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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학자료 > 강의안 등록일 200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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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도시 Roger S. Greenway
로즈 그린웨이의 도시 선교신학
서 론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는 전세계가 급속히 도시화되고 있기 때문에, 그 도시가 가져오는 많은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기독교 운동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기독교 선교도 또한, 현재 추세로 나간다면, 대부분이 비기독교인이 될 도시민들을 향해서 펼쳐질 것이다. 어느 곳을 가든지 나는 기독교인들이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1) 도시의 성장과 복잡성 그리고 세계적인 도시화가 교회에 주는 함축성과 교회의 사역; 2) 복음전파와 선교의 본질, 전인격(영혼, 몸, 정신)에 호소할 수 있는 복음전파의 방법; 3) 교회의 영적 소생과 부흥.

이 시점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담대하게 걸음을 내딛고, 교회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고, 믿는 자의 무리를 배가시키고,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과 사역을 통해 도시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성령를 의뢰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따라 도시에 직면하도록 도전을 준다면, 우리는 그 일에 필요한 모든 자원들이 이미 예비되어 있고, 마침내는 도시가 우리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도시의 성장을 통해서, 지금까지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전도의 추수를 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의 선교 운동
신약성경의 선교운동은 주로 도시에서의 운동이었다. 오순절에서 시작하여 복음은 도시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주변 마을로 퍼져갔다. 기독교 신앙이 3세기의 콘스탄틴 시대 휠씬 이후까지 큰 성공을 누렸던 곳은 바로 로마제국의 도시에서 였으며, 그 도시 환경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각, 행동, 그리고 복음전파의 방법을 형성하는 틀이었다. 21세기는 주로 도시세계가 될 것이기에, 초기 기독교 신앙과 특히 사도들의 선교사역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역사적 관심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계속 커가고 있는 세계의 도시와 관계하며 성경적으로 목회할 것을 추구하는 이 때에, 우리에게 지침이 될만한 원리들과 모범들을 성경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성령께서 우리가 도시 선교하는 안내가 될만한 중요한 지표들을 성경속에 담아두었다. 주로 바울에게 관심을 두고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울의 선교사역은 공동의노력 이었음 성경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과 도시

웨인 미크스(Wayne Meeks)는 그의 저서 <1세기 도시 기독교인들>에서 바울은 철저히 도시사람이며, 그의 언어가 도시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바울의 언어나 은유들은 주로 도시세계로부터 끌어온 것이다.

바울이 회심할 때 주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도시(다메섹)로 - 여기서 그가 해야할 일을 지시받음(행9:6) - 가라고 말씀하실 때부터, 나중에 바울이 로마(행28:31) 감옥에 갇힐 때까지, 바울 선교사가 도시에다 주력하여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번창하는 헬라 도시들로 가서, 그 속에 복음적으로 왕성하고 성장하는 신약시대의 교회들을 세웠다.

제자 만들기
어느곳에 있든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충성으로 돌아설 필요가 있으며, 제자의 삶에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한다고 하는 전제가 바로 신약의 중심되는 선교전략이다. 사도들의 마음에는 그리스도께로의 회심은 우주적인 필요라고 확신했고, 그러한 확신가운데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똑같이 설교하고 복음을 증거한 것이다. 신약성경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죄인들이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하고, 신자들의 복음 증거를 통해서 교회가 성장하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새로운 질서를 삶의 전영역에 적용하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확장될 수 없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무엇을 해야할지가 명백할진대, 몇 몇 다른 복음주의 일파는 다른 것을 내세우며, "회심"(conversion)이란 말을 거의 쓸모없는 단어로 여기고 있다니 이것을 이해할 수 가 없다.

얼마전에 스티븐 닐 주교가 많은 주류파 교회에 일어나는 변화을 관찰하면서 그 변화가 회심을 강조했던 바울의 입장과 얼마나 대조가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만약 <사람들을 회심시키기를 원하느냐?>는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면, 현대의 많은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의 대답은 철저한 "NO"일 것이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의 대답도 역시 철저한 "Yes"는 아님에 틀림없다."고 말하면서 "회심"이라는 단어는 이제 매우 인기없는 단어가 되어버렸으며, 오늘날은 회심이라는 단어를 단도직입적으로 꺼내기보다는 완곡하고 부드럽게 말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같다는 지적을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도시에서 해야 할 일을 목록에 적는다면 그 첫번째가 무엇이 되야겠는가? 만약 신약에 나타난 그 전략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요 주인으로 고백하는 복음의 선포가 첫번째일 것이다. 적어도 회개와 회심를 요구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의 프로그램을 이 땅에 실현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나라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파한 그 나라가 아니다. 신약에서의 제자도는 믿음, 예배, 그리고 윤리에 있어서의 급격하고도 계속적인 변화를 의미하고 있다. "모든 것이 새 것이 되었다"(고후5:17).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의 회심이 바로 로마 도시에서 잘못행해진 것들을 바꾸는 첫번째 단계였다.

가정에 초점을 두다
바울이 도시선교에서 사용한 회심은 가족 중심의 접근방법이었다. 신약에서 언급하고 있는 "집안"(household: 행16:15; 고전1:16; 갈6:10)이라는 말은 오늘날 남미세계에서 볼 수 있는 확대가족과 친족의 유대와 다른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 집안을 사용하여 그가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믿음을 확립시킨 것이다. 요셉 그래씨(Joseph A. Grassi)는 집안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오이코스"(oikos)와 꼭 맞는 영어번역은 없다고 말하면서, "오이코스는 종종 함께 사는 확대가족을 말한다. 그 구성원은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가족 구성원뿐 아니라 고용인, 노예, 소작인, 그리고 다른 딸린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석하고 있다.

집안의 우두머리가 온 식구들을 회심하고 세례를 받도록 했다고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은 종종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넬료(행10:2), 빌립보의 간수(행16:31), 빌립보의 자주장사 루디아(행16:15), 데살로니가의 야손(행 17:5-9), 고린도의 그리스보(행18:8) 같은 이들의 집안이 회심하여 세례받은 사건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바울이 집안에 머물러서, 말씀을 전파하고, 첫번째 개종자들을 세운 기사들을 서신서의 여기저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변화된 가정과 사회
온 집안식구들, 부모, 자녀, 종, 노예, 방문객, 친족과 친구들이 모두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고 성만찬을 함께 나누었다. 이렇게 성찬의 식탁에서 주인과 노예, 여자와 남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동일한 구원을 축하하는 것은 당시 이방의 인종적, 사회적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교회의 본성을 "하나님의 식구"(엡6:10, 엡2:19)로 보는 가장 기본이되고 중요한 교훈을 통해서 가정과 사회가 변화된 것이다.

한 때 도시학자들이 도시에서 가족의 유대가 느슨해져서 도시 사람들의 삶과 태도에서 가정의 역할이 점점 미약하다고 언급하던 때가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전제위에 "산업 선교" 전략이 발달되어 나온 것이다. 산업선교사들은 도시에서는 개인이 속한 직업적, 교육적, 정치적 관계가 가족관계보다 더 큰 역할을 차지한다는 이론을 세웠다. 그러므로 도시사람을 만나 영향을 주는 장소는 바로 그들이 일하고 여가시간을 보내는 곳이지 가정이나 가족이 아니라고 했다. 이 산업 선교 이론은 이제 한물간 것이 되었다. 남미 세계의 도시들에서 특히, 가족과 같은 일차 집단이 교제, 애정, 그리고 안정의 욕구를 채워주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연구들이 방대하게 나오고 있다. 그 어느 곳에서도 가정에서만큼 기본욕구를 채워주는곳은 없으며, 도시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은 여전히 그의 가족과 연관되어 있다.

이 점에서 1960년대에 남미에서 에밀리오 빌렘스(Emilio Willems)가 가치있는 연구를 내놓았다. 빌렘스는 남미의 오순절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오순절 운동이 오순절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오순절 운동이 확산되는 사회적 조건를 아는데 호기심이 있었다. 그가 수집한 자료들을 통해서 내린 결론은: 복음적인 믿음에로의 회심이 개인과 가족의 삶의 방향을 전환하고 도시생활이 대체로 향상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요인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은 믿는자 안에 머무시는 성령(롬8:2-4)께로부터 온다. 바로 그것이 회심이 사회적으로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 이유이다.

회심자와 교회
신약의 선교전략은 복음을 전파하고, 회심자를 얻고 그리고 교회를 배가하는 것을 강조한다. 바울도 그의 세차례의 전도여행을 통해서 가는 곳마다 설교하고, 회심자들을 모으고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 지역 자치(self-governing)의 교회를 형성하게 했다.

이와같이 바울이 교회세우는 것을 강조한 밑바닥에는 깊은 신학의 전제들이 깔려있다. 우선 그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 세상속으로 개입하셨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라고 말했을 때,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 뜻을 금새 알아챘다. 예수님은 바울이 핍박하고 있는 공동체인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잘 알고 계시고, 너무나도 사랑해서 교회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의 회심의 순간부터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그의 계획과 의도를 수행하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바울에게서 교회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바로 그 메시야적 공동체였다. 교회는 모든 종속과 나라에 전파할 복음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역사속에 완성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운 것이다.

평신도의 복음증거
도시에 대한 바울의 전형적인 접근법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수동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아니라, 같이 일할 협력자를 얻는데 관심을 쏟았다.(예,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바울은 교회를 세우는 사람일 뿐아니라 훈련자요 지도자(coach)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지역적 책임사이의 공동 노력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된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바울은 도시나 한 지역전체의 복음화가 자기 혼자만의 일이라는 인상을 결코 남긴 바가 없다. 반대로, 바울은 회심자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영혼을 구원하고, 리더쉽을 맡고, 그리고 바울 자신이 이미 시작한 그 일을 계속해 줄 것을 가르쳤다. 칼 크롬밍가(Carl G. Kromminga)는 평신도 복음증거의 필수적인 본성에 대한 신약의 증거를 요약하면서, "신약의 증거들은 믿는 자들이 다른 사람에게-신자들이 일상 생활에서 접촉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선교와 제도권 교회의 주된 특징을 이루는 선교 전문주의(professionalism)는 대체로 1세기의 기독교 운동과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도시 중심지가 전문 선교사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특히 이것은 음미해볼만한 중요한 사실이다. 현대의 도시 사역자들은 사도들이 어떻게 그들의 개인적인 열정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었는지 그 방법을 알고 싶은 것이다. 나는 로마서 16장에서 그 답의 일부가 암시되어 있다고 믿는다. 거기보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동역자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바울이 그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적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의 자격으로 기록된 것이다. 여기에 초기의 복음전파의 비밀이 있다. 회심은 사람을 응모(enlistment)하는 것이며, 그런고로 선교는 모든 사람의 일인 것이다.

평신도 복음증거의 주제를 놓고 볼 때, 서구교회는 남미의 교회에게 배워야만 한다. 서구교회가 어떤 강점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들은 실제적인 제자도와 평신도 복음증거의 영역이 약하다. 서구의 주류 교회는 너무나도 지성화되었고 제도화되어서 불씨가 꺼져가고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신앙이 중류층이 주류를 이루지 않고, 노동자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의 복음은 여자, 남자, 심지어 어린이들로 된 "평신도" 전도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그런 시절은 지나가고 이제는 선교전문주의가 서구교회의 선교에 주된 특징을 이루고 있다.

평신도 설교자들
1세기 도시들은 주로 평신도 설교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되었다. 고인이 된 네덜란드 선교학자 바빙크(J.H. Bavinck)는 사도행전에서 공인되지 않은 평신도 설교자들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스데반의 죽음뒤에 이어진 박해후에, 흩어진 사람들이 나라 전역에 다니며 두루 복음을 전파했다.(행8:4) 초기 교회의 전도활동은 직책을 가진 사람보다는 직책이 없는 수많은 남녀 평신도의 활발한 역할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같은 복음의 자발적인 확산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활용하고 조직화했다는 것이 바울의 커다란 강점이다."라고 주장한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하나님께서는 북미와 남미교회에서,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자를 들어 쓰셔서, 전통있고 지혜를 축적한 오래된 교파들보다 더 부흥하고 있다니 말이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교단체들을 들어쓰셔서 평신도 사도직의 수행을 위한 구조틀과 수단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사도적 유산
사도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로마제국 도시사회에서 새로 기독교인들이 된 사람들에게, 오늘날의 도시 선교사들이 본받아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것을 가르쳤다. 첫째로, 죽으심과 부활로 예수가 메시야되시고, 세상의 구세주가 되셨다는 핵심진리를 중심으로한 분명하고 간결한 교리를 과감하게 가르쳤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중심으로한 개인, 가족과 교회의 훈련을 위한 행동의 도덕체계를 철저히 말해주었다. 셋째로, 그들은 지역 교회 조직화를 통해서 높은 수준의 결속력과 집단 정체성을 갖도록 장려했다. 훈련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지역적 정체성과 제국에 걸쳐 있는 여러 교회들간의 초지역적 정체성, 이 이중적 정체성이 신약의 전도운동의 강력한 요인이 되었음이 증명되었다.

복음전파와 교회성장에 기여한 사도들의 유산가운데 또 한가지 중요한 요소는 그들이 성령과 성령의 기름부으시는 교제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성령의 교제
도시의 사람들은 사람들간의 관계, 성경에서 교제를 의미하는 단어인 코이노니아를 갈망하고 있다. 도시에서 교회는 거듭난 자, 성령의 전, 하나님의 식구들의 교제를 제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교회에서 소위 "교제"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교제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다. 고작해야 다정한 친목을 도모하고 재미있는 것인데, 그것은 교회밖의 클럽이나 사교단체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과 성령과의 상호교통 그리고 가족의 구성원인 신자들 사이의 교통같은 초자연적인 교통은 찾아보기 힘들다. 초기 교회가 경험한 교제는 커다란 강당이나 멋진 예배의식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소그룹과 개인집, 그리고 종종 박해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고로 남미교회는 서구교회의 전통보다는 신약의 원리를,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전통에 묶인 구조보다는 성장하고 기쁨이 있고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교통은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분위기속에서 도시의 교회는 성장하고 회심자도 배가할 것이다.

적절한 리더쉽과 떠날 때를 아는 것
도시환경속에서 교회발전을 효과적으로 계획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의 전략가운데 한 요소를 새롭게 주목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바울사도가 다양한 지도스타일을 사용했다는 것과 새롭게 세운 어린 교회를 그들 자신의 손에 맡기고 떠날 시기를 결정하는 지혜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0:17-38에서,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에 고별설교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영적지도자요 교회개발가(church developer)인 바울은, 그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점차로 성숙해감에 따라서, 그의 지도스타일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숙 과정의 각 단계마다, 바울은 그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성숙도에 따라서 그 교회에 적절한 관여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효과적인 선교의 지도력의 중대한 비밀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비밀은 교회공동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속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변화들에 반응하여 지도스타일을 바꾸는데 있다.

에베소에서의 3년동안의 사역후에, 바울은 떠날 준비가 되었다. 에베소 교인들은 그가 떠나는 것이 다른 지역에 더 매력을 느껴 그들을 "버리거나", 에베소 시에서 생활하는데 싫증을 느껴 떠나는 것이 아니고, 바울이 떠남으로써 그들에게 "벌을 주고자"함도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너무 일찍 떠나는 것은 미성숙함과 신앙과 그 의미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어린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에베소 교인들은 이제 자립해서 성장할 만큼 안전하다고 하는 바울의 신뢰를 얻은 것이다.

반면, 너무 늦게까지 눌러앉는 것은 그들을 계속해서 바울 사도의 인도에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계속 눌러앉는 것은 에베소 교인과, 말씀과 성령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바울은 떠날 때를 제대로 안 것이다.

바울의 전략의 위험성
틀림없이 바울의 전략에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역 전체가 위험을 감행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으며, 바울은 실제로 필요한 기간보다 더 오래 머물러 있어 그로인해 자신의 지도력에 의존하도록 만들고 결국에는 그가 계속 머물러 영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야기시키는 더 커다란 모험을 감행하기보다는, 그 지역의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넘겨 주어서 실패를 무릎쓰는 것을 더 선호했다.

여기에 우리는 오늘날 도시 세계의 교회개발가들을 위한 중요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교회개발의 여러 단계마다 선교사는 적절한 역할을 해야하며, 선교사는 그 지역에 지도력있는 지도자들을 양육시켜 나중에 혼자서도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이미 계획한 지혜로운 고별시간에 대비하여 어린 교회를 준비시키기 위한 바울의 전략은 무엇이었나? 첫째, 그가 거기 있을 때 한 일, 즉 그 지역의 리더쉽을 양육하는 일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둘째로, 그가 떠나온 후에 한 일, 즉 편지나 방문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강화해주는 프로그램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장기적인 강화
바울은 지속적으로 장기적인 강화 전략을 계속했다. 자신이 직접 재방문을 하든지, 편지를 쓰든지, 아니면 일군들을 시켜 짧은 목회적 방문을 하게했다. 어느 의미에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된 찬양을 받으시는 예수의 일곱 편지가 강화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 편지들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들에 대해 교회를 칭찬하는 긍정적인 강화를 주는 반면, 경고와 책망을 하는 부정적인 강화도 주고 있다.

대체로 선교사들은 한 일자리에 영원히 머물러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빨리, 그들은 책임을 지역의 믿는 자들에게 넘겨주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도행전 20장 끝부분에서 보여주는 감동스러운 장면처럼, 최단시간에 교회식구들이 제자리를 차지하게 하고, 자발적이고 능력있는 지도자들에게 맡긴 채, 선교사들이 그 교회에 느끼는 애정어린 감정과 선한 양심을 가지고 떠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전략인 지역지도자들과 신실한 일군들을 양육시키는 의도적인 전략을 빠뜨리고 있다.

긴장과 기대
그 당시의 사회악에 관하여는, 특정악과 직접적인 갈등을 일으키거나 그 갈등을 처리하는 고정된 접근법에 의한 것보다는 긴장과 기대에 의한 것이 특징을 이루고 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같은 공동체내에서 사회적인 지위가 다르고, 모순들과 해결되지 않은 사회문제들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모든 문제에 즉시 대응하는 대신에, 바울과 그의 동료는 엄청나게 중요한 변화를 위한 기초를 놓았다. 그들은 성경을 가르치고, 기독교 공동체를 세워주고, 앞으로 올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확고한 기대감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인내심있게 의지하는 것을 신자들의 마음속에 심어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신자들을 자유케 했으며, 현재의 모순에 대한 지나친 염려로부터 자유케 했으며,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자유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앞에 닥친 문제들과 자유하는 마음으로 씨름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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