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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학자료 > 선교역사인물 등록일 2007-10-15
작성자 관리자 (admin)
언더우드_5代에걸친한국사랑
조선 선교사로 두번씩 거절 당함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영국 런던 출신으로 1872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대학 뉴브룬스윅 신학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신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1883년 신학교 연맹 모임에서 조선 민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조선은, 천3백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어 작년에 문호를 열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조선 민족을 위해 선교사로 갈 것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

당시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어 처음으로 서양과의 교역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던 것입니다. 알버트 목사님의 호소력 있는 메시지는 많은 신학생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그 당시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선교에 대한 강한 도전을 받았으나, 조선으로 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인도 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정도로 잘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버트 목사님의 조선 선교의 권유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언더우드는 개인적으로 친구들에게도 권유해 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다 국내에서만 사역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마음을 받는 이는 많은데 전하는 이들을 적은 것을 보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생각합니다.

"왜들 이럴까? 헌신을 맹세한 사람들이 왜들 다 미온적이고 부정적일까? 복음의 처녀지, 주님이 기다리시는 그 땅으로 갈 선교사가 이렇게도 없다는 말인가? "

그때 돌연히 강력한 반문의 소리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너는 왜 못 가느냐 ?"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나 자신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주님의 부르심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렇다 왜 나는 못 가는가?"

그는 단 한 번도 복음을 못 들어 본 미전도 종족인 조선민족에게 선교의 우선순위가 있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한 번의 희생을 치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동안 인도를 위해 인도 말을 배우고 준비해 놓은 것들을, 모두 조선 선교를 위해 포기하기로 한 것입니다.

어려운 결단을 하고, 조선을 선교지로 정하고 나서 교회와 선교부에 조선 선교사로 가기로 요청을 하였지만, 두 번씩이나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조선 선교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면서 우여 곡절 끝에 장로교 본부회의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미전도 종족인, 우리 민족을 가슴에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장도의 길에 올랐습니다. 한 달 여 걸리는 긴 항해 끝에,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2일 부산 앞 바다에 잠시 정박하여, 조선 땅과 조선민족을 처음으로 바라보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부산을 떠나 삼일 후인 , 4월 5일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선교보다 언어가 더 어렵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만큼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 어려운 조선말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하나님도 그 마음을 아시고 그에게 언어의 은사를 주셔서 선교사님 중에 가장 조선말을 잘 하는 선교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는 후배 선교사들을 위하여 한국어 문법과 한영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성경번역 위원으로 조선어 성경을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한국에 온 다음해인 1886년에, 한국의 첫 고아원을 세웠고, 이어 고아학교를 창설했습니다. 이 학교가 발전하여 서울의 경신고등학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대학 창립을 마음에 계획하고, 후에 연희전문대학을 세웠습니다. 그 학교가 지금의 연세대학 인 것입니다.

1887년 9월 27일에는, 집 사랑채에서 14명이 참석하여 첫 예배를 드리는데 이 교회가 후일 새문안 교회의 첫 예배가 되었습니다. 서상륜과 백홍준이 그 교회 첫 장로가 되고,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서상륜과도 끊이지 않고 연결하여 그를 통해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한국교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습니다.

종교계는 물론 교육 사업까지 활발하게 펼쳐 당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은 앞서 서양의술의 전래와 신식학교, 그리고 삶의 패러다임까지 1주일단위로 바꾸어 놓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선교일화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총각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오셔서, 28세가 되던 해 자기보다 8살 연상인 릴리아스 홀톤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신혼여행은 상당히 흥미가 있습니다.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계획하고 평양을 향하여 출발하는데, 그가 머무는 곳마다, 조선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을 처음 보는 조선 사람들은 모두가 신기하여 머리카락을 만져 보기도 하고, 눈을 뒤집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곤욕스러운 것은, 밤마다 신혼 방에 구멍을 뚫고 쳐다보는 바람에 혼이 나기도 합니다.

그는 한국에서 31년간 사역을 하면서, 종교, 교육, 문예, 자선 등 다방면에 걸친 봉사를 하다가 발진티푸스병이 악화되어 1916년 4월 요양차 미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됩니다. 세상을 뜨기 전 그는 부인을 향해“내가 저 먼 나라로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소?”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인이“거기가 어디예요 한국 말씀이예요?”하고 물으니 안색이 밝아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언더우드는 1916년 10월 12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참으로 조선을 사랑한 선교사였습니다.

그토록 조선을 위해 헌신하는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묘는 1999년에 양화진 땅으로 이장을 하게 됩니다. 그 동안 미국에 묻혀있었는데 1999년이 되어서야 옮기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도 사연이 있었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의 손자인 원일한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원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뉴욕근처 작은 교회에 묻혀 있던 시신을 한국으로 옮기자는 친지들의 의견이 많았어요.

할아버지의 한국 사랑의 정신을 기리자는 것이었죠. 하지만 할머니는 그 이장비용으로 차라리 한국에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반대의견을 내셨어요.”

결국 언더우드목사의 부인이며 한국 최초의 여성 의료선교사였던 릴리아스의 뜻에 따라 한국에 유치원이 세워졌던 것이었습니다. 그 후 이장문제는 오랫동안 거론되지 않다가 연세대학교의 배려로 1999년 5월 이장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 가족은 지금 5대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 사랑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저는 언더우드 선교사님 가족 묘지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묻혀있는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가족들에게도 감동을 받지만, 그 곳에 묻히기를 원하는 손자, 증손자의 빈 무덤 터가 더 큰 감동을 줍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 가족은 대를 이어 우리나라 땅에 묻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의 삶이 있는 현장이 우리나라 땅이었고 우리 민족이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또한 어느 민족, 어떤 사람에게 이러한 삶을 살아갔다고 기억되는 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 / 이 곳에서 새문안교회가 시작되다.


자료정리 _김학천.
khc3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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