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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학자료 > 논문 등록일 2009-07-03
작성자 관리자 (admin)
동남아 최초 선교사회의 넷트워킹에 대한 사적 고찰
- Ultra-Ganges Mission을 중심으로(1807-1834) -


I. 머리말

1. 세계한인 선교사회와 Networking

세계 한인선교사회는 선교 현장에서 자신들을 돌아보며 이젠 “한국 선교사의 질을 높이는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자성의 바람”(신홍식p6)이 일어 나고 있음을 느끼고, “올바른 선교방향을 설정하는 책임자”란(이은무p4) 자각을 통해 선임선교사를 중심으로 “한인지도력개발회의”를 개최해 왔다. 김정웅선교사는 지도력개발회의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한국 선교사들의 수에 비해 질적인 성장의 필요성을 느끼며 선교에 관한 한 전문가들인 선임 선교사들의 지도력을 향상시켜야 될 필요성”이라 했고, “급증하는 선교사들의 수에 비례하여 많은 갈등과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선임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자체 진단과 평가, 반성 등을 통해 새로운 출발과 후배 선교사들에게 지침을 주어 선교사의 문제점들을 선교사 차원에서 해결키 위해서는 이런 모임의 필요성을 느꼈다”했다.(p266-267).

제1차 태국 방콕에서(1995.11.1-8), 제2차 남아공화국 프리토리아(1997.6.24-30), 제3차 필리핀 마닐라(1999.6.21-25)에서 2년마다 모이면서 꾸준히 제기된 주제는 선교 현장에서의 협력관계 문제였다. 선교사간에, 선교 현지 교회와 지도자간에, 한국교회와 선교 단체들과의 협력관계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어 왔고(제1차 회의), 효과적이며 폭 넓은 협력관계 구축을 위해 “네트워킹”이란 용어가 관심을 끌게 되었다.

제2차 회의에서 김종국 선교사는 “선교전문성 개발을 위한 네트워킹’(p111)을 발표하였고, 김유식 선교사는 ”국제 교류의 증진으로 다국화, 다변화“ 되는 선교환경에서 ”선교 네트웍(Net-working)“ 형성의 시급성을 지적하였다.(p211) 한정국 선교사는 새로운 타입의 선교사로 ”007 제임스본드와 맥아이버의 주요 기능을 합성한 인물로 생각해 볼수 있는“ 정보통 선교사, 즉 ”통신 네트웍 기능을 감당하는 선교사“를 제의키도 하였다.(p149). 황태연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국 선교사의 Networking을 통한 효율적 선교“를 발표하면서 한국문화와 심성을 바탕으로 ”한국 전통의 세계관에 따른 새로운 Network 형태를 이루어 나가야“함을 주장하면서, ”이는 인간을 단순히 정보 창고로 보는 것을 넘어 진정한 영적 존재요, 그리고 하나이면서 다이고 다이면서도 하나로서 사는 그러한 지체적 사고 구조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고 제의하였다.(제3차 회의 자료집). 이에 따라 ”세계 한인선교사 지도력 개발회의 99‘ 마닐라 선언문“에 ”한인선교사는 선교사 상호간은 물론 대외 기구들과의 협력 체계를 형성하여 우리의 정서에 부합하는 Network을 개발, 활성화 함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사역의 효과를 극대화하도록 한다(제10항)고 참가자 일동 이름으로 결의 선언하였다.

세계한인선교사회는 제2차 회의에서 협력선교를 확장시키며 효과적으로 수행키 위해 지역별로 모이기로 하였고, 제3차 회의에서 “콸라룸푸르‘에서 1999. 10. 25-29 열기로 결의하여 99’아시아 지도력개발회의”가 첫 번째로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2천년대 아시아를 향한 한인선교”를 “네트워킹을 통한 구체적 협력 방안 모색”으로 설정하였다.

2. Networking에 대한 선교학적 정의

한인 선교사회는 Networking이란 용어를 사용 함으로써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네트워킹이란 주로 정보 사회에서 전달 매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달 내용이 아니라 전달 수단으로써 사용되기 때문에 네트워킹이란 복음의 내용이 아닌 선교사간에, 선교 단체와 교회 간에 연결 수단 또는 매체를 구축하자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신학적인, 선교학적인 정의가 필요하다.

1) 네트워킹에 대한 일반 사회의 이해- 오늘 우리 한국사회에서 “연대”란 말로 사용되고 있음을 본다. 즉 “참여연대”, “시민연대”, “정의연대”, “노동연대”, “여성연대”, “환경연대”등등이다. 이러한 “연대” 개념은 단순히 연결 통로나 수단, 매체가 아니라 어떤 이상과 목표해 향해 결집하고 성취를 위해 나가는 뜻에서 “Networking"을 ”연대“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선교연대”, “선교사연대”라 하면 어딘지 투쟁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것 같아 복음 선교 개념에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2) 네트워킹에 대한 신학적 이해- 신학적으로 네트워킹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us)이며, “성령의 교통하심”(Communio), 즉 “성도의 교제”(Koinonia)란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사도신경의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을 믿사오며”의 “Konionia Hagion”이며, “Comminio Sanctorm”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지상의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며, 지체이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통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그리고 온 세계가 성령의 역사 안에서 하나임을 체험하고,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고 실현시키는 일에 참여하는 공동체(교회)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Corpus Christus", "Communio Sanctorm"은 교회의 사명인 선교에서 ”Kerygma"(말씀선포), "Koinonia"(성도의 교제), "Diakonia"(섬기는 삶,봉사) 구조를 갖게 된다. 최근 루터교 세계 연합회에서 세계선교를 위한 교회 주제를 “Communio/Koinonia"로 다루었으며(Heinrich Holze: Documentation, The Church as Communion, LWF, Geneva,1997),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도 ”교회의 본질과 목적“을 Communio/Koinonia에서 찾고 있음에서도 알수 있다.(The Nature and Purpose of the Church"WCC/Faith and Order1998.11.).

네트워킹이란 개념을 신학적인 개념을 포함한 성서에서 찾는 다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평안을 매는 줄”, “평안의 고리“라 할 수 있다고 본다. 이점에서 선교사는 복음 선교의 고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요,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하나 된 복음전도의 고리라 할 수 있다. 19세기 선교를 일으켰던 아더 피어슨(Arther T. pierson)은 잃어버린 죄인들과 하나님 과 화목의 네 고리에 대해 말하였다. 즉 끊어진 율법의 고리를 대신하는 십자가의 고리, 끊어진 의로운 삶의 고리를 대신하는 부활의 고리, 성령께서 끊어진 사랑의 고리를 제공하셨고, 성령의 기름 받아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입술들의 화목의 고리로 세계선교를 독려하였다.(”이 시대의 젊은이의 세계선교, 생명의 말씀사1994. p33)

3) 선교학에서 사용하는 네트워킹- 선교학에서는 1910년 에딘버러의 세계선교 대회에서 협력과 일치촉진(Co-operation and the Promotion of Unity)을 다루웠고, Max Warren(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총무)은 1955년 메릭강좌에서 복합 사회에서 세계선교는 “동반자”(Partnership)로써 참여해야 함을 다루워 파트너쉽“(Partnership) 개념을 선교학에 사용하였다(Partnership, The Study of an Idea, SCM Press1956).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삼위일체론적 구조에서 선교를 다루어 ”선교는 우리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인 하나님의 총체적인 역사 하심“을 주장하였다.(Trinitarian Doctrine for Today's Mission,1963).

또한 선교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효과적인 선교 개념으로 네트워킹을 사용하기도 했다. 맥가브란(D.A.McGavran)은 복음확산 통로로써 ‘네트웍“(Network)이란 개념을 ”관계성의 망“(Webs of relationships)인 ”동질성 네트웍“(Homogeneous Networks)을 주장하여 교회성장학을 세웠다.(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n, pp45-52, cf Roger S. Greenwar: Cities Missions' New Frontier, Baker Book House, pp123. D.A.McGavaran: The Bridges of God, World Dominion Press 1961, pp8f)).

네트웍 개념은 최근 도시 선교학자들에 의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디모데 몬사마(Timothy M. Monsama)는 성서의 “그리스도의 몸”이란 개념을 도시의 상호관계성(Interrelationalships) 구조의 모형으로 보고 “서로 맞물린 관계성의 망”( a Web of Interlocking Relationships)을 사회과학에서 “네트웍”(Network)라 부른다 했다.(“The Intersecting Views of the City",op.cit.p121) 몬사마는 ”인간관계성 네트웍“(networks of Human Relationships)을 제시하며 도시사회에서 인간 관계성을 도구로 선교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했다(”Research as a Tool for Evangelism",op.cit pp126f)

헐버트는 사회 기본 연결망인 혈연, 지연, 친근 관계 구조에서 복음선교가 이루어짐을 지적하고“ 사회조직의 가장 단순한 기본 형태와 상호관계성인 ”사회고리“( a Social Network)에서 복음선교를 주장하고 있다.(Paul. Hiebert: Incarnational Ministry, baker Books, 1995).

박종구는 상호 협력관계 구축으로써 “네트웍”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해외 한인교회의 네트웍, 국제 네트웍등으로 이런 네트웍은 조동진이 “선교단체에서 선교협력 네트웍 형성으로”(요삼1:5-8) 제시했다고 하면서, 한국교회 병리현상에 대한 치유 길은 “역활분담으로 전문화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하자”고 제시하였다.(박종구: 세계선교, 그 도전과 갈등, 신망애사 1994. pp68-69)

이상에서 우리는 선교학 및 선교현장에서 사용되는 “네트웍” 개념을 살펴보았다. 상호협력관계를 구축하며 동반자로써 사용되고 있으며, 선교현장에서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서도 상호 인간 관계, 문화적 동질 성 속에서 네트웍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한인선교사회에서 다루고 있는 “네트워킹을 통한 구체적 협력 방안 모색”이란 상하구조, 주종관계 속에서의 협력이 아니라, 전문 분야, 역할 분담을 통해 상호 협력하는 새로운 선교 구조를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선교의 협력 구조로써의 네트워킹을 동남아시아 최초 선교사회인 울트라 간지 선교부(Ultra-Ganges Mission)를 조명함으로써 지난 천년을 평가해 보고 새로운 천년의 방향을 제시하려 한다.


II. Ultra-Ganges Mission의 형성

1. 첫 개신교 중국선교사 Robert Morrison

모리슨은 개신교 첫 중국선교사로써 1807년 9월 1일, 광동에 도착하였다. 중국선교의 문은 굳게 닫혀고, 광동(Canton)과 마카오 일부 지역만 무역 위해 외국인 거주케 했으나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요 외국인이 중국인을 접해도 안되며, 중국인 외국을 접해도 극형에 처하는 중국선교사로 중국 땅을 밟은 것이다. 런던선교회는 중국선교를 위해 당시 1786년 영국령지로 편입된 페낭(Penang, Wales 섬 지방)의 중국 이주자들에게 선교하는 것을 계획했지만 직접 중국 본토로 파송키로 결정하였다.(B.p3)

모리슨은 1782년1월 5일, 경건한 농부의가정 영국 노덤버랜드 지방 모퍼스(Morpeth)에서 팔남매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부친은 모리슨이 3세때 뉴캐스틀로 이사하여 구둣골 제조업에 종사하며 뉴캐스틀장로교회에 출석하였고, 20세때(1802) 전도자의 길 가기로 결심하였고 1803년 런던의 혹스톤(Hoxton Academy)에서 신학 수업중 선교사 활동 소개지인 “에딘버러 평론‘지를 읽고 선교사로 결심하였다. 1804년 런던선교회로 찾아가 선교사 훈련학교인 고스포트(Gosport)의 험프셔(Humpshire Academy)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아프리카로 지망했으나 보그스(Dr Bogues)학장의 권고로 중국으로 변경하였다.

당시 런던선교회(1795년 설립)는 영국교회 모즐리(William mosley)목사가 1798년3월7일 중국어 성경번역 위한 선교회 설립을 제의하엿고, 1804년 런던선교회 총무는 모즐리목사의 중국선교와 중국어 성경번역 제안서를 받앗다. 이때 스코트(Mr Scott)로부터 말라카 해협 영궁영지가된 웰레스섬(Wales Island, penang)에 선교부를 설치 추천하는 서신을 보냈다. 중국어로 성서번역 위한 최상의 지역을 웨레스섬(페낭)이나 마카오라하였다.(J.p71) 이에따라 런던선교회 1805년 5월 9일, 제11차 총회에서 성서번역을 주임무로하는 중국선교사 파송을 결의하였다.(J.p72) 당시 중국은 외국인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엄금하였고 사향으로 다스렸으며 외국인들은 무역을 목적으로 국내 거주를 금지하고 단지 광동 일부 지역으로 제한 했었다.(J.p72) 1805년 하드캐스틀(Mr. Hardcastle) 선교회 회계도 중국에 대해 소개하면서 복음을 직접 선교하기는 어렵고 위험하나 언어를 배워 성경을 번역하여 3억이 넘는 이교도들에게 복음전해야 한다고 선교회에 보고하여 언젠가는 복음의 문이 열릴 것을 준비하기 위해 성서번역 위한 선교사를 파송키로 하였다. (L.p403, H.p2))

모리슨은 1805년 성바돌로뮤(St Batholomew)에서 의학, 그린위치에서 천문학을 배웠고,모즐리목사의 소개로 당시 광동에서 유학 온 용삼탁을 만나 중국어를 익히며 중국선교 준비하였다. 선교사훈련을 마친 모리슨은 런던선교회의 최종 심사인 면접을 받앗다. 런던선교회는 구체적인 회심체험을 중요시하였고 이를 확인하는 면접을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한다. 1807년1월 8일 안수를 받고, 영국 동인도 회사의 거부로 영국배를 타지 못하고(J.p84), 미국배를 아고 1월 31일 출항하여 109일만인 4월 20일 뉴욕에 도착하였다. 중국가는 배편과 거주 허가 받기 위해 필라델피아 회중교회 본부를 찾아갔고, 회중교회를 워싱턴 정부에 소개해 대통령 제페슨은 국무장관 마진슨장관에 보내 광동 주재 아링턴(Arrington)영사에 소개장을 받았고, 교회에서 중국가는 선박을 알선 주며 배삯 1천불도 무료로 해주어 5월 12일 프라이던트호를 타고 뉴욕을 출항하였다. 모리슨은 갑판에서 중국어 공부하며 주일에는 선원과 승객들을 모아 예배 인도하였으며, 인도양과 말라카 해협을거쳐 1807년 9월 1일 광동에 도착한 것이다.

광도의 영국영사를 찾아 런던선교회의 소개장을 보여줬으나 “외국인과 상종하는 중국인은 사형이다”고 거절 당했으며, 동인도 회사에서도 “동인도 회사에서 허가한 사람 외에는 광동에 거주할 수 없고 캐토릭도 배척한다”고 거절 강했다. 모리슨은 아링턴 미국영사를 찾아가 국무장관의 소개서를 제시했다. 미국 영사는 모리슨을 환영하고 영사관에 거주 토록 조치해 주었고, 미국화물관리인 메서(messrs), 밀너(Milnor), 불(Bull)이 옛 프랑스공장을 제공해 주어 여기서 기거하며 중국어 공부와 성서번역에 전념했고 중국인에 복음 전도의 기회를 엿보았다..(L.p405).

"나는 여기서 성서번역에 도움이 되는 언어습득을 이루며 이 일에 헌신할 목적으로 나의 시간과 정력을 모두 쏟았다.“(1808.1.10.일기. L.p405)

"나는 예수에게만 믿음을 고백토록 중국인들에게 전도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만 알고 있으나 복음의 구조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1808.5.3.일기L.p406)

1808년6월월1일, 마카오로 옮겨 영국공장장 로버트(Mr Roberts)의 소개로 북경에서 온 캐토릭 신자인 아벨 윤을 어학선생으로 소개받아 모리슨은 북경어(Mandarin)를 습득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중국어 자전과 성서번역에 착수하였다. (l.p406))

마카오에서 용삼탁과 만났고, 러벨러셀(Mr Lovelesess)의 소개로 몰턴을 만났다. 의사인 몰턴(Mr Morton)은 아일랜드인 개신교 신자로 가족과 함께 마카오에 부임하여 모리슨과 친밀케 되고 그의 집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며 친밀케 되었다.(L.p406)

“문법은 출판을 준비 중에 있으며, 사전은 날마다 완성되가고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부분적으로 인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이 경솔하거나 정확치 못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공부를 더 깊히하고 있습니다.”(1808년말 편지)

모리슨은 마카오에서의 신변 안정문제, 건강문제를 말했다. 중국인 두사람의 보호 아래 그것도 달밤에 거닐어야 했고, 마카오 사람들이 말 부치기도 싫어했다고 어려움을 말하기도 했다.(L.p407)

모리슨은 몰턴 가족이 마카오 정착에 어려움으로 페낭으로 이주되 그의 장녀 메리(Miss Mary Morton)양과 1809년 2월 20일 결혼하였고, 영국 도인도회사의 중국어 통역관으로 취직이되 신분 보장과 연봉 L500파운드를 받게되 생활 안정을 갖고 광동과 마카오에 거주 할 수 있게 되어 성서번역과 인쇄 사역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L.407, H.p8)) 모리슨은 언어를 습득할 좋은 기회요 회사의 신뢰 속에 업무 수행하며 중국인들과 공식 접촉이 가능해졌고 그들의 언어와 생활습성을 익히는 좋은 기회가 되엇다.(Milne, 'Life of Morrison", p241). 여기서 중국어 자전, 중국어 문법, 성경번역이 이루어져 사도행전이 번역되어 1810년9월 중국에서, 중국인에 의해 첫 인쇄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9월에, 나는 사도행전을 희랍어 본문에서 주의 깊게 번역하여 중국 인쇄공을 통해 1000부를 목판 인쇄하였고 비용은 521불이 들었다. 외국인 나의 신분에 목숨이 위태로운 일이나 이 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없기에 중지 할 수 없었다. ”(1811.1.7. 선교회에 보낸 편지)

밀른은 당시의 어려움을 기록했다.

“사도행전 인쇄비는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며, 신약전서 인쇄비 보다 더 비싸 한 장 인쇄비에 50불이 더 들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중국인 정부 관리들이 모든 외국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상황에서 기독교 서적이 중국인 자신들에 의해 다른 중국 서적의 일반 가격으로 인쇄할 수 있다는 것은 예상 할 수도 없는 일이다.”(L.p409)

모리슨은 성서번역의 어려움을 기록했다.

“나의 주요 사역은 올해 누가복음을 번역하는 것이다. 나는 중국인들이 조판하여 인쇄한 종교문서(전도책자)들의 수천권을 인쇄 했다. 나는 중국어로 교리문답서를 번역하여 인쇄키 위해 선교부에 1부를 보냈다. 주일날, 내집에서 중국인들에게 설교하였고 그들은 예절을 지켜서 진지하게 참여하였고 이러한 분위기가 진리의 영향력 임을 느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와 개종한 것으로 기뻐하기는 이르다. 이러시 위해서는 기독교 전파에 대한 황제의 칙령이 내려져야 한다. 4며의 캐토릭 선교사들이 북경에서 추방 되었다.”("Life of Morrison, p298)

모리슨은 여기에서 자유롭게 중국 선교가 이루어질 선교기지를 찾았고, 중국인들이 이주한 동남아시아로 옮겨 성서번역과 문서출판, 중국선교사를 양성할 교육기관 설립을 구상하게 되었다.(H.p7) 모리슨은 런던선교회로 부터 말라카(malacca)나 광동(Canton)에 선교 교두보(Bridgehead)를 설치하여 더 많은 선교사를 동아시아로 보낼 수 있도록 하라는 제의를 받고 있었다.(B.p10) 선교회에서도 선교기지(Mission bases)로 가능한 지역을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유능한 밀른(W. Milne)을 선교사로 선발하고 파송 준비하고 있었다.(B.p10)

2. 윌리암 밀른과 동남아시아 선교 여행

밀른은 1785년 에버딘(Aberdeenshire) 출생으로 부친이 6세때 별세하여 목동으로 일하며 성장하엿다. 청년시절 에버딘 북서부 40마일 거리의 작은 도시 헌트리(Huntly) 회중교회에서 활동적인 신앙인 이였다. 16세 때 신앙체험하고 신앙서적을 탐독 했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할 것을 결심하응 중 코위목사(Rev G. Cowie)의 설교를 듣고 전도자의 길 가기로 결심하였다.(H.p67) 20세 때 선교사로 결심하고 5년후 1810년, 런던선교회에서 승인하여 모리슨이 훈련 받았던 고스포트(Gosport)에서 모리슨과 같은 선교훈련을 받았다. 밀른은 1810년7월에 안수 받고 다음달 8월에 런던선교회 이사 코위목사(Rev G. Cowie)의 딸, 라첼 코위(Miss Rachel Cowie)양과 결혼한후 1812년 9월 4일, 선교지 중국으로 출항하였다. 밀른은 모리시어스(Mauritius)에서 승객 기다리는 오랜 동안 중국어 문자자와 독서하는 기회로 삼았다.

1813년 6월 15일 영국을 떠난 지 9개월만에 그의 생애를 보낼 역사적인 도시 말라카에 잠시 정박하였다. 말라카는 1786년 페낭에 이어 1795년부터 1818년 까지 영국 동인도회사가 관할한 지역이다. 밀른이 선상에서 본 말라카의 첫 인상은 국제 무역항 분위기였거, 맑고 조용하며 매력적인 도시라 했다. 중앙언덕에 교회가 있고, 산뜻한 색상의 가옥들, 해안의 나누그늘, 말레이 마을의 전원 풍경, 야자나무 숲, 푸른벌판이 “영국 시골 마을과 같은 도시”라 기록했다.(Milne to Directors, 16 June 1813, LMS, B.p12)36시간의 짧은 말라카 방문을 통해 ‘국제도시(Cosmopolitan Town) 모습 보았고, 중국사원들, 말레이 모스크(회교사원)들, 중국학교들, 어린이들의 떠드는 소리, 비누도 없이 중국인 이발소에서 2인치 반이나 되는 긴 칼로 면도하는 모습등을 관심 있게 보았다.(B.p12)

1813년 7월4일, 밀른 부부가 마카오에 도착 할 때 모리슨은 기쁨아 벅찬 가슴으로 그들을 영접했고 그 의집으로 안내하였다.

모리슨의 일기에서 당시 심정을 살필 수 있다.

“3시경 아내와 나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성만찬 석상에 앉았다. 우리는 밀른이 도착 했다는 소식 듣고 흥분했다. 기쁨과 소망,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기록하여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6년 동안 기다리던 사역의 동역자가 우리의 본토에서 지금 이 땅에 실제로 발을 내 디디다니 나를 너무도 기쁘게 만들었다. 사랑스런 나의 동반자로 함께 헌신하여 수고하며 기다리고 바라면서 기도하던 나의 메리(Mary)도 밀른의 도착으로 기쁨에 사무쳤다. 그러나 그를 환영하고, 거주가 승인되며, 영접하는 일은 예측할 수 없고 불확실하다. 원치 않는 일들로 인해 큰 두려움이 있기도 하다.”(1813년 7월 4일. 모리슨일기, L.p412)

그러나 기쁨은 잠깐, 예상한 일이 닥쳐 왔다. 포투칼 관리와 종교담당관들이 마카오에서 10일 안에 떠나라고 밀른에 명령하였다.(B.p13). 결국 밀른은 7월 20일 광동으로 떠나야 했다. 모리슨도 수주후 뒤 따라 가서 앞으로 선교 계획에 대하여 숙의 하였다. 모리슨은 밀른이 4개월 동안 광동에 머물면서 중국어 공부 전념하도록 도와 주었다. 밀른이 마카오 정착이 불 가능 함으로 모리슨은 밀른에게 이미 기돠고 있던 동남아시아 아시안안 선교(Southeast Asian Mission)에 대한 계획을 내놓고 협의하였다. 이미 모리슨은 7월7일 일기에 “그의 마지막 대책은 자바(Java)나 말라카(Malacca)로 가는 것이다”고 썼다.(B.p13). 밀른은 모리슨의 제의를 심사숙고한 후 11월에 Java, Batavia, Penang, Malacca를 선교여행키로수락하였다.

밀른은 1814년 2월 4일 광동에서 자바로 가는 배를 타고 선교지 조사 위해 출항하였다. 그의 여행목적은 최근 모리슨이 1814년 1월, 번역한 중국어 신약성서와 전도문서를 배포하는 것이며 중국어 인쇄가 용이한 지역, 중국인 사역자를 양성할 수 있는 곳, 중국인들에게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중국이 개방되지 않아 선교부 자리와 거주지를 찾는 것이다.”(B.p14) 밀른은 중국어 교사이며 인쇄공인 호예체(Ho-Ye-Che) 선생을 동반하여 갔다.

밀른은 동남아시아 이주민 중국인들을 만날 좋은 기회로 여겼다. 먼저 슈마트라 남동해안의 Bangka섬 중국광부들을 찾아 보았다. 영국관리 코트소령(Major M.H.Court)은 슈마트라 Palembang과 Banka섬에는 중국인이 4,500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1814년 3월 자바의 수도 바타비아(Batavia, 현,Jakarta)에 도착하여 8월 까지 5개월간 머물면서 중국 정착인들의 생활을 살펴 보았다. 총독 대리 래프릴경(Stamford Raffles)의 특별한 배려로 바타비아 시외 Buitenzorg(Bogor) 그이 별장에 초대 받아 말레이(Malay)와 인도네시아인에 대한 정보를 받았으며 래프릴경은 밀른이 자유롭게 동부와 중부 Java, madura섬을 여행할 수 이Y도록 주선하여 주었다. 밀른은 자신의 관심의 중심은 중국인이지만 자바사람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을 “좋은 천성에 문화인”이라고 평하였다.(B.p16). 자바에 데한 그의 인상은 식물학자, 광물학자, 고고학, 언어학,역사가,선교사들 각분야의 거대한 영역이다“고 했다.(B.p16)

밀른의 다음 여행은 말라카와 페낭이다. 1814년 8월 11일, 자바에서 1주일 항해하여 말라카에 도착하였고 소령 위리암 화쿠아(Major, William Farquhar) 공관에 묵었다. 영국을 떠나 선교지로 가면서 잠시 들렸던 곳으로 중국인 선교 기지(Chinese Mission Base) 가능성을 생각했던 곳이다. 말라카를 지세히 살피는 동안 중국인 정착지와 무역의 중요한 중심지 임을 알았고 동남아시아의 고도로 Malay, Portuquese, Dutch, English Regimes둥 구제적인 다문화 다인종의 도시이며, 중국상인들도 호켄(Fukian)으로 중국남부 지방에서 온 이들이 항상 북적대는 무역 중심지인 것을 파악하였다. 말레이안 주석, 인디안 Textiles, 미얀마 Timber, 태국 쌀, 인도네시안 후추, 중국 실크 등등이 거래 되고 있음을 조사하엿다. “중국 상인 가족들은 검소하고 냉정한 생활을 하고있으며 해안 거리와 강가를 따라 굳게 문을 닫아 걸고 살고 있었다. 상거래만이 그들을 더 좋은 삶을 이루게 하는 소망이다”고 평하였다.(B.p17)

말라카는 인구가 약 17,000명이며 그중 중국인이 9천-1만명이며, 농촌지역 까지 약 20,000명으로 추산 된다고 파악하였다. 밀른은 선교 기지로 훌륭한 곳으로 여겼다. 교통통신의 이점이 있고, 지역 전반에 중국인 공동체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말라카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서 상업분야 만이 아니라 문화적 전통에서도 우대(prestige) 받는 위치에 있다는 점을 들면서 “중국인들은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더 지성적으로 보여 이들중 배움이 없는 이들이 적다”고 관찰하였다.(B.p17)

페낭(Penang) 여행은 유쾌하지 못하였다. 무더운 날씨로 고생하였고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동남아시아 선교를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고, “나는 중국 그 자체에 나의 마음이 묶여 있음을 느꼈다”고 하였다. 또한 모리슨과 긴밀한 협력(Close Union)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페낭에 더 이상 지체 없이 중국으로 되돌아 가기를 생각하였다. 그는 이미 자신의 새로운 선교 사역지에 대해 열정이 가슴레 불타오르로 있었다. 8월19일 말라카를 출발해 9월 5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밀른은 7개월 동안 수천 마일을 여행하고 돌아왔으나 폴트칼 관리의 말은 여전히 “마카오에 있을 곳이 없다”는 말이였다.(B.p18).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밀른의 여행지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권리를 가지고 지배한 지역이며, 영국 관리의 영접과 공관에서 묶었고, 그 보호 아래 관찰하였다는 점이다. 중국인을 중심으로 조사하였지만 동시에 동남아시아 각 인종에 대한 관심을 눈여겨 보아애 할 것이다.

3. Ultra-Ganges Mission의 설립

Ultra-Ganges란 인도와 중국 사이의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당시는 동남아시아란 지명을 사용치 않던 때이며, 영국이 알고 있는 아시아 국가는 인도와 중국 정도임으로 그 사이의 지역, 인종들을 “갠지스를 넘은 지역”이란 뜻으로 오늘날 동남아시아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상에서 이미 살펴 본 것 처럼 중국내에 선교사가 거주할 수 없는 상황에서 효과적인 중국선교를 위해 중국 이주민들이 정착한 곳에서 선교사역할 수 밖에 없다는 최선책으로 말라카를 선교기지로 결정하고 Ultra-Ganges Mission 선교부를 두어 성서번역, 인쇄 출판사역, 문서전도 사역, 교육사역을 추진키로 하였다. 또한 동남아시아인들에 대한 선교도 추진하여 말레이 무슬림, 인도 힌두교인들 선교도 착수 하였고, 말라카 중국인들이 국제 결혼한 분들임을 후에 알고 교육사업에 더욱 힘을 썼다.

말라카의 학교는 현지 사역자, 전도인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유럽인들이 본국에서가 아니라 선교 현지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선교 훈련 받아야 더 효괴적이라 여겨 말라카의 학교는 선교사 훈련학교 기능을 감당하였다. 실제로 선교사로 파송 받으면 말라카의 학교에 등록하여 자신의 시역분야의 중국어, 말레이어등 언어를 교육 받았다.

모리슨은 Ultra-Ganges Mission을 조직해 가능한한 중국 인근에서 중국인들에게 전도하는 일을 감당하여 중국선교의 성공적 사역 기지로 삼으려 하였다. 그들은 중국에 복음의 문이 열릴 것을 확신하였다. 이에 말라카로 결정하고 밀른을 1815년에 정착 시켜, 말라카에 선교본부(The Headquarters of Mission)를 두고 Batavia, Penang, Singapore에 지부를 두도록하였다.(L.p429) 해리슨은 “Ultra-Ganges Mission은 개신교 선교에 대한 중국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를 위한 기지(Base)로 India와 China 사이에 있는 지역에 선교사 본부(Missionary Headquarters)를 두려는 계획이다. 특히 선교사 훈련 센터(a training Centre for specificully missionary puporse) 뿐 아니라 총체적으로 지역을 위해 고등교육센타로 계획하고 있다”(B.p19)고 했다.

모리슨은 이러한 계획을 1812년 12월 런던선교회장에게 보고하였다. “나는 Ganges넘어 모든 나라들(all the countries)을 위해 말라카에 선교사,유럽인들과 현지인 교육 기관 설립을 바라고 있다. 우리의 아시아적 선교(Asiatic Missions)를 위한 중심이 되길 원하며, 우리는 조직화된 협력(organized co-operation)과 선교사들의 위원회(a committee of missionaries)를 원한다”고 썼다.(Morrison to Directors, 22 Dec.1812, LMS. & Morrison Memoir, I, P352. B.p19). 모리슨은 이러한 훈련센타가 말라카에 있는 것이 영국에 있는 것 보다 더 좋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모리슨은 “복음의 결정적인 승리는 현지인 선교사들과 성경을 통해서 이다”(the final triumphs of the Gospel will be by means of native missionaries and Bible). 밀른도 이에 동의하여 “결정적 승리”(the final triumph"를 성취하는 것이 환상 일 수 없다고하면서 “우리는 중국인들을 복음화 시킴이 이 시대에 이룰 줄 확신한다”(We are fully persuaded that the evangelizing of the Chinese will be a work of ages)고 했고, “우리는 현지 중국인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seminary for native missionaries)가 가장 효과적인 사역 수단이라 여긴다” 했다.(Milne to Directors, 16 Jan.1814, LMS, S.China. B.p20)

모리슨과 밀른에서 분명한 것은 단순한 교육 기관 설립이 아니라 순수한 선교사 양성 임을 강조하고 있다. 모리슨과 밀른은 말라카에 중국 선교부 설치 함을 자체적으로 결정했다.

아들은 선교부 지역으로 자바와 말라카를 놓고 검토하였다. 자바 중국인 정착지가 있고 중국과 빈번한 무역선이 드나들어 해상 교통(Sea-Communication)의 이점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말라카는 도시의 특성이 있다는 점,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중국 본토는 물론 동남아시아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 더 넓고 더 다양한 항구 도시로써 교통(Communication)이 가능한 곳이며, 더욱이 ‘조용한 곳“(a quiet place)이란 점에서 Batavia보다 더 유익한곳이라 판단하였다.(milne, Retrospect, pp 135-36, B.p20)

모리슨과 밀른 두 선교사는 말라카를 최종 선택 동의하였고 1815년1월 밀른이 말라카로 가서 선교부를 개설 토록 결정하였다. 밀른은 말라카로 가서 선교사 양성사역, 중국어와 말레이어,영어 문서 출판사역을 추진 키로하고, 모리슨은 선교회에 “말라카는 현지인(native)과 유럽인들을 양성할 당신의 선교사학교(Missionary College) 장소이다”고 신학교(Training College) 사역을 재촉하였다.(Morrison to Rev G.Bunker, 11 Jan.1815. morrison의 일기21 Jan.1815. Morrison to directors 2 march 1815, LMS, S.China. B.p21)

밀른은 중국을 떠나 새로운 동남아시아로 향하면서 “하나님께서 중국 선교의 문을 열어 주실 때까지” 말라카 선교(Malacca Mission) 계획을 수립하였다. 초등학교 교육(Elementary Education), 신앙 교육기관(Religious Instruction), 중국인소ㅔ소와 출판사(printing and Publishing in Chinese), 인도와 중국 사이의 모든 지역을 선교지로 삼는 “Ultra-Ganges Mission" 본부로 말라카에 설립한다는 것이다.(B.p21-22)

밀른은 아내와 어린 딸을 에리고 1815년 3월초 마카오를 출발 하여 의사도 없는 곳 말라카에 5월 21일에 언어교사요 중국인 이쇄공과 함RP 말라카에 도착하였다. 밀른은 말라카에서 기독교 선교사로써 다양한 인종, 다양한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복음전도자의 길을 떠난 것이다. Ultra-Ganges Mission에 대해 답변이 없던 런던선교회에서 1815년 2월 중국인들 뿐 아니라 말레이(Malay)인들에게 사역하기 위해 말라카로 선교사를 파송키로 했다는 답신을 보내 왔다.(B.p20) Ultra-Ganges Mission은 초기에 Extra-Ganges Mission으로도 알려졌다.(J.p92)

III. Ultra- Ganges Mission의 사역과 확장

1810년(모리슨과 9년 동안 긴밀한 선교 협력(Co-Operated)을 이룬 선교 동반자(Missionary Partner)이다. 이 두분은 Ultra-Ganges Mission인 선교사회를 조직하여 선교 계획을 함께 구상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수고하고, 함께 고난을 헤쳐 중국 선교와 동남아시아 선교를 확장시킨 분들이다. 성서번역도 분담하여 완역하였고, 말라카에 선교기지를 두어 선교사 양성을 위한 학교(Anglo-Chinese College)을 설립하고, 성경과 전도책자 인쇄를 위해 출판사역, 복음전도 사역을 함께 이루어 간 분들이다.(B.p10-11)

말라카를 선교센타로 정하고 이곳이 다인종 다문화에 깊은 관심 가진 밀른은 말레이인(Malay)과 인도인(Malabar)을 위한 교회와 학교를 세웠고, 말레이어 성서와 전도문서 출판 사역도 추진하였다. 또한 선교지를 Batavia(Jakarta), 싱가폴(Singapore), 페낭(Penang)으로 확장하여 선교지부도 설치하고 교육과 선교, 문서사역을 곳곳에서 실시하였다.

밀른은 1817-8년 겨울 동안에 광동을 방문하여 모리슨과 College 설립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1817년 9-10월 서로 손 잡고 일할 사역을 논의하는 중 광동과 말라카를 공식 기지로(Formal basis)하고, 협력활동(Joint Operations)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그들 스스로 “울트라 간지 임시 위원회”(Provisional Committee of the Ultra-Ganges Missions)를 조직하였다.(B.p33). 11월2일에 다시 모여 선교기지를 말라카에 두며 말라카에 College를 세워 중국인과 유럽인 선교사를 양성하고 교육하는 기관으로 삼는다고 결의하였다. 1818년1월일, 임시위원회를 열어 말라카의 선교 재산을 Anglo-Chinese College 대지로 사용할 것과 교사신축을 결의하여고 모리슨은 건물 건축비로 L1000을 헌금하였다.(b.p35)



1. Ultra-Ganges Mission의 선교센타 건립

밀른은 학교 교사, 도서관, 출판인쇄소, 문서전도, 예배실, 선교사 및 교사 주택등의 종합 선교센타 필요성을 느꼈으며 다양한 전문 분야의 선교사 및 사역자 간에 긴밀한 협력과 질서의 필요성을 생각하였다.

밀른은 이러한 복합 건물을 위해서 대지가 우선 필요로하였다. 1916년 1월 페낭을 방문하여 영국정부관리인 위리암 페트리(Hon William Petrie)와 페낭힐(Penang Hill)에서 아침을 함께하며 말라카 선교센타 계획을 전하고 이에 필요한 대지 구입 협조를 요청하였다. 말라카는 네델란드 관할 지역이므로 대지구입이 거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관리와 새로부임한 네델란드 행정관(Administration)의 협조로 선교 인쇄소(Mission Printing-Press)를 조건으로 허락을 주선해 주어 2월초, 도시에서 좀 떨어진 곳, 성 죤힐(St.John's Hill)의 황폐한 대지를 허락 받았고, 한달 후 이보다 작은 대지이지만 남 인디아 상인 탐비(Tamby Ahmad Sahid)의 더좋은 대지와 교환 할 수있었다. 이 곳은 해변길 서부지역의 도시의 문(Gate of the Town) 있는 곳으로 트랜꾸에라(Tranquerah) 지역이다.B.p28) 밀른은 1816년 8월 도시외각에 밀른과 톰슨 주택과 선교관(Mission House)으로 사용할 건물과 대지를 허가 받아 이전하였고, 1817년 1월 해변을 따라 석벽을 쌓고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인쇄소 출판소 창고 인쇄공 숙소등 4등분하여 완공하였다. 1817년6월에는 인쇄소도 확장 시켜 중국어와 말레이 인쇄소를 설치하였다. 밀른은 앞으로 도서관, 언어학교를 세워 종국에는 선교사양성 학교(Traning College)로 발전 시킬 계획이다.(B.p29).

이곳에서 모리슨의 신약성서 둘째판을 사륙판(Duodecimo)으로 계획하여 1817년 모리슨이 보낸 인쇄공과 함께 영국성서공회 1,000파운드지원으로1만권을 인쇄하였다.(B.p29)

새로운 건물에서 1816년11월 벵갈에 주문한 영문자 및 아랍활자와 인쇄기와 절단기가 도착해 영어와 말레이어 인쇄도 감당하게 됐다. 이 소식을 모리슨이 듣고 6명의 인쇄공을 더 보내 주었다.(B.p30) 이 인쇄기로 전도책자를 출판하여 중국 선교 및 한국선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중국어와 여어 정기 간행물도 출판하였다. 밀른이 학교 개교하던 날, 잡지를 발행하였고, 1817년5월에는 "The Indio-Chinese Gleaner"을 발행하고 밀른이 편집장 및 주필을 맞아 출판 보급하였다. 이 잡지에는 선교활동 상황이 기록되 있고, 종교,철학,문학,역사등의 내용이 수록되 당시 유럽에서 “우수한 출판물로” 기록되기도 했다.(B.p30) 런던선교회는 출판인쇄 기술 있는 선교사 매드허스트(W.H.Medhurst)를 파송하 1817년 6월 말라카에 도착하여 선교사양성학교에서 언어훈련 받으며 선교사역에 참여하였다.(B.p31) 톰슨은 쉴 수 없는 격무에 병이 들어 잠시 귀국하였다.

2. Ultra-Ganges Mission의 중점 사역

1) 성서번역

모리슨과 밀른의 최대 관심과 런던선교회로 부터의 임무는 중국어 성서번역이였고 이는 선교의 문이 닫힌 중국선교를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당시 외국인에거 글을 가르칠 수 도 없고 더욱이 외국인이 중국어로 출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리슨은 사도랭전을 번역 인쇄하였으나 황제의 금지령으로 더 이상 중국내에서 인소ㅔ출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인해 선교기지를 말라카로 옮겨 성서출판을 완성하려는 하였다.

모리슨은 1813년 9월 30일 밀른과 신약성서 번역을 의논하였다. “나는 마카오를 떠나기전 잠시 동안 신약성서 번역 완성에 관하여 말하였다”(1813.9.30.일기, L.p412). 모리슨은 신약성서 번역을 1813년 12월에 완성하고 다음과 같이 그 감격을 기록하였다.

“ 신약성서가 중국어로 번역 완료 된 것은 주님의 축복이며 즉시 모두 인쇄되었다.
오, 위대하신 일 이루신 주님! 당신의 말씀은 당신의 것입니다.
결코 무효한 것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이 사역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보내 주심도 축복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이루신 줄 믿습니다.
주님, 그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축복하시 옵소서.
이방인들도 그로인해 당신의 축복을 받게하소서“
“나는 이방인들이 그들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함을 애탄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함에 부족한 것을 두려워합니다.
주님, 나를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복음을 신실하게 선포할 수 있도록 도우시옵소서. 아멘 또 아멘“(Amen and Amen)

영국성서공회는 모리슨의 성경번역에 큰 관심을 가졌고 풍족한 지원을해 주엇다. 모리슨이 성서공회타이마우스(Teighmouth)경에게 보낸 1814년 1월 28일 감사의 편지에 “당신의 용기를 복돋아 주심에 힘입어 광동에서 인쇄되고 제작된 중국어 신약 성서 번역본을 드립니다”.(L.p413).

1814년1월 11일에 선교회 총무에 보고서를 보내었다.

“영국과 외국성서공회의 두 번째 승인으로 준 500파운드는 중국어 성경 번역, 인쇄, 배포비로 사용 됩니다. 나는 선교회에 신약성서 번역이 붕국어로 완성되었음을 알렸고 번번이 인쇄소로부터 용지가 없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신약성서 2000권을 인쇄에 넘겼으며 비용은 스페인 달라로 3,818불 듭니다. 이 번역이 완전할 것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내게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복음서, 서신,계시록은 매 자신이 번역하였고 영국박물관에서 추천한 경건한 일꾼이 참여하였습니다.”(Life of Morrison, Vol i.p384, L.p414)

모리슨은 1815년 초, 아내가 자녀를 데리고 건강 검진 위해 영국 방문하고, 밀른도 떠나 있는 때 4억 중국인들을 위한 개신교 선교 대표로 홀로 있는 외로움 속에서 수 많은 어려움에도 굽힘 없이 감당해 나가는 모습 볼 수 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번역 사역이 내 마지막 선교목이다. 나의 임무는 주님의날까지 될 것이다. 그러나 내게 들려오는 소식은 두렵다. 나는 공식적인 신앙고백 이루기를 바란다. 지난해(1815년) 말, 어려움이 수 없이 많았다. 사전 인쇄공들이 불안을 일으켰고,많은 시간을 난처한 입장에 처해있었다. 하나님,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옵소서”.

1817년 9월 4일 중국선교 10년을 정리하며 부르더박사(Dr Burder)에 보낸 편지

“내가 선교사회 목적을 효과적으로 수행키 위해 모국 땅을 떠나 첫 발을 내디딘지 오늘로 10년 경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하셨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으며 그의 거룩한 이름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성서번역 사역 감당에 수 많은 어려움이 계속 닥쳐 왔지만 장애에도 굳게 서 나가도록 함께한 동료들을 생각하며 “우리가 염려하는 것 보다도 더먼저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함이 당연합니다”고 하여 그의 믿음을 보여 주고 있다.(L.p420)

모리슨은 밀른과 성경을 분담하여 번역했으며 1818년 구약전서 번역이 완료 될것이라 했고, 1819년 11월 25일, 성경전서 번역이 12년만에 이루어지게 되어 죠셉은 “런던선교회와 Ultra-Ganges Mission에 기록할 만한 일이다”고 했다.(J.p123) 밀른이 시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삼상에서 욥기 까지 번역하였고, 모리슨은 그외 구약성경과 신약성서를 번역한 것이다. 이 성경은 말라카(Malacca)에서 인쇄 작업이 시작되어 1823년에 22권으로 출판되었다. 후에 사무엘 다이어(Samuel Dyer)선교사가 1835년에 말라카에 도착하여 신형 인쇄기로 한권으로 출판하였다. 1823년에 출판 되어 1845년 까지 수천권이 출판 되어 보급 되었다.(J.p124)

1823년 성서가 출판되는 동안 그의 아내가 세상 떠 났고(1821.6), 그의 충실한 동료 밀른도 세상 떠 났다.(1822.6) 그러나 성경은 1823년 말라카에서 중국어 성경 전체가 처음 출판 된 것이다. 781년 네스토리안 기념비(Nestorian Monument)에 첫 중국 선교사인 알로펜(Alopen)과 로만 캐토릭 선교사들이 성경을 부분적으로 번역하였지만 성경전체가 번역 출판되기는 처음인 것이다.(H.p113) 이 성경은 일본어 성경과 한글 성경의 대본이 되어 한글 성경의 제목에서부터 용어 사용이 이 성경에서 온 것임을 볼 때 한자문화권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다.(리 p41).

모리슨의 성경 번역출판에 대해 비판과 항의도 있었다. 캐토릭측에서는 배교행위라하여 성서를 불태워 버렸다. 개신겨측에서도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리슨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모리슨의 일기에 그의 심정이 적혀 잇다.

“만약 나와 밀른의 중국어역 성서가 장래 중국에 있어 위클리프와 틴들역이 오늘 성서에 대하여 갖는 위치를 갇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아마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런던 선교회와 대영성서공회는 그들이 많은 재원을 투입한 것을 결코 후외하지 않을 것이다.

성서를 번역하였다는 이유로 위클리프의 무덤에서 뼈를 파내어 불사른 지가 5백년이 안된다. 틴들이 같은 이유로 교수형을 당한 후 불살라진 것이 3백년이 안 된다....,

나는 번역에 있어 성실, 명쾌, 간결을 존중하였다. 또한 중국철학과 종교에 사용되는 말도 피하였다. 나는 어려운 말보다 오히려 평범한 말을 사용하였다. 이교도의 철학과 종교의 전문 술어도 피하였다. 어려운 말을 만나 번역할 수 없을 때는 경건하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존경하는 사람들을 찾아 의견을 물었다“(M.Burshall:Robert Morrison, a marser-builder p119, 리 p42)

모리슨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옮기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책임감으로 경건하게 정확한 번역을 하려고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모리슨은 밀른과 함께 모든 일을 추진하였고 더 좋은 번역을 위해 교정작업하였으나 밀른의 죽음으로 불 가능해졌다.(H.p113).

모리슨은 1824년 3월 17년만에 영국을 방문하여 모든 영국교회와 사회, 선교단체로 부터 관심과 대 환영을 받았다. 그는 개신교 첫 중국 선교사로써 왕실에서 King George IV세에게 말라카에서 밀른과 함께 발행한 중국어성서를 증정하였다.(B.p75). 또한 1824년5월 대영성서공회 총회에 참석하여 켄터베리 대주교와 수천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그는 중국에서 출생한 아들 죤(John)을 단상에 데리고 올라가 회중들을 감격 시키기도 했다. 중국어 성서는대영성서공회 이사장인 타인마우스(Lord Teignmouth)경에게 증정하였다. 모리슨역의 중국성경 이름은 “신천성서”(神天聖書)라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2세였다.(리.p45)

2. 교육선교와 Anglo-Chinese College

1) 교육선교 사역

밀른이 말라카에 도착하여 그의 주택 마당의 작은 집에서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먼저 세웠다. 1815년 8월 5일 개교할 때는 5명이 입학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학생들이 늘어났다. 중국인 교사가 읽기, 쓰기와 산수를 가르치는 호켄(Hokkien)어를 사용하는 소년학교(Boy's School)를 시작하였다. 1816년에는 광동어(Cantonese-Speaking)를 사용하는 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1816년 중엽에는 8개교를 세웠다. 후에는 모리슨의 교리문답과 기독교도 가르쳤다.(H.p73)

밀른은 말라카에 국제 결혼한 중국인들이 많은 것을 알았다. 중국에서 이주한 청년들이 동남아시아 여러 인종과 결혼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말레이, 태국인, 미얀마인,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여성등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고 특히 말레이피가 썩인 중국인을 바바(Baba) 불리웠고 이들의 공동체가 있음도 알앗다. 이들은 중궁인 문화 전통을 지니고 있지먼 말레이(Malay) 전통과 언어습관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을 위한 말레이 학교도 세웠다.(B.p25)

밀른은 중국어를 익히는 중에도 말레이 교사 압둘라(Abdullah bin Abdul kadir)를 언어교사로 말레이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밀른의 선교목표는 중국인 이지만 말레이인들과 말레이어 문서 출판에도 깊은 관심을가졌다. 말레이 선교를 위해 1915년 9월에 런던선교회에서 새로운 선교사 톰슨(C.H.Thomsen)을 보내주어 본격적으로 말레이 교육선교를 시작하였다. 톰슨은 압들라에게 말레이어를 배우며 1816년에 말레이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으나 그와 아내가 9월에 중한 병으로 인해 귀국하였는데 아내는 귀국도중 별새하여 바다에 수장하였다. 말레이 학교는 톰슨 부재 기간 동안 밀른이 압둘라와 함께 이어 갔으며, 톰슨이 건강을 회복하고 1817년말에 다시 말라카로 부임하여 활발케 되었다.(B.p26).

말레이 사역에 대해 밀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잇다.

“나는 말레이어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다. 말레이 서적 읽기가 즐겁고 현지인(Native)의 도움을 받아 훨씬 수월함을 느낀다. 또한 간단한 문장은 쓸 수도 있고 말레이어가 훌륭한 언어라 생각한다. 그러나 철자법이 확정되 있지 않아 표준이 없고 문법 표기법도 서로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나는 말레이 서적 구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고 있으며 복사하고 있으나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톰슨선교사의 말레이 서적도 이렇게 수집되엇다. 나는 내가 수집한 자료로 선교도서관(Mission Library)을 세워 모아둘 것이다.... 나는 중국인에 헌신치 않는다고 비난 받고 있음도 알고 있다.”(Milne to Directors, 22 June 1817. LMS, B.p27)

중국인 학교는 언어별로 설립 되었는데 말라카에는 호케인(Hokkien) 중국인들이 많으므로 인쇄 출판 사역을 위해 1817년 6월에 온 매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가 말라카에 도착하여 인쇄사역과 함께 특별히 혹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혹게인 학교를 세웠다. 이로써 Ultra-Ganges Mission 은 중국인 선교를 확장 시키게 되었다.(b.p37)

1820년에는 12개교 학교로 증가하였다고 보고했다.. 중국인 학교 7개교(말라카 3, 페낭2, 중국1, 바타비아1개교). 5개교는 말레이와 다른인종 위한 학교로 페낭에 말레이학교 2개교, 말랕=카에 1개교, 말레이와 영어학교 1개교, 말라바 인도계학교 1개교이다. 말라카의 학교는 공시 지원 없이 선교사들이 운영하였고 학생수는 약 300명이라 했다.(H.p118).

톰슨(Thomson)은 싱가폴에 1822년에 첫 학교를 설립하여 서구교육의 개척자가 되었다. 첫 여학교는 1842년에 개교하였고 후애 영국성공회(Anglican)에서 인수하였다. 인도계 말라바르( Malabar) 학교 설립하였고 타밀어 교재는 마드라스에서 가져 왔다.

1827년 런던선교사회에서 첫 여성선교사 뉴월(Miss Newell) 양을 파송하여 말라카에 여자학교를 설립하였다.(H.p81). 뉴웰양이 쿠출라프선교사와 결혼하여 1829년 5월 사임했고, 왈라스(Miss M.C.Wallace) 양이 이어서 감당하였다.

2) 말라카 Anglo-Chinese College 설립

모리슨은 선교회에 “나는 말라카에 복음 전도인을 양성하기 위한 College설립을 요청한다”고 특별 요청하였다. 선교회는 “우리는 말라카에 건물 신축을 승인하며, 영어를 가르치며, 중국인 청년들에게 기독교의 원리와 선교사 양성 교육시키는 목적과 중국문서와 다른 지역 언어를 가르칠 목적으로 The Anglo-Chinese College 설립을 승인한다”고 회답이 왔다.(B.p35) 그러나 밀른의 건강이 심각해졌고 광동의 의사는 밀른이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고 했다. 모리슨은 “만일 그가 세상을 떠난다면 중국 선교를 위한 말라카 선교부는 어떻게 될지 나는 모른다. 후계자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했다.(B.p36). 그러나 밀른은 병과 싸우며 추진해 나갔다.

밀른은 건강 회복 겸하여 1817년 가을 부터 광동을 방문해 모리슨과 협의하며 교육선교의 종착지인 Anglo-Chinese College 설립을 추진하였다. 1818년2월 밀른은 말라카로 돌아왔고, 9월에는 3명의 선교사가 도착하여 합류하였다. Samuel Milton 과 Jhon Ince는 중국인 분야 사역위해 공부하였고, Thomas Beight는 말레이 분야 사역 위해 언어 공부하였다. 이들은언어 공부 후 싱가폴과 페낭으로 Ultra-Ganges Mission 지부로 나갔다. 모리슨은 광동에서 언어교사로 3명을 더 보내서 Anglo-Chinese College설립을 돕도록하였다. 밀른은 영국 공관장 화쿠아소령(Major, Farquhar)을 만나 9월16일 네데란드 관리에게 College설립을 위한 대지 매입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쾌히 승낙해 주었다.(B.p40)

모리슨과 밀른은 Anglo-Chinese College 종합계획서를 1818년 10월 날짜로 발표하였다. 종합계획 내용은 전체 구조와 조직 행정체계와 교직원 그리고 교괴과정들이다. 학교의 실제적인 목적은 중국인들에 복음을 전할 중국 기독교 선교사 군단을 일으키는 것이라 했다.( a Corps Chinese Christian missionaries to the Chinese People) 종합계획에서 밝힌 것은 첫째로, College를 Academy학교로 성장 시킬 것이며, 중국과 유럽 학문을 상호연마시켜 중국어와 문학을 유럽에 전달하고, 둘째는 Ultra-Ganges에 유럽문학과 과학을 습득케 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다. Ultra-Ganges에 속한 나라들을 중국 Cochin-china, Loo-Choo, Corea, Japan, Eastern Archipelago Chinese Colonies이라 했다. 셋째로, 유용한 학교 시설을 확충한다는 계획이다. 즉 중국도서관, 직원 및 학생 기숙사등 건축고, 영어와 중국어 인쇄 출판 시설을갖 추었다는 것이다. 넷째는 입학자격으로 유럽과 미국인들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분이어야 하며, 유럽대학 유학생이나 기독교 선교사, 상업 회사원들과 국가 공무원들이고, 아시아 지역에서는 현지 청년(Native Youth)들로 기독교회나 개인적으로 자급이나 후원이 가능한 이라 했다. 마지막 다섯째는 College 조직과 운영을 밝힌 후 말라카의 밀른, 중국의 모리슨(Malacca-Milne, China-Morrison) 이름으로 발행하였다. 이 종합계획서는 1818년 10월 278일 런던선교회 회계 한케이(W.A.Hankey)에게 서신으로 동봉해 보냈다.

Anglo-Chinese College 기공식을 1818년 11월 11일 말라카에서 거행되었다. 기공식에는 말라카 영국 총독인 하쿠아(William Farquhar), 신임 네델란드 관리(Governor), 네델란드 군대 지휘관과 수많은 지역 인사들이 참석하였고, 머릿돌에는 라틴어로 “Collegium Anglo-sinicum,sub auspicio et impensa Roberi Morrison S.T.D. Fundatoris, 1818."이라 새겼고 단지 모리슨의 이름만 기록 되 있었다.(The Anglo-Chinese College, Under the auspices and at the expense of Robert Morrison, D.D., the Founder, 1818.).(ㅠ.p43).

밀른은 기공식사를 통해 새로운 교육기관의 근본목적을 강조 했고 중국에 대해 더 깊은 지식과 이해를 가져야한다고 했다.

“중국-학문과 철학적 사상의 깊이가 있는 나라이므로 개신교 선교사들이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영국과의 관계는 상업적 관계를 중시하여 정치적 이해의 방편이 되나 중국의 법, 사상, 관습에 대한 깊은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언어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우성 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문화적,상업적,정치적 고려를 한다면 중국과 그 민족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 임을 강조하면서 더나아가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College 관심에 포함되 있음을 밝혔다.

“Ultra-Ganges India의 다른 나라들과 언어도 매우 중요하다. 이 나라들의 법, 관습,문자,종교들도 연구과제로 중요하다. 말레이(Malay)어는 오래동안 Dutch에의해 연구되었으며 영국운 늣게 연구되고 있다. 다양한 연구와 유용한 서적들이 실례와 함께 인쇄되어야 한다. 그러나 할 일이 너무 많다. Sumatra내지 언어, Javanese언어, Cambodia와 Siam어 등 개신교 국가에서 다루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나 밀른은 “무엇보다도 중국연구가 우선이라고 하면서 이들 지역에서 중국연구가 실제적으로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이지역이 중국과 연관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B.p43-44)

머리돌 어디에도 런던선교회의 이름은없었다. 1816년 밀른에게 COllege 건축을 원칙적으로 승인했고, 모리슨에게 유럽인과 중국 선교사 및 교사를 양성하도록 승인했으나 아직 College Plan을 승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College) 장소는 이미 1816년에 획득한 선교관(Mission House) 뒷편, 말라카 도시 서쪽에 위치하였고, 트랜쿠에라 문(Tranquerah Gate) 밖이며, 해안에서 200피트 지점으로 Tranquerah Gate에서 Tanjong Kling wlja 해안도로로 말라카 강뚝 오른편에 있다고 위치를 설명하였다.(B.p54)

대학(College) 장소는 이미 1816년에 획득한 선교관(Mission House) 뒷편, 말라카 도시 서쪽에 위치하였고, 트랜쿠에라 문(Tranquerah Gate) 밖이며, 해안에서 200피트 지점으로 Tranquerah Gate에서 Tanjong Kling wlja 해안도로로 말라카 강뚝 오른편에 있다.



이 건물은 1820년 9월 8일에 완성되었는데 당시 아름답운 건물로 말라카의 최고 건물“이라 했다. 총 건축비는 7,500 스페인 달러이다. 이 건물은 단순한 학교 건물이 아니라 선교센타로 종합 건물이다. 인쇄 출팜소, College건물이 있다. 1층에는 도서실이 있어 중국어,말레이,시암어들 아시안 서적들이 3,380권 소장되 있으며 중국서적 2,850권이 소장되 있는 최초 아시아 도서관이라 할 수있다. 인쇄소에도 중국어 인쇠소장은 렝아화(Leang Ah Far)이 1815년에 광동에서 말라카로 와서 선교사를 충실히 도우며 일하고 있고, 영어인쇄 소장은 P.P.Toms로 1814년 동인도회사 광동에서 온이로 모리슨의 중국어 자전(Chinese Dictionary)를 출판 감독한 분이기도 하다. 1817년에는 매르허스트가 인쇄소를 맡았다. 1819년 인쇄물을 보면 4,3000권의 중국성경, 12,000권의 중국어 잡지, 22,000권의 말레이 전도책자, 3,000권의 영어 책자라 하여 활발한 분서사역을 짐작할 수 있다. 매르허스트는 학교교재로 지도가 함께 있는 책을 출판키도 했다.

3. 인쇄 출판 문서사역

성서번역과 출판 배포 사역과 함께 기독교 전도 책자를 번역 저작 출판하여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예를 들면 밀른의 “Two Friends"란 저서는 중국어로 ”張袁兩友相論“이라 출판 되었고, 이 책은 한국에서도 마펫(S.A.Moffett) 선교사에 의해 ”쟝원량우샹론“(경셩졍동예수교회당간인,1893)으로 1893년에 출판 되어 한국 초기 교회에게 큰 영향을 준 책 이다. 이러한 문서들은 순회전도에서 배포 되었고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 되었다.

문서선교는 선교사가 갈 수 없는 곳에도 갈수 있다는 기본 동기에서 가치가 있다. 선교런던선교회 훈련학교인 Gosport 강의에서 보그박사(Dr.Bogue)는 선교사 임무 중 책 출판을 추천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더 이해하고 선교사가 없는 곳에서도 순수하게 전파 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 했고 구두로 보다 저술로 전파하는 것이 더 발전된 것이라 했다.(H.p115)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런던선교회 선교사들은 문서선교 사역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밀른 자신도 신앙문서회(Religious Tract Society) 사역이 선교사회와 성서공회와 함께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매드허스트는 밀른이 세상 떠난후 그의 문서사역을 정리하였다. 즉 1810년부터 1836년 까지 인쇄 츨판 선교한 일- 말라카와 광동에서 서적 및 전도문서 450,469권, Btavia에서 191,394권, 페낭에서 43,900권, 싱가폴에서 66,000권이며, 중국어 선경전서 2,075권, 신약 9,970권 쪽복음 31,000권이라 정리하였다.(H.p115). 그러나 밀른과 모리슨은 말레이 선교에 문서선교가 효과적이 아니라 여겼다. 이는 말레이들 대부분 문맹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1835년 기록에 보면 중국인 남자 9/10은 독서 할 수 있으나 중국인 여성은 1/10 밖에 안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운 것이다.

인쇄 출판 사역은 선교의 도구 일뿐 아니라 상업적이기도 했다. 인쇄소를 통해 학교와 선교사의 가족이 생활할 수 있었다. 정부문서도 맡아 일했고 우럽 상인들을 위해서도 인쇄했다.(H.p126)

4. Ultra-Gsnges Mission의 순회 복음전도 활동

선교사의 모든 관삼은 직접 복음 선교에 있었다. 모리슨도 선교사 출발 항애 중에도 선원과 승객을 모아 예배 인도하며 설교하였고, 선교지에 도착하여서도 전도의 기회를 늘 찾았다. 때로는 너무도 결실이 없어 안타까워 하며 자책키도 하였다. 선교사들은 모리슨도 밀른도 가가홓 다니며, 상점마다 다니며, 때로눈 중국사원에서도 전도하고 개종시키는 사역에 힘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밀른도 말라카에 도착하여 주일에는 더치(Dutch)교회에서 설교하였고, 주일에도 주간에도 길거리에서 어느 곳에서든지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학교에서 체플을 세웠고, 말레이 교회, 인도계교회도 세웠으며 인종을 선택해 복은 전하고 교회 세우도록 선교사를 요청하여 협력 선교해 나갔다.

모리슨에 의해 첫 개종자는 1814년 세례 받은이는 Tsae A-Ko이다. 모리슨은 “이러한 기쁨을 누리고 싶다고 한지 7년이지나 이루어졌다”며 기뻐하였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영적 진리가 어떻게 이해되며 얼마나 느린 단계를 거치는 지를 기록하였다.

“A-Ko는 첩의 소생이다. 그의 아버지의 부인은 자녀 없이 구가 16세때 세상 떠났다. 그가 21세때 내 집에 왔고 나는 예수에 대해서 들려 주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전한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이 중국에서 나의 첫 경험이다. 3년후 나는 더 잘 언어를 구사하고 쓸 수 있었을 때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현제들도 인쇄소의 신약성서 출판 감독자로 채용하였고 모든 시개 모든 족속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에수님의 은혜를 알 도록 가르쳤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었다.”

“그의 기질은 좋지 않앗다. 그는 자주 형제와 동료들과 다투어 나는 그가 내일에 없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몇마일 떨어진 곳에서 안식일 마다 예배 드리는 곳에 계속 팜여하였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열심히 기도하였고, 교리문답이 포한된 십계명을 읽었다. 그는 십계명을 통해 그의 자신의 잘못과 주요 오류를 깨달았다. 자신의 본성이 잘못됬고 부정하며 친구와 형제들, 이웃들에게 의무를 성실히 수행치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지식은 부족하지만 예수에 대한 그의 믿음이 신실한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Life of Morrison, Vol.i.p408. L.p414-415)

밀른은 1814년 말라카에 도착하면서 즉시 전도에 나섰다. 그는 언어공부, 번역, 출판, 교육등 분주한 중에도 전도자의 기본 사명은 복음 증거, 복음 전파이며 성서반포라 했다. 주일에는 Dutch Church의 적은 개신교 회중에게 설교하였으며 주중에도 Cantonese, Mandarin,영어 행인들에게 거리에 서서 전도하였다. 신약성서와 쪽복음, 전도책자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며 나눠 주었다. 때로눈 가가호호, 가게를 다니며, 배와 선원들에게 방문하여 전도 문서를 전하며 중국인들에게 전도하였다.(B.p24) 또한 밀른은 중궁 사원 Cheng Hong Teng에 가서도 전도하였다. “제단 앞에 앉아서 복음전도하였다. 우상의 어리석음을 정죄하고 그 신자들에게 가르쳤다.”, “향단의 컵과 주전자들, 촛대와 촛불 등 우상숭배의 신성의 제단을 뒤 엎어 버리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1816년 페낭을 방문하여 서도 “Kwen-Yin사원에 가서 수 많은 중국인들을 만나 보았다. 나는 제단에 서서 그들에게 전도하였고 전도문서를 배포하였다”고 그의 일기에 썼다.(Milne's Journal,1816-1817, LMS, S.China, Retrospect, p164. B.p24)

밀른의 전도에 대한 열정을 1815년 8월 5일, 그의 기록 속에서 찾아 볼수 있다.

“선교 첫해에 규칙적인 예배가 주간에, 주일에 드려 매일 아침 중국인 직원들, 일꾼들,교사들과 에배 드렸고 신약성서와 기독교 서적을 읽고 기도로 마쳤다. Dutch Church는 10시에 주일 예배 인도했고, 1시에 중국성경 읽고 강해하였다. 3시반, 교사들이 교리문답을 되풀이해 읽었고 5시 거리로나가 1시간 정도 이교도들에게 전도지 나눠주었다. 8시, 성경을 다시 읽고 기도로 예배 마치였다.참석자의 수는 항상 적으나 때로는 1명, 2명, 4명, 20명으로 기도 했다. 평균 장년 참가자가 3명, 5명, 8명이다.”(Life of Milne, pp200f. H.p432)

밀른이 Leang A-Fa에 첫 세례 줄때의 기록을 보면 중국인 전도와개종이얼마나 박해가 싶하였는 가도 알 수 있다. Leang A-Fa는 첫 세례인일 뿐 아니라 중국인 첫 안수 받은목사이기도 하다.

“그는 광동 사람으로 독신이며 33새 이다. 아버지나 형 외에 친척이 없고 쉬운 책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교육울 받았고 검소한 생활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광동에서 1815년 4월 말라카로 와서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는 ,Treatise on the Life of Christ' 인쇄룰 제의키도 했다.”

“A-Fa는 말라카 온지 4년만에 그의 가족과 친구들 만나기 위해 중국에 다녀 왔다. 그는 우상숭배로 차있는 것 보았고 그들의 구원과 개종에 대해 갈망케 되었다. 이를 위해 전도책자를 필요오 하였고 우상숭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회개해야 함을 가르칠 성경과 문서들을 200권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도 경찰들이 그이 활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으며 체포하여 투옥시켰고 인쇄목판들을 파괴 사켰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가 감옥에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모리슨이 듣고 즉시 본토인 상인들을 통해 정부관리와 연결하여 석방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커다란 대나무로 30대의 태형을 받았다. A Fa는 다리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그들은 그를 때린 후 70달러의 벌금을 받고 놓아 주었다.”

“이러한 투옥과 태형은 그를 더욱 겸손케 하였고 그리스도로 인한 것으로 더욱 헌신케 하였다. 그가 감옥에서 석방된후 40일 동안 그의 본토 가족방문 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적 풍부 함에 관심을 두었고 그녀를 인도하려고 정성을 다했다. 그는 아내에게 성경을 읽어 주었고 함께 기도하였다. 결국 그년도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A-Fa는 이 때부터 우리는 마음이 하나 되었다고 우상숭배를 버리고 진리의 하나님, 우주의 통치자시요 섭리자이시며 오직 유일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마음이 하나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의 지방 사람들에게 열심히 복음 전했으며, 그이 아내와 함RP 다시 말라카로 와서 밀른의 한 형제로 영접 받았다. 그는 새로운 자세로 일하였고 특히 성경공부 하였다.“

A-Fa 는 밀른이 세상 떠난후 모리슨과 함깨 복음증거하는 일하였고 2-3년 공부하여 전도인 자격증을 받았다.(Qualification for an Evangelist). 모리슨은 그가 “진리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할 수 있도록 내 머리에 손을 언고 안수해 주소서” 고백했다고 했다.(B.p436)

Ultra-Ganges Mission 선교사들도 순회전도에 힘썼다. 톰린(Tomlim)과 험프레이(Humphreys)는 말라카 해안을 따라 중국 주석광산 지역을 찾아 다니며 순회 전도하였고,B.p89), 내지 정글 까지도 방문하여 Linggi 강 상류를 따라 말레이 미을에 가서 함께 숙박하며 순회전도하기도 했다.(B.p91). 매드허스트는 Trengganu 해안을 따라 북부지역 까지 순회전도 활동하기도 했다. 이때마다 전도문서를 가지고 배포하며 전도하였다.

Ultra-Ganges Mission은 Batavia(Jakarta), Singapore, Penang 까지 전도활동 지역을 넓히고 선교지부(Branch)를 설립하여 교육사역, 문서사역, 인쇄출판사역, 중국인 뿐아니라 말레이, 인도계 학ㄱ와 교회를 세우며 전도활동 하였다.(Ultra-Ganges Misssion 선교사 사역 분야 및 기간 표 참조)

5. Ultra-Ganges Mission의 갈등문제

1) 선교의 근본 목적 문제

선교지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본국 선교회와 교회, 선교사 동료로부터 서로간의 견해 차이로 인한 갈등이일어 난다. 교육이냐? 전도냐?, 출판이냐? 복음전도냐?, 중국선교냐? 다인종 현지 선교냐?등등이다. 모리슨이 동 인도회사에 서기와 중국어 번역관으로 취직했을 때 선교사 본분에서 벗어난 일이 다고 쉽게 평하기도 했다. 학교 보다 전도를, 문서보다 직접 사람을 만나 대화하며 전도해야 할 것이라 했다. 유능한 청년들 교육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반 서민들 속에 들어가 복음 전해야 한다는 견해 차이를 가졌다. 중국문서, 말레이문서 등을 수집하고 저들의 문화와 관습, 생활을 연구하는 것 보다 복음을 들고 정글로 산업현장으로 어디든지 찾아가서 함께 지내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이해와 견해 차이에서 갈등이 발생 한다.

모리슨과 밀른의 인쇄출판 사역과 교육선교에 대한 비난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대응하는 모습을 다음글에서 볼수 있다.

일부 인사들은 문서선교를 비판키도 했다. 그리스도는 전도(Preach)하라고 보냈지 책쓰라고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모리슨은 문서선교가 효과적인 실제적 선교 활동이란 확신을 가지고 반박하였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학교설립도 비난하였다. 예수님은 “복음전파하라”고 파송했지 학교 세우라고 파송한 것이 아니다란 점이다. 이에 대해서도 모리슨은 Preach"란 영어단어에 6가지 다른 Greek가 있다고 지적하며 예수님도 가르치셨고,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에 가서 Teach하라고 한 사실을 중시하여 반박하였다.(H.p117) 예수님도 선교 방법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쓰셨으며 12제자를 모아 보내기전 가르치셨다고 주장하였다.

밀른은 말라카에서 학교를 개교했을 때, 부모의 동의 없이 어떻게 기독교교육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아 난처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밀른은 점진적으로 학생들에게 기독교 굘;문답등을 가르치고 에배에 참석 시켜 교육을 통한 선교를 이루어 나갔다.

학교선교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논의는 그 목적과 관계가 있다. 선교회와 교회들은 학생들을 개종시키고 교인으로 훈련 시키는 것이 목적이라 했다. 그러나런던선교회 선교사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며 복음을 받아들여 그들의 가정에 까지 전도하는 것이 였다. 교육선교의 결과는 미미한 것 같아도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에서 선교사들은 서구교육의 개척자이며 모듬 인종의 자녀들에게 학교를 개방하여 기독교를 가르쳤고

복음전도와 교회 개척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2) Sedentary Missionary 냐? Itinerant Preacher, Missionary냐?

선교 초기 때부터 선교사 목적 수행에 제기된 갈등 문제이다. 밀른과 신임 선교사들 시이에 일어난 문제로 책상에 낮아 있는 정적인 선교사냐?(Sedentarys), 순회 전도 선교사냐?(Itinerant)의 갈등이다. 학자나 지적으로 접근하는 이들과 전도로 대중성과 집접선교를 주방하는 선교사 간의 관점의 차이이다. 모리슨은 Scholar-Missionary 이다. 밀른 역시 동일한 유형의 선교사이나 언어 공부를하면서도 순회전도, 노방전도, 가르치며 전도하고 출판하여 문서로 전도하엿다. Collie와 Kidd도 Sedentary Scholar Missionary 유형이다.

그러나 매드허스트(Medhurst)는 개성이 강하고, 개별적인 길가는 선교사 였다. Humphreys, hughes, Tomlim들과 대부분의 말라카 선교사들은 순회전도자들이 였다. 사람들에게 가서 직접 복음을 전하고 활동하는데 헌신하는 선교사들이다. 이들은 특히 중국인들 중 엘리트들을 양성하는 기지 보다 대중에게 들어가서 건물 세우는데 괸심을 두었고, 중요한 것은 개인 접촉과 만남으로 여기며, 인쇄된 말씀 보다 구두로 전달 되야한다(Verbal Communication)고 주장하였다. 똰 언어공부 보다 평범한 서민들과 직접 개별적으로 대회를 통해 전도해야 한다고 여겻다. 그러므로 이들은 실제적으로 사용되는 지역 언어를 강조하였다. Mandarin 보다 Hokkien이 더 보편화된 지역인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곱 톰린(Jacob Tomlin)이 Anglo-Chinese College에서 Hokkien을 공부하고 사용했는데 이점이 모리슨의 비판을 받은 점이다. “Tomlin은 어슬렁 거리며 나다니기를 좋아하는 자” 표현하였다.

문제는 순회전도 유형 선교사들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는 점이다. 페낭에서 싱가폴로, 씨암으로 바타비아(자카르타)로 발리로 자바로 북부해안 까지 여행 다니나 성실하게 한 곳에서 일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도 ‘책상에 앉아 있는 샌님 선교사“라고 비난하지만 저들이 번역하고 발행한 성경과 전도문서를 가지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모리슨은 한 서교사가 인쇄하고 학교운영하고 설교 전도하고 대학교수도하고 선교 지휘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 공동 선을 위해 협력(Co-operation)으로 분담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불쌍하게도 밀른이 죽은 후 나는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음에서 울어나는 충실한 동반자를 가지지 못했다”고 모리슨은 특별 위원회에 넘겼다.(1834.1). 모리슨은 그해 1834년 8월 1일 광동에서 별세하였다.(B.p100)

4) 선교사 자질문제

IV. Ultra-Ganges Mission의 폐쇄와 홍콩 이전

1. Singapore Plan-Morrison과 Stamford Raffles의 계획

모리슨의 충실한 동반자 밀른은 College를 건축 추진할 때에도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말라카에 1819-1820년 콜레라가 유행하여 그이 부인도 1819년3월에 별세 했고 1821년에는 심한 고통, 두통, 위등 심각해졋다. 그래도 쉬지 않고 일하였고 1822년 1월에는 college에 새로운 지학 강좌를 시작 키도했다. 1822년 2월 20일 말라카를 떠나 싱가폴, 4월2일에는 말레이시아 서해안으로 말라카 거쳐 페낭 까지 항해하였다. 4월 11일 페낭에 도착 했을 때 그는 완전히 병자 였다. 페낭의 의사는 병이 심각하다고 진단했고 간장병이라 했다. 그러나 밀른은 어래동안 항해에 피곤할 것일 뿐이라 햇다. 5월 24일 말라카에 도착하였고 6월2일 주일 오전 2시에 별세하였다. 같은날 오후 4시 그의 시신은 Anglo-Chinese College로 옮겨졌고 성 바울 언덕(St.Poul‘ Hill) 성안토니(St Anthony)의 Dutch Cementery에 안장하였다. 모리슨은 그의 친구요 동료의 죽음 소식 듣고 “그는 잛은 생애에 많은 일을 했다”( 애통해 했다.(B.p66) 말라카의 Dutch Church의 밀른 기념석판에 다음과 같이 썼다.

“Mr Milne은 런던선교회 중국 개신교선교사로써 Anglo-Chinese College 학장을 지내셧고, 중국인과 말레이 청년 교육 감독관으로 일하셧다. 그는 그들의 언어로 유익한 책과 전도문서를 편집하엿고 기독교 복음을 충성스럽게 전한 교역자로써 이 교회에서도 목회일 하시고 무엇보다도 최초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모리슨목사와 협력(Co-operation)하여 일하셨다. 그는 1785년 Aberdeenshire, Kennethmont에서 출생하여 1912년 선교사로써 영국을 떠나 1822년 6월 2일 말라카에서 37새로 별세하셨다.”(B.p66)

밀른의 죽음은 그의 Chinese Magazine와 Indo-Chinese Gleaner 발행이 중지 되었고 모리슨은 밀른 없는 College의 미래를 염려하였다. 여기에서 새로운 College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수립케 되었고, 1823년 1월 싱가폴 방문 때 Stamford Raffles경으로 부터 말라카의 College와 같은 Malayan College학교설립 계획을 들었다. Raffles경의 계획을 모리슨은 선교회에 보고 하였고 Anglo-Chinese College에서 Malayan College 게획이 수립 되었다. 모리슨도 이 계획에 관심 가졌고 Raffles경은 말라카 College를 싱가폴로 이정 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이는 Malay와 Chinese를 동등하게 학문적 균형을 이루는 Malayan College로 통합하자는 제의인 것이다. 이는 말라카가 Dutch 정부 관활하에 있으니 영국해협식민지인 싱가폴로 옮길 것을 제의한 것이다. 모리슨은 심사숙고 하는 중 말라카 College와 선교사회 사이 관계성 문제로 포기하였다.모리슨은 1823년 2월4일 싱가폴에서 말라카를 방문하여 학교를 둘러 보면서 더욱 애착심을 가졌다. 신임선교사인 Humphrey, Collie, Huttman가 학교를 맡아 운영하는 것을 보았으나 중국어에 대해 무지한 것 보고 열심히 언어를 익힐 것을 권하였다.모리슨은 밀른의 편지와 글들을 모아 해안 맞은 편에 “밀른 기념관”을 만들고 밀른을 기념하는 비석을 히브리어와 중국어로 새우도록 했다.

Raffles경은 다시 모리슨에게 싱가폴 계획을 제의하며 싱가폴에 학교 부지를 제공하며 Chinese, Siam, Malayan Archipelago 지역학 발전 시키려는 계획을 촉구하였다. 교육기관은 3구조로 나뉘는데 Malayan College와 Chinese College(말라카에서 이전해 옴), 과학 College설립안이다.(B.p74). 모리슨과 Raffles, Colonel Farquhar 3자가 싱가퐁 공관에 모여 합의하고 1823년 6월 5일 Raffles애 위햐 Singapore Institution 주춧돌을 놓았다.

구러나 래푸릴경의 새 계획안은 이루지 못했다. 신임 싱가폴 총독이 거저라였고, 말라카는 영국 동인도회사 관활 지역으로 전환되었으며(1824년3월), 1826년에 Raffles가 영국에서 별세하였기 때문이다.

2. James Legge의 Hongkong 이전과 Ultra-Ganges Mission의 페쇄

제임스 레기(James Legge)가 Evans 학장의 별세로 1840년 1월 말라카에 부임하여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시대는 영국과 중국 사이에 아편 전쟁이 일어 나고 중국이 1841년 영국에 홍콩을 양도키로 하였으며, 상해를 개방하여 영국해군도 항해할 수 있게 도었고 1842년 남경 조약으로 5개항을 개항하고 홍콩은 영국 영토로 할당토록 조약체결 하였다.

레기는 중국선교는 중국 본토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고 중국의 문이 열렸으니 홍콩으로 이전할 것을 제의하고 강력히 추진하였다. 레기는 1842년 3월에 선교회에 서신을 보내 홍콩 이전을 제의하였고,선교회에서도 학교 문 닫기로 결정하였다.

Legge는 1843년 4월 28일 College를 2,120스페인 달러로 매각하고 Evans가 마련한 2채의 집을 포함해 3,650다러에 매각하였다. 그러나 1826-27년 건축한 Mission Chapel은 말라카 교인들이 사영 토록 남겨 두었다. malay와 영어 인쇄기는 tdrkvhf로 처분하고 Chinese Press와 도사관은 홍콩으로 이전 시켰다. 레기는 이러한 결정으로 말라카를 떠날 때 기뻐하였다. 1843년 8월 10일 홍콩에 7명의 선교사와 힘께 도착하여 런던선교회의 중국선교부를 설치하고 총회를 열엇다. 이 총회에서 Anglo-Chinese College란 명칭을 닫고 The Theological Seminary of London Missionary' Society Mission China로 변경키로 하였다. 이로써 Ultra-Ganges Mission은 1843년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V. 결 론

1. 동남아시아에 남긴 Ultra-Ganges Mission 배경문제

1). Colonialism과 결탁

European Colonialism과 기독교 선교가 일체되 있다는 점이다. 부라이언 해리슨은 “말라카 선교사들의 특성과 동기를 Europeanization의 세계진출과 이어져 있다“고 지적하였다.(B.p145). 유럽선교사들은 Westernization과 Christianiztion이 연결 되어 유럽과학과 이성의 승리가 기독교의 승리로 보았고(B.p148), 식민주의, 제국주의 운동을 혼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 Commercial과 결탁

서구 제국주의의 확장 정책인 상업주의에 편승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성경을 무기선과 마약과 함께 가지고 왔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B.p161)

3). Europeanism과 결탁

유럽인들의 Superiority 인식에서 아시아를 다루고 있는 점이다. 중국인과 그 문화애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것 같아도 유럽인들의 우월성과 결합되 있다는점이다. -서구인들의 우월감, 서구문명 전달이 곧 기독교 전파로 여겼다는 점이다.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들과 비슷한 유형으로 기독교와 함께 서구과학,수학,의학,기술을 전해 줬듯이 모리슨과 밀른도 중국을 접근하는 방식이 같았다는 점이다. 당시 계몽주의, 합리주의, 정복주의 사상으로 중국을 “무지와 미신”(Ignorance and Superstition)에서 구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B.p157)

부라이언 해리슨은 왜 기독교는 중국에서 외래종교인 불교의 위치에 이르지 못했는가? 묻고 이는 이상의 서구 제국주의, 상업주의, 우의식 가지고 북음과 함께 왔기 때문에 반(反) 기독교 운동을 일으켰다고 지적하였다.(B.p161)

이상은 21세기 새로운 세기에 한국선교사가 극복하고 아시아 선교를 감당해야할 방향이 된다.

2. Ultra-Ganges Mission의 Networking

1). 선임 선교사 중심으로 상호 협력 체계를 스스로 세워 나갔다. 모리슨과 밀른이 긴밀한협력과 Network를 형성해 나갔다. 이들은 서로 권위를 내새우는 관계도 아니요, 업적을 내세우는 관게도 아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소신 것 광동과 말라카에서 모든 일을 협력하였고 분담하여 하나의 일을 이루기도 했다. 중국어 교사 소개 및 인쇄공을 보내고 받으며 협력하여 중국어 번역의 대 사명을 이루어 냈다.

2). Ultra-Ganges Mission 은 선교사 자치 선교회로써 모든 문제를 함께 협의하며 뜻을 모아 나갔다. 당시 선교본부와의 연락은 6개월 걸리므로 긴박한 선교지의 문제를 신속히 다루지 못함으로 선교사들이 개별회 되고 독립적이 되는 일을 막고 협력관계를 수립할 수 있개되었다.

3). Ultra-Gangese Mission은 선교사역 전문분야 가지고 협력해 나갔다. 성서번역, 교육선교로, 인쇄 기술있는이로 문서선교사역, 말레이사역, 여성선교사역, 순회전도 사역등을 자기 분야를 가지고 협력 선교해 나갔다.

4). Ultra-Ganges Mission은 선교목적을 분명히 하여 이를 위한 효과적 협력을 모색하여 왔다. 중국선교를 목적으로 성경번역을 중요 목표로 하였다. 또한 중국인 전도인 양성과 유럽중국 선교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선교 현지를 중심으로 말레이 선교, 언어 인종별선교, 지역에서도 바타비아(자카르타), 싱가폴, 페낭에 지부를 두어 선교를확장 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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