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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기획, 특집 > 등록일 2007-09-29
작성자 관리자 (admin)
개역성경, 개정판에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나? 2
2. 틀린 말에서 바른 말로의 개정(改正)
개정의 내용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틀린 말을 바른 말로 개정하는 것이다. 틀린 본문을 그대로 가지고 목회자는 설교를 하거나 성경을 그대로 가르치고, 교인들은 그대로 배우고 잘못 알게 된다면, 이것처럼 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을 잘못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그 주요한 것을 들어본다.

1) 세계 → 계보 (마 1:1)

성서공회의 개정안에서는 '계보"였으나, 감수위원회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1995년의 개정판에서는 개역성경의 "족보"를 그대로 두었다가 1998년의 개정판에서 다시 개정안대로 '계보'로 바꾸었다. "족보"란 말은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16절까지의 내용에 맞는 정확한 낱말이 못된다. 왜냐하면, 거기에 수록된 이름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모든 조상들의 이름이 아니라, 한 계통 (lineage)으로 이어진 조상의 이름만을 수록한 것이다. 예컨대, 아브라함 다음 대에서 이스마엘이 제외되고, 이삭 다음 대에서는 에서가 제외된 것과 같다. 원어 geneseos 와 영어의 genealogy 에 해당되는 우리말은 "세계"(世系)이며, biblos 를 포함해서는"계보"(系譜)이다. "세계"라는 말은 한글로 적으면, 영어의 World 에 해당되는 "세계"(世界)와 혼동될 우려가 있으므로 쓸 수가 없다. 같은 개념의 한자어를 쓰는 중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에서도 각각 "가보"(家譜)나"계도"(系圖)를 쓰고 있고, 개역처럼"족보"(族譜)라고 쓴 것은 없다.

2) 오늘날 → 오늘 (마 6:11 외 여러 곳)

개역성경에는 주기도문의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을 비롯해서 "오늘"을 "오늘날"로 잘못 쓰고 있는 데가 너무나 많다.`*1 "오늘날"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semeron 으로서, 우리말의 "오늘날"이 아니고 "오늘"임은 물론, 모든 외국어 번역성경이 다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2 "오늘"과 "오늘날"의 차이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아는 바이지만, 국어사전의 정의를 보면, "오늘"은 "지금의 이 날 하루"라고 되어 있고, "오늘날"은 "지금의 이 시대"라고 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은 "어제와 내일 사이의 24 시간의 하루"이며, "오늘날"은 "오늘을 전후한 여러 날, 또는 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오늘"에는 또 한 가지 뜻이 있는데, 그것이 곧 "오늘날"의 뜻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 교회의 오늘의 사명은..."이라고 할 때, 여기서의 "오늘"은 물론 "하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이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이란 말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24 시간의 하루를 가리키는 뜻이 없다. 주기도 가운데의 "오늘"이 하루를 가리키는 것은, 그 다음의 "일용할 양식을..."이란 말과, 누가복음의 주기도에서는 "날마다"로 번역된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오늘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라고 해야 할 것을 "오늘날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라고 한다면 어이가 없는 것처럼, 한국 교회 교인들은 아직도 잘못된 개역성경 때문에"오늘날 우리에게 ... "로 어이가 없는 주기도를 하고 있다. & #985168;오늘"이"오늘날"로 잘못되어 있는 곳은 개역성경에 수다하다(예, 눅 2:11, 히 3:7 등).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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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눅 2:1의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수 24:15의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히 1:5의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에서의 "오늘날"도 다 "오늘"의 잘못이다.

*2) 영어의 this day 나 today 는 물론, 독일어의 heute, 불어의 aujourd hui, 중국어의 '今天,' 일본어의 '今日' 등.

3)오히려 → 아직 (막 10:21 외 여러 곳)

이 낱말도 개역성경에서 잘못 번역되었는데, 개정판에서는 바로 고쳐졌다, 예컨대, 마가복음 10:21과 누가복음 18:22에서,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에서의 "오히려"의 원어는 eti 로서 "아직도"란 뜻인데, 그것이 개정판에서는 "네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으니..."로 바로 고쳐졌다. 그 외에 구약 레위기 14:18의 "오히려 그 손에 남은 기름은..."이 "아직도 그손에 남은 기름은..."으로, 룻기 1:11의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가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로, 열왕기 상 20:32의 "아합이 이르되 그가 오히려 살아 있느냐"가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로, 욥기 36:2의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가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등과 그 외에도 여러 곳에 잘못 번역되어 있던 것이 다 고쳐진 것이다.

4)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마 6:34)

개역성경에서의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가 개정판에서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의 개역으로는, 내일 일을 염려하되 오늘 하지 말고 내일에 하라는 말, 즉 염려하는 시간(날)에 관한 언급으로 이해되는데, 원문의 뜻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 자체가 염려할 것이니, 너는 도무지, 내일에도 염려하지 말라는 뜻, 즉 염려하는 주체(네가 아닌 내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도 "...그 날로 족하니라"로서 더 정확한 표현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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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어성경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1989)에서는 for tomorrow will bring worries of its own 으로, 우리말 표준새번역에서는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로 되어 있다.

5)"주여 내니이까"→ "주여, 나는 아니지요" (마 26:22, 25, 병행)

예수께서 제자 중 한 사람이 스승을 팔 것이라는 예언을 하셨을 때, 제자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하는 말을 개역성경에서는 "주여 내니이까"로 되어 있던 것을 이번의 개정판에서는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바로잡았다. 이 말에 대한 원어는 meti ego eimi kyrie 로서, 정확하게 번역하면 부정사를 써서 "주여 나는 아니지요"로 해야 한다. 개역의"주여 내니이까"는 헬라어 원어를 유의해서 보지 아니하고 영어성경(King James Version)의 "Lord, Is it I?"나 중국어 구역 "主 是我磨"를 보고 잘못 번역한 듯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든 번역들은 부정사를 넣어서 분명하게 번역하고 있다: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에서는 "Surely not I, Lord?"로, 독일어역 Die Gute Nachricht 에서도 "Du meinst doch nicht mich, Herr?"로, 중국의 現代中文譯本에서도 "不是我把"로, 일본어성경 改譯과 新改譯이 다 "主よ。まさか私の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 로, 그리고 우리말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에서도 각각 "주여 나는 아니지요"와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등으로 바로 번역되어 있다.

6) 고소 → 고발 (마 27:12)

개역--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는지라

개정--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

개역 본문의 '고소'는 그 내용으로 볼 때 고소가 아니고 고발이므로 개정판에서는 '고발'로 바로잡았다. '고소'와 '고발'은 다같이 법률용어로서 비슷한 말이기는 하나, 같은 뜻의 말은 아니다. 즉, 고소는 범죄의 피해자가 수사기관에 범죄사실을 알리고 그 수사와 처리를 요구하는 것을 말하는 데 대해, 고발은 피해자가 아닌 제 삼자가 수사기관에 범죄사실을 신고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의 경우에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어떤 일로 말미암은 피해자가 아니므로 고소가 아니고 고발인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 두 낱말을 잘 구별해서 설명해야 한다. 이번 개정판에서 개역의 '고소'를 '고발'로 바로잡은 곳은 이곳 외에도 막 15:3, 눅 23:2,14, 요 5:45, 8:6 등 여러 곳에 있다.

7) 증거하러... → 증언하러... (요 1:7)

"그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 에 대하여 증언하고"

개역성경에서 '증거하다"가 동사로 쓰인 경우는 수다하다. 그러나 "증거하다"는 결코 사전에도 없는 틀린 말이다. 즉, "증거"는 명사로만 쓰이는 것이며, 거기에 동사 어미 "--하다"를 붙여서 동사가 될 수 없다. 원어 Martureo 에 대한 바른 번역은 "증언하다"이며, 이것은 이번 개정판에서 모두 고쳐졌다.

8)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 영과 진리로 예배 (요 4:24)

개역--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개정--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개역 본문의 "신령과 진정"이 개정판에서 "영과 진리"로 바뀐 것이다. 이 원문은 en pneumati kai aletheiai 로서, 우리말의 "신령과 진정" (神靈과 眞情)은 합당하지 않고

'영과 진리' (靈과 眞理)가 바른 번역이다(영어성경에서는 예외 없이 in spirit and truth).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의 잘못된 예배관을 시정해 주는 말씀으로서,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의문적 (儀文的)이고 형식적이고 물질적인 제사를 부정 경계하는 것이며,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뜻은 아니다(그러므로, 영어로 쓰면 대문자 S로 쓰지 않는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이방인들 (사마리아인 같은)의 거짓 신에 대립되는 참 신에 대한 예배를 뜻하는 것이다. 즉 예배할 장소와 예배할 때와 예배할 대상을 바로 알아서 참된, 진정(眞正)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여기 '진정'은 한자어 (국한문 성경에서)로 '眞正'이 아니고 '眞情'이니 더더구나 안 된다. 이 본문은 목회자들이 많이 인용하고, 또 설교의 본문으로 삼는 중요한 구절인데도, 대다수의 설교자들이 개역성경 본문의 번역이 잘못되어 있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설교해 온 것이 사실이다 (주석서에서도 성경 본문의 번역의 잘못에 대해서는 언급? 構?있지 않기 때문). 이제 설교자는 더 이상 지금까지의 개역성경을 쓰지 말고, 개정판을 씀으로써 우선 본문에서부터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9)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딤전 4:7-8)

디모데전서 4장 7-8절의 개역본문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로 되어 있는데, 이번의 개정판에서는 "…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 "으로 바로잡았다. 개역 본문의 '연습'은 전혀 잘못된 번역이므로, 이미 1967년의 새번역과 1971년의 공동번역에서는 다같이 '훈련'으로 번역하였는데도, 설교자들은 거의가 아직도 '연습'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을 본다. 개역 본문은 헬라어 원어인 '김나제' (gymnaze)를 영어 (exercise)로 번역한 것을 따라 번역한 듯하나, exercise가 본 문맥에서는 우리말의 '연습'이 아닌 것이다.

10) 권세 있는 자 → 권위 있는 자 (마 7:28-29)

마태복음 7장 28-29절의 개역 본문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로 되어 있는데, 이번의 개정판에서는 "…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 함일러라"로 개정하였다. 이 본문에서 '권세'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 엑수시아 (exousia)는 영어로는 (authority)로 번역된 말로서, 개역의 '권세'는 바른 번역이 못된다.

이 말에 대해서도 1967년의 새번역과 1971년의 공동번역이 다같이 "권위…"로 바로잡았으나, 개역성경만을 보는 많은 목회자는 잘못된 번역 때문에 계속해서 잘못 알고, 또 잘못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개역성경에서 '권세'로 번역된 많은 경우에 그것이 잘못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 몇 가지 예를 들면, 마태복음 6장 13절의 '권세'는 그 헬라어 원어가 뒤나미스 (dunamis)로서, '권세'이기보다는 '권능' (영어로는 power)이며, 이것은 1967년 새번역과 1971년의 공동번역에서도 고쳐지지 않은 것이 이번에 처음으로 고쳐졌다.

헬라어 '엑수시아' (exousia)에 대한 개역성경의 번역은 거의 '권세'로 일관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 문맥을 보면, 동일한 어휘는 동일한 어휘로 번역해야 한다는 원리를 적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번의 개정판에서는 그 문맥을 따라 가장 많은 '권세' 외에 적어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달리 번역하였다. 첫째, '권위'로서, 위에 예로 든 마태복음 7장 28-29절 외에도 마태복음 21장 23절의 "… 또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등 여러 곳이 있고, 둘째는 '권능'으로서, 마태복음 9장 6절8절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 등 여러 곳, 셋째는 '권한'으로서, 요한복음 19장 10절의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는 줄을…" 등의 경우이다.

11) 거룩한 산 제사 → 거룩한 산 제물 (롬 12:1)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너희 몸을 ... 산 제물로 드리라"

이 본문에서 개역성경의 '산 제사"는 잘못된 번역으로서, 이번의 개역 개정판에서 "제물"로 바르게 고쳐졌다. 이 낱말의 원어인 thusion 은 경우에 따라서는 "제사"가 될 수도 있으나, 이 본문에서는"제물"인 것이 확실하다. 제사는 제물을 바치는 것을 포함한 행사를 말하는 것인데, 본문에서는 그러한 행사가 아니고 구약시대에 짐승의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그러한 정신으로) 우리의 몸을 바치라 (헌신하라)는 것이므로 "제물"이 옳은 것이다.

12) 운동장에서 다 달아날지라도 → 운동장에서 다 달릴지라도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이 본문 가운데에서 '달아날지라도"라는 개역의 잘못된 번역은 이번 개정판에서 "달릴지라도"로 개정되었다. "달아난다"라는 말은 도망친다는 말인데, 이는 개역 당시 번역의 주역이었던 선교사들이 우리말을 잘 몰라서 그랬는지, 혹은 한국인 조역자의 불참이나 부주의에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말을 바로 아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웃기는 말이기도 하다.

13)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마 5:17)

개역의 본문은 문법상으로나 의미상으로나 잘못된 것을 개정판에서 바로잡았다. 부정적인 진술 (본문의'...아니하고')을 할 때, 그것에 상응하는 부사는"반드시"가 될 수 없고, '결코"이어야 한다. '일점 일획이라도'에서는 토씨가 잘못 쓰였다.

14) 의의 흉배를 붙이고 →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엡6:14)

에베소서 6장 14절과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의 '흉배'(胸背)는 이번의 개정판에서 '흉갑'으로 바뀌었는데, 이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개역성경 에베소서 6장 14절은 성도들이 갖출 하나님의 전신갑주(완전무장)를 말하는 대목에서 "의 (義)의 흉배 (胸背)"라는 어휘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잘못 쓰인 말이다. 흉배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가슴과 등을 가리키고 그것이 복장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조선왕조시대에 관복 (官服)의 가슴과 등 쪽에 수 놓은 헝겊의 조각으로 붙였던 표장 (標章)을 가리키는 것이지 결코 무장의 하나가 아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적군의 화살을 막기 위해서 가슴에 덧입는 무장으로서 호심경 (護心鏡)이라고 하는 것이다. 순 우리말로는 '가슴막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1967년의 새번역과 1979년의 개역성경 일부수정 및 가로쓰기판에서는 '호심경'으로, 1971년의 공동번역과 1993년의 표준새번역에서는 '가슴막이'로 바른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런데 처음 개역성경 신약 개정판(1995년)에서는 '호심경'으로도, '가슴막이'로도 하지 아니하고 '흉갑'이라고 했는데,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 말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알 수가 없다. 본래 성서공회의 개정안은 '호심경'으로서 '가슴막이'(영어로는 breastplate)라는 쉬운 말을 쓰지 아니하고 '호심경'을 쓴 것은 개역성경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서인데(이 말은 물론 국어사전에 있다), 개역성경 감수위원회에서 1995년 신약만을 개정판으로 내었을 때는 위의 두 가지 중 하나도 쓰지 아니하고 국어사전에도 없는, 따라서 아무도 알 수 없는 '흉갑'이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서?) 썼다가 1998년 개정판 성경전서를 내었을 때 개정안 그대로 받아들여 '호심경'으로 바꾸었다.

15) 너희의 유전으로 → 너희의 전통으로 (마 15:3)

'유전 (遺傳)"이란 선조의 성질과 체질 등이 그 자손들에게 전하여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서, 원어의 paradidosis (영어의 tradition)에 맞는 번역이 아니다. 같은 한자를 쓰는 중국어역 성경은"傳統"으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

16)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 아무도 타보지 않은 (막 11:2)

우리말의'아무"는 대명사의 부정형 (不定形)으로서, 그것이 사물이나 처소를 나타낼 때는 불완전명사와라도 결합해야 하지만 (예, 아무 것, 아무 데 등), 그것이 인칭대명사로 쓰일 때는 "사람"이란 말을 더하지 않아도 되는데, 개역의 어색한 표현을 이번의 개정판에서는 우리말의 바른 표현법으로 바로잡았다.

17)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요 19:2)

개역에서는'면류관"이란 말을 처음부터 잘못 썼다."면류"(冕旒)는 옛날 왕의 정장에 갖추어 쓰는 구슬꿰미를 말하고 그 구슬꿰미가 달린 관을"면류관'이라고 하는데, '면류관' 을 단순히"왕관"으로만 생각하여 어휘를 잘못 쓴 것이다. 가시로 구슬꿰미를 만들 수는 없으므로 개정판에서는"관'이라고만 하였다.

18) 나를 해할 권세가 ... → 나를 해할 권한이... (요 19:11)

엄밀하게 말해서'권세"와 "권한"은 다르며, 본문에 해당되는 것은 "권세"가 아니고 "권한"이다. 권세는 통치권자 등이 권력을 행사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데 대해서, 권한은 그러한 권력 행사의 한계를 나타낸다. 개역에서 "권세"로 잘못 쓴 곳은 이 외에도 여럿 있는데, 마 7:29의 "권세"는 "권위"로 해야 할 것을 "권세"로 잘못 쓴 것이다.

19) 그 다른 제자가 ... 더 빨리 달아나서 → ... 더 빨리 달려가서 (요 20:4)

본문에서 그 다른 제자가 한 행동은 달아난 (도망친) 행동이 아니라, 달려간 행동인데, 개역에서는'달아나서"라고 잘못된 것을 개정판에서"달려가서"로 바로잡았다. 2절에서는"달려가서"로 바로 되어 있다.

20) 베뢰아 사람은 ... 더 신사적이어서 → ... 더 너그러워서 (행 17:11)

개역의 "신사적이어서"는 원어 eugenesteroi 에 맞는 말이 아니어서 개정판에서는 "너그러워서"로 바꾸었다. 이 말은 어떠한 생활태도 (영국인을 신사라고 하는 것처럼)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자세, 즉 여기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관대함, 너그러움 (nobleminded, high-minded)을 나타내는 것이다. 영어성경 NRSV에서는 receptive (관용적) 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원어에 충실하게, 그리고 개정판에서 이렇게 바뀌어진 이유까지 설명하면서 바른 설교를 해야 한다.

21) 예수를 빙자하여 → 예수를 의지하여 (행 19:13)

원문의 문맥상 뜻에 맞지 않은 개역성경의 번역을 바른 표현으로 바꾸었다. 원문상으로는 '의지하여'에 해당되는 어휘가 따로 없고, ton 이라는 대격 관사로 그 뜻을 나타내고 있다.

22)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행 19:21)

원어 etheto 의 뜻에 맞지 않은 개역성경의 번역을 바른 번역으로 바꾸었다.

23) 알렉산더가 ...발명하려 하나 → 알렉산더가 ... 변명하려 하나 (행 19:33)

현재말로'발명"(發明)이란, 첫째, 전에 없던 물건 또는 무슨 방법을 새로 만들어 내거나 연구하여 냄을 뜻하는데(둘째 뜻으로는"변명"과 유사하게 쓰이기도 함), 여기서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쓰는"변명"의 경우이므로, 개정판에서 그렇게 바로잡았다18.

24) 안식 후 첫날에 → 그 주간의 첫날에 (행 20:7)

원어 te mia ton sabbaton 의 바른 뜻대로 개역의 잘못을 개정판에서 바로잡았다. 여기서는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으나, 마 28:1, 막 16:2, 눅 24:1, 요 20:1 등에서는 본문에서는 개역 그대로 두고, 그 바른 번역은 난하의 주(註)로 기록하고 있다. 단 행 20:7에서는 예외적으로 본문에 바로 번역되어 있는데, 감수위원회에서 누락한 탓인 듯하나 오히려 그것이 바로 된 것이다. 영어로는 on the one(first) day of the week 로서, 여기의 헬라어 sabbaton 은 '안식일'이란 뜻이 아니고, '주간'이란 뜻이다.

25)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롬 1:14)

원어가 분명히 사람을 가리키므로 '야만"이 아닌 "야만인"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앞의 "헬라인"과도 상응한다.

26) 하나님의 판단이 → 하나님의 심판이 (롬 2:2)

개역의'판단"은 원어 krima (judgement) 에 대한 잘못된 번역이요, 또한 문맥으로도 맞지 않은 것이다.

27)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롬 3:12)

오늘날의 말로 '한 가지로"는 한 종류라는 말이므로 본문에서 맞는 말이 못 된다. 원어 hama 는 영어로는 together 로 번역된다.

28)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롬 4:25)

개역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문장상으로는, 마치 우리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기 위한 목적인 것처럼 오해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래서 개정판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의 원인이 우리의 범죄함에 있다는 분명한 표현으로 바꾸었다.

29)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
나셨으매 (롬 6:9)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언급이므로 '사셨으매"는 정확한 번역이 못 되고, "살아나셨으매"가 바른 번역이다. 13절의 경우도 같다. 예수님의 부활은 "살아나다"라고 해야 하는데, 이것을 "다시 살다"등으로 잘못 번역한 곳은 다른 본문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30)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롬 7:2)

본문의'벗어남"에 대해서는 어떤 과거의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를 언급하는 것이므로"벗어나느니라"가 문법상 옳다.

31)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

본문의 Abba 는 아람어로서 어린이가 다정하게 아버지를 부르는 표현인데, 그것을 우리말로 나타내면'아빠"이지"아바"가 아니다.

32)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 누가 자기의 약혼녀에 대한 행동이 (고전7:36)

개역에서'딸에"라는 낱말을 작은 글자로 표기한 것은 원어에는 없다는 것을 나타내거니와, 근래의 성경학자들의 연구의 결과로는 그 주체가 딸이 아니라 약혼녀라고 해석되어 많은 성경이 그렇게 번역되므로 이번 개정판에서도 그 해석과 번역을 따랐다.

33)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5)

원문에, 개역의'오히려"에 해당되는 말이 없으므로 개정판에서는 그것을 삭제했다.

34)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 ...재물을 사용하고 (고후 12:15)

개역의'허비"와 개정판의"사용"은 거의 반대적인 개념인데, 원어의 뜻은 물론"허비'가 아니고"사용"이다. 영어로는 waste 가 아니고 spend 이다.

35)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엡 3:10)

개역의 '정사'(政事)는 잘못된 번역이다. 원어 archais (영어 rulers)는 분명히 "통치자들"이다.

36)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 → ...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 (히 9:2)

개역 본문의 '등대'의 원어 luchnia 는 결코 바닷가에 있는 등대가 아니고, 장막 안에 있는 '등잔대'를 말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말은 우리말 성경 번역자가 중국어 성경의 한자어 '燈臺'(등대)를 그대로 옮겼기 때문에 생긴 착오이다. 중국어로서는 지금도 이 말이 쓰이지만(중국어에서 우리말의 등대는 '燈塔'이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전연 다른 말이 되므로 개정판에서는 '등잔대'로 바로잡은 것이다 (같은 한자를 쓰는 일어 성경에서는 "촛대"라고 쓰나 이것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아직 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러한 용어 하나까지도 정확하게 써서 교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등대라는 말은 출 25:31-35, 레 24:4, 민 3:31 등 여러 곳에서 더 많이 쓰였고, 그 모든 것도 다 잘못 쓰인 것이나, 구약은 아직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37)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히 9:26)

설명은 롬12:1 참조.

38)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7)

한자로'권고'(勸告)가 아닌 "권고'(眷顧)라는 낱말은 어려운 한자어이며, 전자로 오해되기가 쉽다. 그래서 개정판에서는 쉬운 우리말로 "돌보심"이라고 바꾸었다. 시8:4의 '권고'도 같은 경우이며, 또한 '보살피다'로도 바뀌었다. 총 21 곳이나 바뀌었다.

39)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개역의 하나님의'신'(神)은 원어의 뜻에 맞지 않으며, 바른 번역은"영'(靈)이다. 영어역에서는 spirit (소문자 s로)를 쓰거나, wind (NRSV)를 쓰고 있다. 히브리어 '루아흐' (ruach) 는 영도 되고 바람도 된다.

40)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2)

개역의'복의 근원'은 원어에 대한 정확한 번역이 아니므로, 정확하게"복"으로 바꾸었다. 영어역에서도 You will be a blessing 으로 되어 있다.

41)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 ...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창 16:12)

개역의 잘못된 번역은 중국어역에 유래된 것이며, 그것을 원어의 뜻대로 바로잡았다. 영어역에서는 live at odds with, 일어역에서는'적대'(敵對)라고 되어 있다.

42)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 ...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창 19:32)

개역의 "인종을 전하자"는 아주 졸역 (拙譯)이므로 개정판에서 정확한 번역을 하였다.
영어로는 preserve offspring, 중국어역으로는 '存留後裔', 일어역으로는"자손을 남기자" 등으로 되어 있다.

43)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창 36:1)

개역의'대략'(大略)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영어역의 descendants 나 중국어역의 "後代"도 개역과는 전혀 무관하고 개정판과는 근사한 번역이다.

44)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유질 몰약 오백 세겔 ...→ ... 액체 몰약 오백...(출30:23)

우리말 국한문 성경 출 30:23의 유질(流質)은 중국어 성경에서 그대로 옮겨진 중국어로서, 우리말 '액체'의 잘못된 표기이다. 우리말에서 유질이라 함은 법률용어로서, "전당을 잡힌 물건이 기한이 넘어서 찾을 수 없게 되는 것"(국어사전)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 한글판에서는 '액체'로 되어 있다.,

45) 혹시(或時) 부재중에... → 혹시(或是) 부재중에...(국한문성경) (레5:3 외 여러 곳)

'或時' 라는 말은 '어떤 때에'라는 뜻이고, '或是'는 '만일에'라는 뜻이므로 본문에서는 '或是'를 쓰는 것이 옳은 것이다. 영역으로는 다 ' if '로, 일본어로는 'もし' 로 되어 있으며, 중국어 구역은 '或是'로, 현대역은 '如果'('만일'의 뜻)로 번역하고 있다. 이 '혹시'에 대한 오용은 성서 전체에 수다하다.

46) 그 다소를 물론(勿論)하고 ... → 그 다소를 막론(莫論)하고 ... (민 26:56 등)

'물론' '막론' '무론'(毋論/無論) 등의 어휘는 개념상으로는 매우 유사하나 품사상의 기능이 다름을 따라 문맥상의 의미도 다르게 쓰인다. 이 어휘가 명사나 부사('물론'의 경우)로 쓰이나 동사로는 '막론'만이 쓰이는 것이 독특하다. 본문에서는 '막론' 즉 "말하지 말라"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47) 네 여종에게도 일례(一例)로 할지니라 → 네 여종에게도 그같이 할지니라 (신15:17)

본문의 '일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pen' 으로서 '그같이'란 뜻이다. 다른 번역을 보면 영어로는 'likewise' 'in the same way' 등으로, 중국어로는 '這樣' '同樣的方法,' 일어로는 '是(かく)のことぐ' 이다. 그러나 우리말의 '일례'는 위의 번역들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48)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창30:32 등)

형식명사(불완전명사) '자'(者)는 유정물(有情物) 중에서도 특히 사람에게만 쓰이고 동물에게는 '것'으로 쓰는 것이 더 합당하다. 중국어 역으로는 '的'을 썼는데 그것은 우리말의 '것'과 가까운 것이다.

49)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 하에서 함께 하리라 →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 로 함께 받으리라 (창48:6)

개역의 '산업'(産業)은 중국어역과 일치하나 원어와는 맞지 않다. 영어로는 inheritance 로서 개정판과 일치한다.

50)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니 계신 가... (출17:7)

동사 '계시다'의 부정은 '아니 계시다'이지 단순한 지정사(指定詞)인 '아니다'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이다'가 체언에 붙는 어미이지 동사에 붙는 어미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제 이하에서는 지면 관계로 설명을 생략한다.

51) 연년이 기한에 이르러 ... → 해마다 절기가 되면 ... (출 13:10)

52)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 →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출 23:19)

53)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지니라 →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 (출8:30)

54) 속건제나 속죄제는 일례(一例)니 → 속죄제와 속건제는 규례가 같으니 (레 7:7)

55) 내 성소를 공경하라 →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레 19:30)

56)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 그 오십년 째 해는 너희의 ... (레 25:11)

57)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되 →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되 (민 6:14)

58) 십 세겔 중 금 숟가락 하나라 → 열 세겔 무게의 금 그릇 하나라 (민 7:32)

59) 등대의 제도는 이러하니 → 등잔대의 제작법은 이러하니 (레 8:4)

60)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신 13:16)

61)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 흠이 있고 비뚤어진 세대로다 (신 32:5)

62)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 ... 행한 것과 같았더라 (수 10:28)

63) ...니이까 혹시 ...니이까 혹시→ ...니이까 혹은 ...니이까 혹은 (삼하 24:13)

64) 소문을 듣고 오히려 애굽에 있는 중 → ...여전히 애굽에 ... (왕상 12:2)

65) 등대(燈臺) 열을 만들어 외소(外所) 안에 두었으니 → 등잔대(燈盞臺) 열 개를 만들어 내전(內殿) 안에 두었으니 (대하4:7)

66) 그 경영을 저희(沮戱)하였으며 → 그 계획을 막았으며 (스 4:5)

67) 소금은 정수(定數) 없이 하라 - ... 정량(定量) 없이 하라 (스 7:22)

68) 수산 대소인민을 위하여 → 수산에 있는 귀천간의 백성을 ... (에 1:5)

69) 사실(査實)하여 실정(實情)을 ... → 조사하여 실증을 ... (에 2:23)

70) 범죄하여 시비를 바꾸었으나 → ... 옳은 것을 그르쳤으나 (욥 33:27)

71)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시 30:7)

72)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 → 죄를 짓고 다니는 자 (시 68:21)

73) 행악자의 득의(得意)함을 인하여 →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잠 24:19)

74)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아 1:4)

75) 원두밭의 상직막(上直幕) 같이 →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사 1:8)

76)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 →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 (사 3:9)

77) 처녀 내 백성의 멸망할 때에 →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애 4:10)

78) 팔을 벗어 메고 예언하라 → 팔을 걷어 올리고 예언하라 (겔 4:7)

79) 너희는 눈을 드는 바 가증한 것을 → ...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겔 20:7)

80)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단 2:21)

81) 설혹 맺힐지라도 이방사람이 →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사람이 (호 8:7)

82)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욜 1:4)

83)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 약혼한 남자로 말미암아 (욜 1:8)

84)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암 4:6)

85) 열국(列國)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 자들 →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 (암 6:1)

86) 일어나서 그로 더불어 싸우자 → 일어나서 그와 싸우자 (옵 1:1)

87)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욘 1:2)

88) 대인(大人)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發)하며 →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 하며 (미 7:3)

89) 나의 신(神)이 오히려 너희 중에 →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학 2:5)

90) 내가 너희의 종자(種子)를 견책할 것이요 →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말 2:3)

91)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마5:28)

92)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흙이 얕은 돌밭에... (마13:5)

93)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마15:4)

94) 내 이름을 위하여 미움을 받으리라 → 내 이름 때문에 ... (마24:9)

95)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25:24)

96)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 ...그를 믿는 자마다 (요3:16)

97)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 낮이 열 두 시간이 아니냐 (요11:9)

98)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 ...다시 살아나리라 (요11:23)

99)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고후6:7)

10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 궤를 짜되 (출25:10 등)


<참고>
개역 성경 중의 중국어와 일어 어휘

개역성경 중에는 중국어와 일본어의 어휘 및 표현이 더러 보이는데, 그것은 개역을 할 때 선교사들이 주역을 담당했으나, 한국인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들이 중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의 어휘나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그 두어 가지 예를 들어본다.

1. 중국어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1) 출 30:23의 '유질'(流質)은 '액체'를 의미하는 중국어가 그대로 옮겨진 것인데 대해서는 앞에서 논하였다. 우리말 국한문성경에서는 '流質'로 되어 있고, 한글판에서는 '액체'로 되어 있어 어휘의 통일성도 결하고 있다.

2) 개역성경의 '독생자'(獨生子) 란 말은 주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로서 '외아들'이란 뜻으로 쓰였는데, 이 말은 본래 우리말이 아니라, 중국어 성경에서 그대로 딴 것이다. 우리말에서 '한 아들'을 나타내는 데는, 고유어로서는 '외아들'이 있고, 한자어로는 '독자'(獨子)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독생자'가 우리말 성경에 쓰여 기독교 용어로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그 후 우리말 사전에도 수록되어 우리말이 되었으므로, 이 말을 개정판에서 제외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이 말은 우리말이 아니므로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영어성경에서도 오랫동안 'the only begotten Son' 으로 써오다가(1611년 KJV부터 1882년 개정판까지) 그 잘못된 것을 알고 그 후 쓰지 않게 되었다. 중국어 성경도 현대어 번역에서는 '獨子'를 쓰고 있다.

2. 일어의 어법대로 쓰인 예

1) 민 25:7의 "회중의 가운데서"란 말은 전연 우리말의 용법이 아니고, 일본어 어법이다. 일본어 "會衆の中で"(회중의 가운데서)를 우리말로 옮기면 그저 "회중 가운데서"이지, "회중의 가운데서"라는 표현은 아주 어색하다.

2) 출 32: 17과 행 23:9에 나타나는 '훤화'(喧譁)라는 어휘는 우리말 성경에서는 '떠든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나, 이 어려운 한자어는 중국어 성경에서 따온 말이 아니고, 중국의 고전인 사기 숙손통전 (史記 叔孫通傳)이 그 출처인 듯하다. 그러나 한편 이 말은 일본어로서는 '싸움' (겡까)을 뜻하는데, 싸움으로 떠들썩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일어에서 '시끄럽다' (야까마시이)는 말의 한자가 '喧'이기 때문이다.

소제목의 문제

이번 개정판에서는 독자들이 내용을 편리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개역 한글판에서는 없는 소제목을 달았다. 그런데, 그 소제목 중 몇은 외국어 성경에서나 이전의 우리말 성경(공동번역, 표준새번역)에서 붙인 것과 다르다. 그것은 그 소제목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대로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아니하고, 그 실질적인 내용에 일치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1)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 (마 13:1-23)

본래의 개역성경에는 소제목이 없으나, 1995년 개정판 신약성경에서 소제목을 붙였다 (이미1967년의 새번역, 1971년의 공동번역, 1993년의 표준새번역에서는 소제목을 붙여 왔다). 그런데, 이들 소제목 가운데에서 그 본문의 내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마13:1-23의 내용을 보면 결코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네 가지 다른 땅에 떨어진 씨가 어떻게 자라는가에 관한 것이다.

2) 잃은 양의 비유 →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 비유 (눅 15:4-7)

본문의 내용을 보면, 결코 잃은 양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잃은 양을 찾은 목자가 기뻐하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친구들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아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결론으로, 그와 같이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는)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3) 되찾은 드라크마의 비유 →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은 여인 비유 (눅 15:8-10)

이 본문에서도 그 내용으로 보아 드라크마의 비유가 아니라 드라크마를 되찾은 여인 비유이다. 그 여인은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할 것이라고 하였다.

4) 되찾은 아들의 비유 →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 (눅 15:11-32)

이 본문은 흔히'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세히 보면 그 이야기의 초점이 결코 회개하고 돌아오는 탕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되찾아 기뻐하는, 사랑 많은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물론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비유하는 것이다.

이상의 4 가지 소제목을 우리말 성경 개정판에서 그 본문의 내용과 일치시켜 바로잡은 것은 참으로 전 세계를 두고도 획기적인 것이라 할만 하다. 예를 들어 영어 번역 중 최근 또 최우수 번역이라고 하는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1989년, 번역위원장 Bruce M. Metzger) 에서도 보면 마태 13장의 소제목은 'The Parable of the Sower'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누가 15장의 3 가지 비유도 'The Parable of the Lost Sheep' (잃은 양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Lost Coin' (잃은 동전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Prodigal and His Brother' (탕자와 그의 형의 비유) 등으로 되어 있어 그 본문이 가르치고자 하는 주제나 주역(마13의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눅13의 목자, 여인, 아버지)을 나타내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나채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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