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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목회, 신학 > 설교 등록일 2010-01-18
작성자 관리자 (admin)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아이티는 지난 2010년 1월 12일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중심으로 지진이 덮쳐 온 나라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번 지진으로 아이티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300만 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이티는 아프리카의 빈민국보다 더 못사는 나라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진흙쿠키'를 만들어 먹는 나라입니다. 아이티는 18세기 프랑스 식민지였는데 이 때 백인들이 50만 명이 넘는 흑인들을 노예로 아프리카에서 들여와 설탕, 커피 등을 생산하게 하고 막대한 부를 가져갔습니다. 노예들은 1791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나폴레옹 군대까지 동원되었지만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아이티는 1804년에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그래서 아이티 혁명은 흑인이 독립을 쟁취한 최초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은 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1838년에는 프랑스에 공식적인 승인을 받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는데 돈이 없으니까 이 돈을 다시 프랑스로부터 빌리는 것으로 해서 1862년이 되어서야 승인을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19세기에 아이티 중앙은행은 프랑스 자본으로 세워졌습니다. 1880년부터는 사실상 미국 자본이 아이티를 장악했습니다. 미국은 자본만이 아니라 1915년부터 34년까지 무력으로 아이티를 장악했습니다. 이 때부터 아이티는 미국의 식민지 나라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1995년 5월에 사할린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는 무너졌고 2,500명이 매장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변란 속에도 건재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레닌 동상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는 대충 지었지만 레닌 동상은 잘 만들어 세우고 관리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식이 되면 안됩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쓴 마지막 편지입니다. 바울은 순교의 시간이 임박해 오는 것을 깨닫고 에베소에서 어렵게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를 위로하고 힘과 용기를 주고자 이 편지를 기록했습니다. 디모데는 나이가 어린 목회자이며 몸이 쇠약하며 의기소침한 상태였습니다(딤전 5:23). 바울이 디모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3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간절히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이 임박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안위보다는 하나님의 교회를 목회하는 디모데를 생각합니다. 그가 그리고 모든 두려움과 연약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일꾼으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을 통해서 디모데에게 전한 말씀은 예수께서 오늘 우리를 바라보시며 하시는 말씀이라고 확신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육체적으로 병이 들었다 할지라도, 성격이 소심한 디모데와 같다 할 지라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말씀은 두 가지 마음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주었겠습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겁쟁이가 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늘 하나님의 일을 망칩니다. 불신앙을 가져다 줍니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압니다. 농약을 치지 않고는 농사짓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요. 그래서 농사짓는 분들은 농약을 치지 않았다는 말을 잘 안 믿습니다. 그만큼 유기농 농사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기업이 있습니다. 해충의 천적인 곤충을 찾아내어 그것을 보급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해충이라면 능력과 사랑과 절제는 두려운 마음을 잡아먹는 천적인 곤충입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불신앙이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 때 가나안 정탐꾼들의 불신앙입니다. 자기들은 정탐한 것을 보고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낙자손들의 거대함에 기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신 1:28)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두려워 하는 마음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데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보면 낙심하게 됩니다. 모세는 다시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신명기 1:29)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야합니다. 두려우면 어떻게 길을 떠납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가야합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타조는 100kg이 넘는 무거운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개가 있지만 모양만 있을 뿐 그것으로 날수는 없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딱딱한 갑옷도 없습니다. 뿔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뒷발질을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타조가 야생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요?
타조는 사람의 시력보다 최소 25배나 뛰어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머리 뒤쪽으로는 발달된 귀가 달려 있습니다. 눈으로 보든지 귀로 듣든지 사방 어느 쪽에서 적이 다가오든지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속 80km이상 달릴 수 있는 다리가 있습니다. 어떤 동물도 타조처럼 오랫동안 빨리 달릴 수 없습니다. 타조의 쓸모 없는 날개와 무거운 몸만 생각한다면 타조에게 삶은 저주 자체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동물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발과 발달된 시력이 있어 타조에게 새로운 힘과 삶에 용기를 줍니다. 타조처럼 자기 장점을 발견하면 살맛이 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능력 있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세 가지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라고 했습니다. 절제하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절제를 생각할 때 인내를 생각합니다. 꾹 참는 마음을 생각합니다. 화가 났을 때 참는 것, 물론 이것도 절제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절제란 타조처럼 사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장점을 보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절제가 안되면 자기 자신의 비참함만 기억합니다. 만사에 있어서 남의 탓만 합니다. 돈을 버는 사람은 전쟁통에도 돈을 법니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는 공장 직공의 아들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양털 장사의 아들이었고 링컨은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던 멜기세덱이 나옵니다. 히 7:3에 보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출신성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비가 누구인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어디서 자랐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전쟁에서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베풀었습니다. 2절에 보면 그의 이름의 뜻을 설명했습니다.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라고 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자신의 신분을 극복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보통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길을 가는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드려진 물질은 하나님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의의 왕이여 평강의 왕입니다. 절제가 되니까 의의 왕이 되는 것이고 평강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절제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두려움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무서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고 했습니다.
이 뜻이 무엇입니까? 능력이 무엇입니까? 말로만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고 우리에게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하셨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느헤미야 5장에 보면 성벽건축을 하는 중에 유대민족이 난리가 났습니다. 이유는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의 땅을 차지하고 종으로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이 문제를 진정시킵니다. 먼저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8절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느헤미야는 형제들을 포로에서 구해왔습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그는 일생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이제 와서 동족을 파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느헤미야의 행함이 없다면 말하지 못합니다. 똑같이 자기 이익을 도모했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합니까? 혹 말을 해도 그들은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 때 페르시아 총독으로 13년을 있었지만 마땅히 받아야할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희생할 때 비로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감옥에 두 번째 갇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비록 처형당하지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진정한 능력은 병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 가신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디모데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아는 것하고 사랑을 하는 것하고는 다른 문제입니다. 사랑을 하지 않았다면 사랑에 대해서 박사논문을 써도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사람들은 잘못된 사랑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원인에 대해서 창세기 6장에 나옵니다. 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잘못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탈한 사랑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아내를 구했습니다. 세상 아내를 구하면 세상 말만 듣습니다. 솔로몬이 그래서 망했습니다.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본처 외에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여자들을 후궁으로 끌어 들였습니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후비 700에 빈장 300이었습니다. 이 여자들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예루살렘 궁전에 여기 저기 우상단지를 놓고 섬겼습니다. 이것이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갈라지는 이유였습니다.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왕상 11:11)고 하셨습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교육은 환경이 중요합니다. 술, 담배를 잘하는 친구를 만나면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웁니다. 못 먹던 술도 자꾸 마시게 됩니다. 불평하는 사람을 만나면 같이 불평만 늘어놓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자살 사이트에 가면 자살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평안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면 평안을 얻게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

사람이 동물하고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동물처럼 육체적인 사랑만 하지 않습니다. 이성적인 사랑, 영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할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을 보셨습니까?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저는 택민이를 보기 이전에는 무슨 일이든 의미를 모르고 하면 헛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 가운데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의미를 알고 하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의미를 몰라도 헛것이 아닙니다. 택민이가 먹을 것보고 기도할 때 일단 두 손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유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택민이가 기도의 의미를 알까요? 그러면 우리는 압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도하는 택민이의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신 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물을 맡기셨습니다.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세계를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정을 맡기셨습니다. 우리 주앙교회를 맡기셨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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