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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목회, 신학 > 설교 등록일 2010-07-05
작성자 관리자 (admin)
이제 들으라!
사 44:1-4


"1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세상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헬라(그리스)의 철학이 세계제일이지만 그 철학의 기반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군데 나옵니다. 그런데 그 족보의 출발점이 다릅니다. 누가는 현재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핼라의 철학입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들, 헬라인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술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다릅니다. 마태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하향식 족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는 참 재미있습니다. 앞으로 하나 뒤로하나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은 무신론자인데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삶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알 때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국가관만 잘 확립하면 애국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관 없이 애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때 애국가가 나옵니다. 월드컵은 시작할 때 나오고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따면 나옵니다. 그 중에 제일 가슴을 뛰게 만드는 때는 월드컵 때 나오는 애국가인 것 같습니다. '두근두근 대한민국'입니다. 우리가 애국가를 들을 때 가슴이 뛰는 것은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났고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적인 운명을 띠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른다면 국가관이 생기기 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존재가 확인 될 때 어떻게 살아야 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말합니다.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 12:10)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씀드리면 세상철학, 그리스철학자와 마찬가지로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세요. 2절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나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만드신 분, 지어낸 분(디자인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저의 아버님은 강원도로 다니시며 보따리 옷 장사를 하시면서 저를 키우셨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글을 모르신 채 평생을 사셨습니다. 제가 육신의 부모님 밑에서만 자랐다면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원대한 비전과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습니다. 나를 디자인 하셨습니다. 예수를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육신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물질적 육체는 언제든지 회복이 가능합니다. 창조하시고 지으신 분은 다시 지어주십니다. 사람에게는 옷과 같을 뿐입니다. 우리가 옷을 만들잖아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의 육체를 옷과 같이 만드십니다. 그러나 살았으나 예수가 계시지 아니하시면 이미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들의 꽃과 같이 시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육체 의지하고 우리가 얼마나 더 잘살겠습니까? 그 육체를 위하여 뭐 그렇게 대단히 이루겠습니까? 이룬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바울이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때로는 이를 가리켜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주전 622년 요시왕 때에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어떻게 여호와의 율법책이 그렇게 오랫동안 성전에 있었는데도 그 책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유다 왕국에서만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주후 1517년 성경이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에 있었는데도 그 내용은 진정으로 알고 따르는 사람이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전건축이 뭡니까? 왜 성전을 건축 못해 그 안달을 떱니까? 어떻게 돈주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교회가 속입니까? 마틴 루터는 개인의 힘으로 그 로마 교황권을 부정했습니다. 교황이 성경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그도 사람입니다. 신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입니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는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내가 다 지게 되었습니다. 친구 따라서 강남 갔다는 식의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나의 출발점은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빨리 시작하는 겁니다. 아무리 마라톤을 잘해도 2-3시간 전에 출발한 사람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경기는 똑같은 시간에 출발하지만 인생은 다릅니다. 먼저 출발할 수 있습니다. 마라톤 할 때 보면 뒤에 오는 선수가 보이는데도 여간 해서는 뒤바뀌지 않는 것을 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늦게 된 자도 먼저 될 수 있지만, 먼저 된 자가 더 유리한 겁니다. 그 유리한 것을 가다가 낮 잠자서 헛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아마 택민이는 영어도 잘할 것입니다. 엄마가 영어를 잘하니까 잘하게 될 겁니다. 저는 글도 늦게 깨달았습니다. 어머님이 글을 모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어머니는 다른 것으로 저를 잘해주셨습니다. 옷 깨끗이 빨아 입히고, 먹을 것 맛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님으로선 최선을 다하셨지만 저에게는 빨리 터득했더라면 더 기초가 잘 준비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깨닫는 그 순간 우리는 새벽입니다. 이제 우리의 자세가 요구되고, 촉구되고 있습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분명히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해 살 것이냐 하나님을 위해 살 것이냐를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홍해를 앞두고 있습니다.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옵니다. 바로의 군대에 맞아 죽으나 홍해에 수장되어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그 홍해에 몸이 다 잠기도록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이 택하셨습니다. 제가 설문조사하면서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라고 하고 "스스로"라는 항목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역시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우리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올 사람이 없습니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라고 했습니다. 예정하고 선택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 "너를 도와 줄 여호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으니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책임지지 못할 하나님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신 것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축복은 3-4절에 잘 나타납니다.
"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찬양]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넘지 못할 파도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여
허덕이며 가야하는 우리 인생인데
이럴 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 밖에 없어요
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 가요

참지 못할 분노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참지 못할 슬픈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 살아 갈 길은 눈물의 골짜기
내 힘으로 참지 못해 늘 흐느끼네
이럴 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밖에 없어요
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가요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사 56:2)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으면 복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죽음과 자기 숙명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교통사고는 당하지 않을까? 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갑자기 죽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릴까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까봐, 직장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일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처한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무서운 것입니다. 실패를 했을 때 실패도 문제이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심리적 두려움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어떤 특별한 현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밀폐공포'라는 것이 있습니다. 갇히고 밀폐되면 겁이 나는 것입니다. 식은땀이 나고 혈압이 올라갑니다. 밀폐된 공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광장공포'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거꾸로 갇히면 편안한데 넓어지면 두려운 것입니다. 옛날 서양의 왕들의 침실은 엄청나게 넓습니다. 그런데 침대 위에는 지붕처럼 무엇을 씌워놓아서 잠을 자는 공간을 좁게 만들었습니다. 무슨 심리입니까? 너무 넓으면 잠이 안 오고 불안하니까요 잠자는 곳은 좁게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광장 공포입니다. '고공공포'도 있습니다. 높은 데만 올라가면 겁이 납니다. 이런 사람 아파트 높은 층에 살지를 못합니다. '세균공포'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데나 앉지 못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앉을 때에도 오무려서 앉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균이 득실득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씻어댑니다. 온갖 것에 세균이 우글거린다고 세균 없이 깨끗하게 하느라고 그토록 애를 씁니다. 이것 역시 공포증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지켜져도 이상하게 반대의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면역이라는 게 있습니다. 지나치게 보호되면 면역성이 떨어져서 문제입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깨끗하면 오히려 병이 많습니다. 적당히 때도 있어야합니다. 너무 빡빡 밀어서 살 갓이 다 벗어져서 피부과 찾는 사람이 많은데 피부과 의사 분들이 이태리 타월로 때 밀지 말라고 말씀을 안 하신 답니다. 죽는 것은 아니니까 자꾸 빡빡 밀어서 피부에 이상이 생겨야 피부과를 찾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의 문제는 두려움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쌓이면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삶을 살지 못합니다. 나중에는 건강마저 해치게 됩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쥐 1백 마리를 철책 속에 가두어 놓은 후 그 주위에 무서운 고양이 한 마리를 묶어 놓고 쥐들을 위협하게 만들었습니다. 1백일 후에 쥐를 꺼내어 해부해 본 결과 대부분의 쥐가 심장병, 암,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쥐들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을 주더라도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장육부가 오그라들어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자유 함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공포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야곱에게도 이런 약점이 있었습니다. 형들에게 매일 치어서 살다보니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도 허약했던 것 같습니다. 막내에 여성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야곱을 늘 걱정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약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나를 헤치려는 고양이가 아니라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을 물리치십니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하나님의 복을 더 많이 차지하고 싶어서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방법도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그의 속임의 대가로 엄청난 고난의 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에서는 세상 적으로 난 사람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멀리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였습니다. 자기가 힘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외면하는 사람은 그의 인생을 내버려두십니다. 잘 나가는 것 같아도 그는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것은 나의 가진 재능이, 축복이 하나님을 대항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겨 주님이 쓰시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와 달리 연약한 자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사냥을 잘해야 합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에 비해서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늘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간절한 기도와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승리자)'란 영광스러운 이름을 더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한가지 이름이 더 나옵니다. '여수룬'이란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하나님이 두 번이나 지어준 사람은 야곱뿐이 없습니다. '여수룬'이란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시적인 표현으로서 '정직한 자, 의로운 자, 사랑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 전체를 의롭게 받으셨다는 의미로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이름입니까? 우리도 '여수룬'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아브라함 링컨은 "하나님이 사람과 같은 존재를 하루살이로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들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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