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처음으로 | 기사입력 | 리포터(선교기자) 가입 | KCM 홈
 
   특별호 12호 바이블 웨이 [05-08]
   제375호 [05-07]
   제374호 [10-30]
속보(긴급기도제목)
선교현장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서아시아
 CIS(중앙아시아)
 중동
 동유럽
 서유럽
 북아프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태평양
 북미
 중남미
 비거주, 순회
 외국인 근로자
선교소식
선교단체
푸른섬선교정보
AFMI
교계, 문화
오피니언
목회, 신학
청년, 대학생
기획, 특집
포토/동영상
해외한인교회
선교학자료
해외일반
한국일반
주앙교회
미션매거진을 만드는 사람들...
facebook 미션매거진 편집회의
섹션 선교현장 > 서아시아 등록일 2005-12-31
작성자 없음 ()
인도 북부 미조람의 선교역사
미조람주는 지리적으로 인도의 동북쪽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미얀마(버마), 서쪽으로는 방글라데시와 인접하고 있다. 미조람 주는 외부세계로 알려질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는 깊은 산지에 위치해 있어서 외부세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접근하기
1. 소 개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 미조 사람들은 루샤이(Lushai) 산지에서 살았고 외부의 사람들은 이들을 '루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미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의 미조족 내에는 사실은 13개의 종족이 루샤이 언어군으로 동화되면서 미조라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이들이 이렇게 불리게 된 것은 미조(루쉬아이)라는 말이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 이였고, 미조람은 "산사람들의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조람주는 지리적으로 인도의 동북쪽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미얀마(버마), 서쪽으로는 방글라데시와 인접하고 있다. 미조람 주는 외부세계로 알려질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는 깊은 산지에 위치해 있어서 외부세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미조람주는 인도 전체로 볼 때, 약 70만명의 작은 인구와 더불어 작은 산이 많은 지역이다(15만 명 정도가 미조람의 수도인 아이졸에 살고 있다).

이들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들의 정글에서의 원시적인 삶과 수없는 이웃 마을과의 전쟁으로 인한 전사적인 기질로 외부의 사람들에 의해서 아주 야만인으로 알려졌다. 즉 이들은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인간의 머리를 사냥하는 사냥꾼들로 알려졌다. 이들은 자기들 종족간에도 머리사냥을 위해서 싸웠고, 자주 이웃의 평지지역(산아래 있는) 사람들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 당시 그들의 마음과 그 땅에는 평화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머리 사냥의 이면에는 사후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라 여겨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상은 다음 기회에 연구해 보기로 한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71년, 아쌈 카차르지역에서 차(Tea) 경작지로 인한 분쟁이 그 원인이 되었다. 보다 좋은 차의 경작지를 찾아서 알렉산드리아 포어에 제임스 윈체스터라고 하는 영국인 차 농장주인은 조금씩 미조의 땅을 침범하게 되자.. 이를 경계하던 미조전사들이 자주 그들의 땅으로 경작지를 넓혀 가는 농장의 일꾼들을 공격하게 되었고, 그들의 머리를 짤라가는 일들이 오랫동안 지속되던 중,,,, 마침내 그 농장주인의 집을 습격하여 농장주인을 죽이고, 그의 작은 딸 메리를 납치해 왔다. 이 사건에 관한 기록은 기독교인 묘지, 실차아르, 카차아르에 있는 윈체스터 제임스의 기념비에서 아직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념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제임스 윈체스터의 기념을 위하여, 그는 한 루쉬아이의 습격으로 1871년 1월 23일 알렉산드리아포어 농장에서 죽었다"

이 기념비는 카차르의 유럽인 거주자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영국정부가 이 사건에 관하여 듣고 영국 군대를 미조람으로 보내었고 이들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으면, 영국의 명령과 법을 제정하였다. 그 이후로 미조람은 카차르 도내의 행정권 아래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1872년에 메리를 미조 사람들로부터 인계 받아 영국으로 데려왔다.

위의 사건으로 미조람이 영국령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영국군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2. 복음의 시작

미조람주에 복음의 씨앗이 첫음 뿌려지게 된 것은 영국 웨일즈 장로회와 영국 정부에 의해서 였다. 첫 선교사는 영국 웨일즈 장로교 윌리암 월리암즈목사로, 그는 하시와 제인티아 산지역을 방문했다. 그는 1891년에 미조람을 방문했으며, 이곳에서 약 한달 동안 복음을 전하고 떠났다. 그는 웨일즈 장로교회에서 그의 미조람 방문을 보고했고,. 웨일즈 장로교회는 윌리암 위리암즈목사를 다시 미조람으로 보냄으로서 하나의 새로운 선교지를 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윌리암 윌리암즈 목사는 미조람에서 그 사역을 시작해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또한 영국정부는 제임스 웬체스터 사건으로 인해 미조람에 군대 파견을 결정하기 위하여 모임을 가졌는데, 이때 영국의 기독교인 백만장자 로버트 알딩톤(Robert Arthington)이 그 자리에 참석함으로 미조람의 형편을 알게 되었고, 그는 특별히 잃어버린 영혼을 위하여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어서 개척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그의 후원의 배경으로 두 선교사가 미조람으로 선교사로 파송되게 되었다.

드디어 1894년에 두 선교사 J. H.로렌과 F. W.사비지가 미조람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1894년 1월 11일에 실차르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와 사이랑(sairang) 에 도착하여 걸어서 미조람의 아이졸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 날짜를 미조람교회에서는 복음의 시작 연도로 정해서 지키고 있다.

두 사람의 첫 선교사들은 트롱(Tlawng)강을 따라서 실차르(Silchar)에서 출발해서 사이랑(Sairang-미조람주)에 1894년 1월 11일에 첫 발을 내렸다. 사이랑에 도착한 이후 자신들의 짐을 가지고 21키로미터를 걸어서 마침내 아이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는 팅푸이후이안(Thingpuihuan- 지금의 자코트(Zarkawt)의 맥도날드 힐(McDonald Hill)에 거처를 마련하고 선교의 베이스로 삼았다.

두 사람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미조말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얼마되지 않아 미조알파벳과 루사이(Lushai) 현재의 미조어 문법과 사전을 만들었다. 8개월만에 그들은 신약의 누가복음서를 미조어로 번역하였고, 미조람에 도착한지 2년 후- 1896년 10월 6일에 미조람에서 첫 교회를 세웠다. 기록에 의하면 1896년 3월 30일에 첫 미조 기독교인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미조람에 도착한 그해 즉 1894년 4월 1일에 두 명의 미조아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웨일즈 장로교회는 월리암 월리암즈의 죽음이후 그들의 첫 번째 선교사로 파송 받은 D. E.존스는 1897년 8월 31일에 아이졸에 도착했다. 그는 첫 두 선교사와 연합하였고, 얼마동안은 그들과 함께 사역하였다. 1897년 말, 크리스마스후, 첫 두 선교사는 휴가를 위하여 미조람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미조람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후원자인 로버트 알링톤은 그들이 미조람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들을 미개종족 아르나찰 푸라데쉬로 또다시 개척 선교사로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그후로 웨일즈의 장로교회는 미조람을 남과 북 두 개의 선교지로 나누어서 선교를 하게 되었는데, 북 미조람은 장로교단이, 남 미조람은 침례교단이 선교사역을 맡아하게 되었다. 이 두 교단은 나란히 존재하면서, 친밀한 협력과 상호간의 이해를 통해서 꾸준히 성장했다.

3. 교회의 설립

5년동안의 개척선교사들의 피나는 수고로, 첫 두사람 쿠마(Khuma)와 카라(Khara)가 개종하였고, 1899년 6월 25일 그들은 세례를 받았다.

미조람의 첫 부흥은 1906년 미조 기독교인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미조 기독교인들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개종함으로서 교인의 수는 점점 더해갔다. 두 번째 부흥은 1913년, 세 번째 부흥은 1918년, 네 번째 부흥은 1930년에 일어났다. 1944년에는 미조람 복음시작의 50주년 축전이 거행되었고, 미조람 전체 기독교인들의 수는 10만 명이 넘었다.

미조람의 교회는교회의 탄생 초창기부터 매년 9월의 한 달을 복음전도를 위한 달 정하여 매일밤 기독교인들은 기도하기 위해 매일 밤 각 가정에서 함께 만났고, 집에서 집으로 복음을 전하러 나갔다. 지금도 이 전통은 이어지고 있는데.. 그 열심은 많이 퇴색된 듯하지만.....

첫 미조 목사로서는 츄아카마(Rev. Chhuahkhama)로 1913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또한 같은해 기독교인들은 아이졸에 웨일즈 장로교 선교 본부로, 그들의 교회건물을 만들었다. 이 교회는 자발적으로 일하는 교회의 회원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들은 결코 미조 사람이 아니 다른 사람들에(외부의 사람들) 의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들의 교회를 그들 스스로 세웠으며 그기에서 복음을 전했다.

4. 선교사 파송의 시작

선교사 파송에 관한 미조교회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19년 아이졸교회 장로위원회의 회의록(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선교사 파송에 관해서는 미조교회가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전, 인접지역들로 이주한 교회의 회원들이 복음전파의 목적을 위하여 약간의 관심을 가졌다. 1911년, 미조람의 서쪽지역 붕문(Bunghmun) 마을에 랑붕아(Mr. Hrangvunga)가 트리푸라로 이주하였다. 그는 트리푸라에 한 마을에서 거주하면서 부흥을 일어켰고 이 마을의 기독교인은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대단한 열정을 가졌다. 그들이 나가 복음을 전함으로 인해 기독교인은 수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미조선교사가 트리푸라주에 오게 되는 첫 걸음이 되었다.

미조람 장로교회는 첫 총회를 1925년 1월 19부터 31까지 가졌는데, 이 총회에서 통과된 결의들 중에 하나는 두 전도자를 미조람의 서쪽지역 랑롱(Langrawng)종족 가운데로 보내기로 했으며, 랄부아이아(Mr. Lalbuaia)와 사이징아(Mr. Saizinga)가 전도자들로서 임명되었다. 랄부아이아는 1941년에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1970년 그가 은퇴하기까지 이 지역에서 헌신하였다. 이 첫 번째 총회에서 그들은 만장일치로 선교기금 모금을 시작할 것을 결의 하게 되었다.


5. 미조람 선교위원회의 형성(구성)

복음전도사역은 1953년까지 노회 상임위원회의에서 관장하였는데... 노회는 선교사역을 위하여 선교부의 독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1953년에 노회선교위원회(The Synod Mission Committe)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노회선교위원회는 선교사의 파송을 증강할 목적으로 1961년에 "노회선교부-The Synod Mission Board"로 새롭게 기구를 조직하였으며 ,이 위원회는 26명의 회원으로서, 12명의 장로들로부터 각각 2명의 대표자들과 노회에 의해 추천된 2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즉 위원장, 수석총무와 선교 행정총무와 선교부 직원들로 구성되었다.


6. 미조람교회의 복음을 향한 열정의 결과들...

2001년 현재 미조람교회(장로교단)는미조람 내의 선교와 함께 12곳의 선교지역이 있다.

아르나찰 푸라데시지역의 선교지- 아쌈주의 선교지 -Karbi Anglong(카비 앙롱지역)- Manipur(마니푸르) - 트리푸라주의 선교지 - 실리구리선교지 등 미조람의 인접지역의 불신자들을 향한 구령의 열정으로 6지역의 선교구역이 있고, 전 인도를 향해서 콜카타와 뉴델리, 파트나(비하르)와 럭나우(우타푸라데시주), 그리고 네팔에 각 선교기지가 있다.

미조람 교회의 선교부산하에서 전도사, 교사, 간호사, 운전수로서 일하는 숫자가 863명이다.

일백년전 까지만 해도 머리사냥꾼으로 악명이 높았던 천민집단의 사람들이 복음을 통해서 이제는 영혼을 낚는 사냥꾼으로 부름을 받아 담대하게 이제는 전 인도를 향해서 나아가는 주의 군사로서 그 사명을 위해 헌신하는 변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의 삶의 모숩에는 문제는 있지만 선교적인 입장에서는 미조람교회는 분명히 인도의 전 교회에 귀감이 되고 있다.
영어회중교회 주일학교 소풍

출처 : 인도 김상수, 박은숙 선교사
프린트 메일보내기
관리자 모드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