 철회하도록 60일간 여유를 주었다.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학생들이 지켜보는 비텐베르크대학교정에서 교황의 파문장을 불살랐다. 그 후 다수 공직자와 귀족들이 모인 보름스 제국회의 석상에서 “성경이 제시해주는 확실한 증거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 한 주장을 철회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맞섰다. 이로써 철옹성 같은 중세 천 년의 암흑시대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버렸다.

종교개혁 488년을 지나는 오늘의 교회 모습은 어떠한가

로마카톨릭(‘세계교회’라고 함)과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는 1968년이래 줄기차게 에큐메니칼운동을 전개하여 상당한 결실을 보이고 있다. 그 예로 루터로 상징되는 의화논쟁(義化論爭)에 종지부를 찍었고(2000년) 본격적으로 개신교와 로마카톨릭의 통합운동(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에 미국 내 개신교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대거 앞장서거나 배서(背書)하였다. 연합선교(Cooperative Evangelism) “Billy Graham Association”, “The Trinity Broadcasting Network” "Promise Keepers", 이해와협력위원회(한국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운동도 그런 부류의 하나로 봄) 등을 전 세계적으로 가동시켜 역사적인 종교개혁에 의해 야기된 단절을 무마시키고, 세계교회(Roman Catholics)와 손을 잡는데 노력함으로 마침내 개신교의 죽음(The death of Protestantism)을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에 침투되어 있는 몇몇 에큐메니즘의 매개체적인 면을 노출시켜 종교개혁의 남은 과제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우리가 신앙고백으로 예배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의 문제이다. 최근에 교계적으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의 번역상 오류가 있어서 교단 별로 문제 인식을 하고 있는 상황이며, 어떤 교회에서는 교회 나름대로 번역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주기도문은 성경 번역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기원, 형성 과정이나 역사성이 불명확하다. 단순히 번역의 오류 정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여러 문맥에서 비신학적인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예를 들면 천주교에서는 유독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 마리아에게 나시고’를 강조하여 이 부분에서 실제로 고개를 깊이 숙이는 것을 보면 이 신앙고백문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교회의 사도신경 번역에는 빠져 있지만 ‘지옥으로 내려가시고’라는 부분은 천주교의 연옥을 뒷받침하고, ‘거룩한 공회와’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가 아닌 오직 천주교만을 의미하고,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는 성도 간의 교제가 아닌 죽은 성자 숭배를 뒷받침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로마카톨릭에서는 그렇게 하더라도 칼빈을 비롯하여 종교개혁자들이 긍정했던 것처럼 해석을 달리하여 사용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도신경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저 덮어놓고 은혜롭게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천주교의 잣대를 교회가 아무런 의식 없이 이단과 정통의 척도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실제 교회에서 사도신경이 알게 모르게 에큐메니즘의 한 매개체로 깊이 자리잡고 있는지 파헤쳐봐야 한다.

천주교에서 영세 받은 자들을 교회에서 그대로 인정해 입교하는 문제

구구이 설명할 것 없이 로마카톨릭은 성경의 빛 아래서 비신학적, 비복음적,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다른 이단이나 이방종교와 전혀 다를 바 없이 교황이나 신부나 천주교인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오직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도록 전도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천주교의 성사를 마치 구원의 신앙으로 간주하고 인정하는 것은 한 마디로 타협과 무지의 소산이다.

어떤 사람은 독립교회•로마카톨릭•정교회 등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 중 상당수가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약간의 너그러운 시각으로 선교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슬렘도 그리스도를 부른다. 몰몬교인들도 그리스도를 부른다. 통일교도 예수를 부른다. 이곳 아프리카 독립교회 교인들은 조상신도 악마도 천사도 예수도 다함께 부른다. 실제로 예수를 믿는다는 무당들도 가끔 본다. 성경에는 귀신들도 믿고 떠든다고 했다.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은 사람을 마치 타 교회에서 예수를 믿다가 온 사람처럼 또는 유아세례를 받은 교인이 입교하는 것처럼 여과 없이 입교를 허락하는 성례 절차가 과연 옳은 것인가?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영성훈련 문제

‘뜨레스디아스(스페인, Tres Dias)’로 소개된 이 운동은 로마카톨릭이 1960년대부터 전 세계에 보급한 프로그램이다. 주로 교회마다 이름표를 달리하여 3박 4일간 외부와 차단하고 자기 정체성(나는 누구인가) • 침묵 • 인간관계 회복이나 내적치유 • 감수성훈련 등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물론 교육적으로 긍정적인 점이 있지만 (유신 정권 때 새마을운동 교재로 이 프로를 보급한 적이 있음), 문제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외면한 채(훈련기간 동안 거의 성경을 사용 안함) 상담심리학에 기초하고 천주교의 피정에서 실시하는 프로와 거의 유사하거나 동일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혹자는 마치 이 프로그램이 21세기 목회의 마지막 대안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성경 속에 무진장한 보화를 마다하고 인위적인 어떤 프로를 여과 없이 무분별하게 목회 현장에 적용함으로 마치 ‘천주교 큰 형님이 역시 달라’ 하는 식으로 에큐메니즘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항간에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진리에 대한 항거였는데 21세기 종교개혁의 모토는 ‘사랑을 통한 교회 일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지만 진리의 싸움이 다 끝나버린 양 무게 중심을 옮기는 것은 바로 사탄이 쌍수를 들고 바라는 일이다. 이름표를 달리한 교회가 얼마든지 있어도 진리 가운데 있다면 그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일치(Sameness)선상에 있는 것이다.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요즘 말하는 교회 일치라는 정체성이 도대체 무엇인가? 여러 이슈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신학 입장이 다른 이들과의 대화나 협력의 문제를 말하는 것 같다. 여기서 신학 입장이 다르다는 것은 개신교 내에서 천주교 신학이나 신앙 입장과 동일하거나 동정하는 부류를 말하고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같은 동질 선상에서 교회 공동체로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보수주의 교회 입장에서 천주교와 입을 맞추는 교회협의회나 단체들의 시각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어쩔 수 없는 관행으로 계속 끌려가야만 하는가? 예수를 믿기는 믿는다고 하지만 아주 다르게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손을 잡고 무슨 교회 갱신이니 성경 출판이니 교회 연합과 선교를 논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분리주의자라고 딱지가 붙을까봐 겁이 나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타협한다면 이미 건강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는 좀더 용기를 내야 한다.

지난해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이라는 카톨릭 영화가 전 세계를 강타하였다. 내용이 로마카톨릭 메시지로, 그야말로 에큐메니칼 사상이 충만했음에도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멘을 연발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 앞에 매순간 현재 진행 중인 개혁이라는 공허한 말만을 되풀이하면서 교회의 치명적이고 심각한 여러 중증(重症) 현상과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이고 비신학적인 낡은 관행이나 구형(舊型)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잃어버린 세대에 살고있다. 누군가 오늘의 교회를 혼수 상태•무열의(無熱意)•혼란•오염•타협•묵인•방관 상태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다른 무엇이 아닌 성경 진리의 무지로 인해 마비되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융통성이 많아서인지 이교사상에 감염되고 타락된 것을 인식하려 하지 않는다. 세속의 오염으로 절름거리고 있다. 성경의 진리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세속의 신학, 지혜, 방법 등 인본주의 수단에 의해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고 있다.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시던 우리 주님의 예언은 이런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

글 : 남아공 정양오 선교사
프린트 메일보내기
관리자 모드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