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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교계, 문화 > 역사 등록일 2010-02-25
작성자 관리자 (admin)
성 루이스 호(St. Louis) 비극으로 풀어 보는 한 새사람
유렵 전역에 일어난 유대인 학살의 실체
영국 University Birmingham 에 있을 때 Isabel Wollaston 교수의 “Holocaust” 강좌를 듣은 적이 있다. “홀로코스트” 하면 “종말론에서 유대인 6백만명 죽게된 참혹한 과정이 성경 예언의 성취되었다”고 언급하는 정도였다. 총 10 강좌에 걸쳐 폴란드와 독일 그리고 유렵 전역에 일어난 유대인 학살의 실체를 들으면서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던가에 대해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들으면 들을수록 대부분 모르는 내용이었다. 역사적 사실로 제시한 자료도 엄청난 것이었지만 이렇게 상세하게 하나의 학문으로 규명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한 학기 동안 청강하고 그 다음 강좌는 “10 Theological Reflections on Holocaust “ 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분석을 하는 강좌였는데, 주로 10개의 큰 유대주의적 흐름으로 나누어 신학적으로 그리고 종교 사회적으로 분석한 강좌였다. 때로는 신학자들의 육성 테이프를 들려 주기도 하고 때론 그들의 신학 사상에 관한 자료를 나누며 심도깊게 분석하는 과목이었다. 너무나 방대한 자료와 역사적 연구 가운데 “단 한개도 홀로코스트의 신학적 해석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과 연계된 것은 없었다”는 점이 의아했다. 이는 강좌 자체가 기독론적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예 배제했기에 유대학 강좌인 그 과목에서 그것을 기대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다음 학기에는 각자가 홀로코스트와 관계된 사실을 조사 연구하는 과제가 그 다음 강좌에 주어졌다. 나는 이 과목을 통해 많은 유대인 생존자들과 그들의 후손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과목으로 인해 참으로 많은 내적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우선 서유럽의 홀로코스트만 일부 알았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그렇게 엄청난 유대인 학살이 있었음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연구하면 연구할 수록 더 많은 탐구 과제들이 주어졌고 궁굼점은 점점 더 많아졌다. 동유럽과 서유럽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으면 결국은 국소적 지식으로 많은 역사적 사실을 예단하게 될 것이라는 염려가 앞섰다. 그런데 문제는 예기치 않은 강좌에서 터졌다. 세파르딤(Sephardim) 유대인에 대해서 어렴픗이 알던 내가 “Christian and Muslim Relations”라는 David Thomas 교수의 강좌를 듣다가 이미 450년 전에 스페인에 홀로코스트가 있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 것이다. 1492년에 스페인은 유대인 대 추방령을 발포함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천년을 넘게 살아 왔던 터전을 빼앗기고 북아프리카로, 서유럽으로 그리고 일부는 남아프리카와 신대륙으로 쫒아 낸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에 일어난 “또다른 홀로코스트”였다. 이 강좌에서 점증하는 유대인 역사에 대한 궁금증으로 인해 수많은 책들을 섭렵하기 시작했고,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David Thomas 교수를 찾아 가서 이슬람 역사 가운데, 서구 기독교 가운데 생존한 유대인 역사에 대한 자료를 요청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중세 스페인어를 스스로 연구해서 번역하던 중이었고(?) 그가 갖고 있는 원자료와 많은 관계 자료들을 건네 주었다. 그의 허락하에 자료들을 차근 차근 복사해 놓았다. 이를테면 때가 되면 정리하고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대학 도서관에서 특히 중세 역사를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중에는 유대인의 관계 역사, 기독교인들이 행한 십자군의 잔혹한 역사가 눈에 들어 오기 시작했다. 더불어 미쉬나 뿐 아니라 탈무드, 탈굼, 그리고 미드라쉬에 이르기까지 유대교에 관한 연구가 역사적 사실 연구로 끝날 일이 아니라 유럽 전체 역사를 통합적으로 볼 때 파악할 수 있음을 보게 되었다. 유대교에 관한 관심이 점증하게 되자, 거리를 걸어 가도 고서점이 보이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유대교에 관한 책자를 구입할 수 있었다. 역사 유적지를 가면 예기치 않은 헌책방에 들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유대교에 관한 책자가 있었고, 이슬람에 관한 책자(영국에 점증하는 영어권 모슬렘으로 인해)도 있어서 주머니 다 털어서 책을 구입하였다. 때로는 차 트렁크에 책을 가득 채울 정도로 책을 구입했다. 유적지를 가자고 억지로 끌려 가던 딸이 두 부녀가 다 책을 들 수 없어서 딸은 책을 지키고 나는 여러번 책을 자동차 주차장까지 운반한 적도 있었다. 집에 돌아 와서 그렇게 구입한 책을 놔두고 잠을 자려고 하니 잠을 잘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너무나 궁굼한 역사적 사실이 많아 읽게 되면 어느새 나머지 새벽 4시 때론 새벽 6시까지 책을 읽게 되었다. 잠은 자나 마나 하고 곧장 대학의 강좌를 들으려 떠나던 날들이 매일 매일 계속되었다.

유대교와 이슬람 연구에 탐구욕은 시간이 갈수록 더 많아지기만 하고 그 갈증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어렴픗하게 이슬람과 유대교에 대한 강좌와 서적들 그리고 도서관의 자료들에 대한 탐구 과정이 나의 신학적 질문에 대한 의문점과 연관관계들을 하나씩 풀어 내 주는 계기가 된 것이 틀림이 없었다. 나는 몸으로, 현실적으로 유대인과 아랍인의 증언을 듣고파, 유대인 회당을 방문하기도 하고,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과의 만남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그 때 참여하게 된 것이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크리스챤들의 모임인 “Christian and Jews Dialogue”였고 이를 통해 많은 증언들을 들을 수 있었다. 같은 방법으로 영국에서 가장 무슬림 인구 비율이 높은 버밍엄시에 있는 무슬림들을 만나게 되고 또한 대화와 토론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들과의 생생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눈만 감아도 중동으로부터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의 이슬람화 과정이 마치 살아있는 영화의 장면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오스만 투르크의 등장으로 소아시아, 중앙 아시아, 중동 그리고 동유럽에 군림했던 이슬람의 강력한 영향과 뿌리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터키의 세속주의 정부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연원을 상고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유대교와 이슬람 연구에 몰두하던 시기에 버밍엄 대학의 이슬람 강좌 가운데 근대 이슬람 정치 운동에 관한 강좌가 있었다. 북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터키에 일어난 해방 운동과 세속주의 정부의 출현에 관한 부분이었다. 근대화와 동시대 이슬람 정치 형성사와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 Brotherhood 운동의 과정 그중에서도 특히 이집트의 역사를 보면서 그동안 나는 중동 지역의 역사에 거의 맹목적으로 서구 중심적 역사관을 갖고 있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이 모르는 것만 나오는 것 같아 학문하는 작업에 대한 절망감에 잠길 때도 많았다.
독일 함부르그에서 성 루이스(St. Louis)호에 승선하는 유대인들


“이슬람과 이스라엘”의 양 줄기에 대한 나의 학문적 그리고 역사적 탐색의 기간도 끝나갈 무렵, 박사 학위를 마치게 되었고 보스톤으로 “가라”는 주님의 음성에 따라 보스톤으로 오게 되었다. 이곳에 오자 마자 전도하고 싶은 열정에 만난 그룹이 “Jews for Jesus”였다. 이곳에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의 자녀이며 영국 출신이 Jonathan Bernd 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의 부인은 유대식 곡조를 넣은 CCM 음반을 낸 Grace Chapel 의 Song Leader 중 하나였다. 그리고 뉴 잉글랜드에 산재한 Messianic Jewish Synagogue 에서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고 유대인과의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를 계기를 무슬림에서 개종한 아랍계 교회에서도 또한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고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 그리고 이집트에서 온 그들과 교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프리카 계통의 유대인과 레바논 모슬렘이었던 형제와의 만남을 갖게 되었고 그들이 요청한 집회에 말씀을 증거할 기회가 있었다. 레바논 출신의 모슬렘이었던 그의 부인은 놀랍게도 정통 유대인이었다. 이들 부부는 놀랍게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극적인 주님과의 인카운터가 있었던 분들이었다. 이스라엘과 이슬람, 유대인과 모슬렘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이들이 하나가 되어 모슬렘 선교와 유대인 선교를 뉴 잉글랜드에서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을 화해되게 할 수 있을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보혈만이 화해케 하심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놀라운 사실 가운데 터키를 향하여, 중동권을 향하여, 북아프리카, 중앙 아시아, 동남아의 모슬렘을 향한 기도의 마음을 주셨다. 세상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은 하나님의 레이더에 잡히는 개종과 부흥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이렇게 이슬람권과 유대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열매를 맺는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게 전부는 아니지만 유대인과 아랍인의 화해를 보개 해 준 사건이 있었다. 그곳은 밴쿠버에서 개최된 North America Prayer Summit 에서 증언한 유대인 형제 Gulio Gabeli때문이다. 맑은 미소 가운데 슬픔이 베어 있는 형제이며, 그의 목소리에는 그 무언가 깊은 고난과 아픔의 무게가 담겨져 있었다. 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손으로 캐나다 정부가 유대인 이민자들을 받아 들이게 된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였다. 이는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직전에 일어난 한 선박의 사건을 통해서이다. 1939년 5월 13일, 독일의 함부르그 (Hamburg)에서 모두 938명의 승객을 실고 쿠바의 하바나(Havana, Cuba) 로 출발한 배가 있었으니 이름은 성 루이스(St. Louis) 호이다. 대부분 독일의 제3제국 (Third Reich)으로부터 피난 나오려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독일 시민권자들이었으나 일부는 동유럽과 무국적자(stateless) 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미국 비자를 신청하였고, 미국에 입국할 때까지 한정적으로 쿠바로 머무르는 계획 가운데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국 행정부는 저들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는 방침 가운데 있었다. 그래서 미 국무부는 하바나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 연락을 취하고 이들 유대인 승객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저들 전부를 유럽으로 돌려 보내라는 전갈을 보낸다. 이것이 바로 1938년 11월 9-10일에 명명된 “Kristallnacht 학살(수정의 밤(Night of Crystal)이라는 뜻으로 “깨어진 유리 조각(Night of Broken Glass)이라고 알려져 있음)” 계획 때문이다. 독일 정부는 이 계획을 창안하고 외교 노선을 통해 나찌의 반유대적 목적과 정책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민 정책을 허락하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성 루이스(St. Louis)호 항해 계획


성 루이스호의 주인은 쿠바에 당도하기 전에 이러한 문제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쿠바 이민국장(Cuban Director-General of Immigration)인 Manuel Benitez Gonzalez)에 의해 발급받은 비자가 배가 당도하기 일주일 전에 쿠바 대통령 부르(Cuban President Federico Laredo Bru)에 무효화 된다. 그리고 저들이 쿠바에 한시적 입국하는 것만을 위해 쿠바 국무 노동부에 내야 하는 공채(Bond)가 무려 500 달러나 되었다.(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이나 미국 관광객은 면제됨) 이로 인해 성 루이스호는 각국 언론매체의 조명을 받게 된다. 유대인들이 함부르그를 출발하기도 전에 쿠바의 우익 신문은 임박한 저들의 도착 소식을 전하였고, (이의 영향으로?) 결국에는 쿠바 정부는 유대인 피난민의 입국을 저지하게 된다. 이 와중에 곤잘레스 이민국장은 불법으로 150불 또는 더 이상의 가격을 받고 입국증서(Landing certificates) 를 판매해서 물려 50만 불에서 백만불의 거액을 챙기게 된다. 미국과 쿠바에 불고 있는 불경기로 쿠바 정부 내에는 부패 세력이 팽배하여 이민자들부터 뇌물을 착복하는 것이 성행하던 때이다. 당시 쿠바에만 성 루이스호 도착 이전에 이미 입국한 유대인의 수만 2,500명 달하였고 쿠바 정부는 저들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유대인 이민자에게 적대적인 태도는 반셈족주의(anti-Semitism)을 불러 일으켰고 나찌 요원에 의해 저들 유대인은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1938년 5월 8일, 성 루이스호가 함부르그를 출발하기 바로 5일 전에 전직 대통령 그라우 산 마틴(Grau San Martin) 에 주도에 의해 “유대인 마지막 한명을 나 내어 쫒기까지(fight the Jews until the last one is driven out)” 투쟁할 것을 천명한다. 이 데모에 참가한 인원이 무려 4만명에 달하고 라디오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청취하기에 이른다. 그해 성 루이스호가 5월 27일 하바나에 당도하자, 쿠바 정부는28명의 입국을 허용하는 데 그 가운데 22명의 미국 비자를 갖고 있는 유대인과 4명의 스페인 국적을 가진 사람과 두 명의 쿠바인 포함되었다. 입국 불허에 대해 자살을 시도한 한 명의 승객은 하바나의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908명(이 중 한명은 항해 도중 질병으로 사망함)은 대기 중이었으며, 그들 중 743명은 미국 비자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었다. 쿠바 정부는 이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고, 이 같은 사실이 언론매체를 통해 북미와 유럽에 이 소식을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39년 6월 쿠바에 머물던 성 루이스호


쿠바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은 이 배는 6월 2일 쿠바를 떠나 마이애미로 항해하게 되나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는 어떤 입국 허락도 하지 않는다. 당시 83%의 미국인들이 미국의 불허 방침에 반대한다고 Fortune Magazine 이 전하고 있으나 미 행정부는 그들의 정책과 방침을 바꾸지 않는다. 미 행정부는 6월 6일 성 루이스호를 유럽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들은 캐나다 정부에게 입국 허용을 요청하나 역시 거절당한다. 유대 단체들은 협상을 통해 288명은 영국으로, 181명은 네덜란드로, 214명은 벨기에로 224명은 프랑스에 임시 체류하도록 한다. 이들중에 영국에 가게 된 288명 가운데 한 명만 공중 폭격으로 사망하고 나머지는 모든 생존하게 된다. 서유럽 대륙으로 가게 된 620명의 승객 가운데 87명(14%) 만이 독일 침공 있기전 이민에 성공하여 살아 남게 된다. 유럽 대륙에 남은 자중 278명이 홀로코스트 가운데 살아 남게 되고 254명은 죽게 되는 데 죽은 유대인은 벨기에가 84명, 네덜란드 84명, 그리고 프랑스86명에 이른다.
당시 하바나 항구에 정박할 당시의 유대인 승객들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뒤의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된 캐나다에서는 유대인들을 돌려 보낸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홀로코스트가 끝난 뒤에 생존자들을 찾아 다니면 저들에게 캐나다 이민을 허용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번 North America Prayer Summit 에 와서 증언한 Gulio Gabeli 뿐 아니라 James Luunney 하원 의원도 캐나다 연방 정부가 이스라엘의 국회의원들을 캐나다로 초청한 이유를 설명해 준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이 캐나다 정부에 의해 생각 이상의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되고 이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호감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캐나다 연방 정부는 이스라엘과의 우호적 관계 유지 뿐 아니라 많은 교회들을 통해 민간 차원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교류를 진행하도록 독려하고 있다고 한다.

많은 교회들이 좀 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갖고 정부와 국가를 상대로 설득했다면 희생자를 줄일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 주님 오실 때에 같은 마음으로 좀 더 많은 유대인이 그리고 아랍인이 구원받았으면 하는 생각도 같은 선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형벌과 심판이 있기전 선포될 구원의 메세지가 인종과 나라와 국가를 넘어서 증거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긴 2000년의 역사 가운데 남은 유대인들에게 이제 진정한 복음이 들어 가도록 한국 교회도 많은 긍휼과 도움을 손길을 아끼지 않을 때이다. 혹자는 유대인 선교와 친이스라엘 정책이 아랍 진영에 반발을 불러 일으키고 또한 선교의 불균형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 지적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민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관점에서 본 다면 유대인이나 아랍인의 이분법이 아닌 차별없는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모든 사람을 하나로 엮어 주는 “한 새사람(엡 2: 11-22)” 이 되게 하시는 경륜의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번 North America Prayer Summit에 참여한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유대인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에게 오랜 사역을 해 왔다는 점이다. 그들의 사역 가운데 오직 복음만이 유대인과 아랍인의 벽을 헐 수 있는 놀라운 역사들을 간증하였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6절의 말씀이 새삼 유대인과 비유대인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복음의 능력을 상기시켜 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에베소서 2장 15절이 말씀하는 것이 바로 유대인과 모든 이방인이 한 새 사람이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the enmity in his flesh, the law of the commands in ordinances having done away, that the two he might create in himself into one new man, making peace,

작고 작은 자 김 종필 올림
Rev. Elijah JF Kim,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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