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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목회, 신학 > 설교 등록일 2010-03-25
작성자 관리자 (admin)
안심하라
마 14: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나라는 교육열만 1위가 아닙니다. 1등할 필요 없는 것까지 1등입니다. 2008년도 우리나라 자살 사망률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4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자살 사망자는 인구 10만 명 당 2006년 21.5명에서 2008년에는 24.3명으로 한 해 동안 1만 2,858명이며, 전년 대비 5.6%가 늘어났습니다. 10년 전인 1998년 8,622명과 비교하면 49%가 늘어난 수치입니다. 하루 평균 35.1명이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한국에 이어 헝가리 21명, 일본 19.4명, 핀란드 16.7명, 벨기에 15.8명, 프랑스 14.2명, 뉴질랜드 12.2명, 미국 10.1명입니다. 자살율이 높다고 알고 있던 일본보다 5명이 더 많습니다. 미국은 심심하면 권총으로 자살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무려 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자살 원인으로는 염세, 비관으로 33.5%가 가장 많았고 병고 17.8%, 정신 이상 9.1%, 낙망 7%, 가정불화 6.4% 입니다. 특히 20-30대의 사망원인 중 자살은 40.7%, 28.7% 입니다. 교통사고에 이어 2위입니다. 자살의 원인이 경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이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 이건희 삼성 회장이 경영복귀 요청을 받고 한달 동안 고뇌를 한 뒤 내린 결론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기업은 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로 지금이 진짜 위기입니다. 청소년들이 교회는 오지 않고 자살을 저렇게 많이 하는데 위기가 아닙니까?

본문에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은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람이 가진 목소리는 다 특색이 있어 친한 사람의 목소리는 얼굴을 보지 않고도 누구인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 칼칼한 목소리, 마음이 편안한 목소리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목소리만 듣고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살아온 인생을 알 수 있다는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 탐지기도 음성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음성이 떨립니다. 진실한 음성은 다릅니다. 힘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곧습니다. 부드럽습니다. 떨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2천 년 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힘있고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있었던 작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배가 육지에서 상당한 거리를 떠났는데, 바람이 반대편에서 불어와 여간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절반은 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출신 들입니다. 한마디로 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아무리 힘을 쓰고 애를 써도 사나운 물결은 잠잠해 지지를 않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우리 인생도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을 만난 제자들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어렵다고 하지만 한국전쟁(6.25)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에게 제일 기억에 남는 사진은 노량진 역인가요 부모를 잃은 채 깡통하나 가지고 기차 옆에 서 있는 아이가 기억납니다. 저는 이 사진이 제일 감동스럽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슴아픈 일의 무엇인지 아십니까? 화물차 지붕 위에 앉아서 피난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차 위에 난간이 없지 않습니까. 간신히 매달려서 가는데 그만 안고있던 아들의 손을 순간에 놓친 것입니다. 저만치 떨어져 나간 아이를 바라보는 그 순간 부모의 가슴은 찢어진다고 해야 표현이 됩니까? 그 안타까움, 그 절망감, 무슨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2000년 전에 하나님이 그와 같은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얼마나 아프셨던지 하늘을 푸르게 열어놓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가리셨습니다. 땅이 부끄러웠습니다.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극심한지 땅이 떨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공포심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불안한 것이 아니라, 무서운 형틀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의 증거입니다.

614장 [얼마나 아프셨나]
(1)얼마나 아프셨나 못박힌 그 손과발, 죄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
하늘도 산과들도 초목들도 다울고, 해조차 빛을잃고 캄캄하게 되었네
후렴:오 놀라운사랑 크시고 끝없도다, 오 주님사랑에 구원의 강물넘치네

"안심하라"(Qarsei'te:달세테)는 원문으로 딱 세 번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안식이나 안심을 뜻하는 평안(샬롬,eijrhvnh:에이레네) 하고는 다릅니다. 한번은 본문에서 나온 것이고 한번은 같은 사건을 설명하는 평행구절 마가복음 6:50절에서 나왔습니다. 또 한번 나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번역성경으로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음 한 곳은 그 유명한 요 16:33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의 어느 부분이 본문의 "안심하라"(Qarsei'te:달세테)와 같은 단어 같습니까? "담대하라"입니다. 본문 마 14:27 과 같이 번역한다면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가 됩니다.
우리가 안심하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가면 사해바다가 있습니다. 이 바다에 들어가면 염분이 높아 몸이 둥둥 뜬답니다. 어떤 사람이 허우적거리면서 살려달라고 난리를 떠는데 사람들은 가만히 구경만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손만 들면 된다고 하더랍니다. 손만 들면 그냥 뜬답니다. 심지어는 책도 볼 수 있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손만 들면 됩니다. 갈릴리바닷가에서 자신들이 자랐고 경험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손을 들 때, 그 때에 '안심하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내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시나요.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연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타락한 인간뿐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에서 "안심하라" 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기차 위에서 아이의 손을 놓쳐버린 부모가 무슨 힘으로 살 수 있겠습니다. 주님이 없으면 미치는 겁니다. 제 정신으로는 살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와 위로 받지 못할 심령이 없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죄 사함 받음으로 안심하라.
예수님은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고 하셨습니다.
또한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을 때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고 하셨습니다.
여기 두 군데 잘 보셔야 합니다. 무엇을 안심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안심하는 겁니다. 병을 고쳤기 때문에 안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안심하는 것은 풍랑이 잔잔해 졌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예수가 계시기 때문에 안심하는 겁니다. 아기는 엄마 목소리만 듣고 안심하는 겁니다. 예수가 있으면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사람들을 안심시켜야 합니다.
저는 막 협박하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자기가 무슨 권능을 받았다고 하면서 협박하는 사람들. 여러분! 겁먹을 것 없습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우리를 협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안심시키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바울이 로마로 압송 되어갑니다.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배에 탔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배가 파산하고 다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호의 경우 백부장은 군인입니다. 그는 무력사용이 가능합니다. 선장은 기술자입니다. 그는 고도의 기능을 가진 자입니다. 선주는 배를 소유한 재벌입니다. 그는 돈으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력도, 기능도, 돈도 없는 가난한 전도자입니다. 그는 영적 지도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무시했고, 그의 말을 외면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고집과 소신은 다릅니다. 고집은 강할수록 손해고, 소신은 강할수록 좋습니다. 고집은 버려야 하고, 소신은 지켜야 합니다. 소신은 일을 성취하고 꿈을 이루지만, 고집은 인간관계를 깨트리고 분위기를 망칩니다. 고집이 센 사람은 사랑 받기 어렵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파산합니다.
사공들은 짐을 바다에 버리고 배의 기구들까지 버립니다(행 27:19). 배의 기구들이라고 하는 것은 배를 향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것들까지 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음은 목숨입니다. 사람이 죽을 일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몇 일 동안 해가 비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이 배에 누가 탔기 때문입니까? 십자가만 아는 바울이 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가는 바울이 탔기 때문입니다. 요나와는 반대입니다.
바울은 풍랑으로 죽게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행 27:22)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면 그대로 됩니다. 배에 탄 276명중에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모두 살았습니다.

천국 길은 좁은 길입니다. 쉬운 길은 넓습니다. 누구든지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은 힘이 듭니다.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러나 열매가 있습니다. 쉬운 길에 무슨 열매가 있습니까? 어렵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갈 때 인생에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요 세상이 악합니다. 말세 때가 가까울수록 세상이 더 악해진다고 했습니다. 사탄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이 예수 믿는 다니까요 말이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도요 옆집강아지만도 못하게 취급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통령에 대해서도요 너무 쉽게 말합니다.
세상에 이런 때가 이 나라가 없습니다. 큰 교회는 이요 기도할 때 핸드백 꽉 잡고 기도해야 됩니다. 언제 채갈지 모릅니다. 화장실에서 가서도요 잘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그래도 말만하면 우리나라를 표현하기를 '동방 예의지국' 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이요 무슨 예의가 있습니까? 심각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에는 예의가 존재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예의가 생깁니다. 우리가 있으면 얼마나 있습니까? 알면 얼마나 압니까? 김구선생님은 서대문 감옥에서 15년을 살았습니다. 무슨 공부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어머니가 갖다준 성경을 읽었습니다. 15년 동안 세계보다 더 넓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8-9)

우리가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겠습니까? 그 차이가 하나님께는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수고가 다 헛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은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믿을 때, 우리 인생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마지막 순간에도 안심하라는 주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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