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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학자료 > 등록일 2007-06-25
작성자 관리자 (admin)
언더우드 청소년기 13년의 훈련이 31년 선교전략에 미친 영향
김영호 목사
1913년 주일학교 대회에서 설교하는 언더우드


1. 들어가는 말
김영호 목사(한국교회 UN선교센터 본부장, 뉴욕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금년 2007년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 개신교 목회선교사로서 처음 입국(1885년)하여 한국교회 설립의 기초를 놓은 지 122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특히 한국교회가 급성장하는데 큰 불길을 일으킨 1907년 대 부흥 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면서 선교사를 받기만 하던 교회에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산동반도와 제주도와 일본에 한국인 선교사를 해외로 보내기 시작한 100년이 되는 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이기도 하다.
2006년 말 한국선교연구원의 자료를 보면 이제 한국교회는 173개국에 16,616여명의 개신교 선교사를 국외에 파송함으로써 해외에서 사역하는 선교사(overseas missionaries)의 개념으로서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2의 선교 대국이 되었다. 선교사 숫자의 현재 연간 증가율 17.7%는 해마다 한국에서 1000명 이상의 새로운 선교사들이 파송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이 사실은 한국교회가 서구교회의 선교 약화에 따른 전 세계 선교 인력의 공백을 메우는 가장 두드러진 대체 세력임을 말해 준다.

선교사의 수적인 면 못지않게 질적인 면에서의 한국 해외선교의 문제점도 다루어 보아야 하는데
첫째 한 지역에서 8년 이상 선교 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의 비율이 20% 미만이고 지역을 옮긴 것을 포함해서 8년 이상 선교 경험을 가진 비율이 전체 28%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선교사로서의 훈련기간이 서구교회 선교사와 비교할 때 단기선교 교육을 받은 경우가 많아 복음을 피선교지의 비 기독교인들에게 깊이 있게 전달할 수 있는 신학적 훈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대부분의 교회나 후원단체들이 선교사들의 여행비나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는 반면 피선교지역 복음화 전략으로 필요한 다양한 프로젝트에 대한 장기적인 지원이 미비하여 자연 선교의 결실이 크지 못하다는 것이다.
넷째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사역하는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다른 선교단체들과 여러 면에서 협력선교를 이루어내야 하는데 교파별 경쟁에서 개별적 선교 노력에 머물다 보면 인적, 물질적 지원이 이루어지지 못해 선교의 효과가 약화되고 만다는 것이다.
한국 선교회들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교지에서 지나친 경쟁심을 버리고 비전과 목적의식에 따라 보다 과감하게 연대하면서 시너지를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언더우드 선교사가 122년 전인 1885년에 입국하여 191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31년간의 선교활동을 하면서

첫째, 5년이나 8년의 단기간이 아닌 그의 평생인 31년간을 한 지역에서 선교 하였고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 손자대의 3대에 걸쳐 선교가문으로 지금까지 선교를 하고 있고

둘째, 교회설립에만 그치지 않고 백년대계인 교육선교를 위해 연희전문학교를 세우고 연세대학교로 발전하는 장기적 project를 세웠으며

셋째, 단기선교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외할아버지 와우박사의 선교활동과 부모님들의 신앙생활 지도와 교회와 대학 신학교의 장기적인 신앙 훈련을 받았으며

넷째 청소년 시기에는 다양한 교파들과 협력하고 체험적 선교훈련을 통하여 선교 현지에서 선교사로 입국할 때부터 많은 선교전략과 사업을 연학해서 이루어낸 모범적인 선교사였음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청소년 시기의 13년간 가정, 부모, 교회, 학교에서 받은 신앙훈련기간의 훈련이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31년간 선교활동을 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분석 평가함으로써 자녀의 신앙훈련의 중심에 있는 가정, 부모,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 내어야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잘 수행해 내는 한국인 선교사를 배출할 수 있는가를 언더우드의 삶과 선교 업적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2. 기독교 가문의 영향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손만대에 거쳐 하나님의 축복과 사명을 받은 것과 같이 언더우드가 본받을 만한 선교사로 쓰이게끔 예정된 하나님의 섭리는 언더우드의 출생 이전부터 있은 믿음가문의 후손에게 내린 하나님의 축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언더우드의 외할아버지인 알렉산더 와우 박사(Dr. Alexander Waugh)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에서 널리 알려진 능력 있는 설교가였을 뿐 아니라 해외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활약을 하였던 분이었다. 그는 28년간 런던선교회 심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기독교 전도 문서회에서도 크게 활동하였다. 1794년 초교파적인 기독교 정기간행물을 발간하면서 선교를 위한 호소문을 실었으며, 1795년엔 20명의 후원자들이 모임을 갖고 이 선교회의 기본강령을 만들었다.
“ 이 위대한 선교 사업을 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는 각 교파에 속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연합이다. 분열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요인을 가능한 미리 제거하기 위해 본 선교회의 계획은 장로교, 회중교회, 성공회 등 그들의 교회 체계나 행정을 피선교지에 심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 되신 하나님의 영광된 복음을 전파하려는 것이다.”

유전이론에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면 와우박사의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열정과 선교강령 내용이 외손자 언더우드에게 선교의 유전인자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전해졌다고 볼 수 있고, 언더우드가 축복 받은 가문의 믿음과 선교사역을 잘 물려받은 것이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부름을 받게 된 유전적 동기라 볼 수 있다. 불과 4살 되었을 때 인도에서 한 선교사의 선교보고와 설교를 듣고 그 어린 마음에 ‘나도 장차 선교사가 되어 인도에 가야지’하고 결심하게 되었고,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인도선교사로 가기를 바라는 소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더우드와 결혼하여 의료선교사로 동역한 부인 릴리아스 홀톤 여사는 언더우드가 외할아버지 와우박사 성격이나 은사 그리고 선교전략이나 마음가짐을 놀랄만치 많이 닮았다고 아래와 같이 보았다.

1) 문서사역의 영향 : 외조부 와우박사가 기독교 정기간행물을 발간하여 선교를 위한 활동을 하였듯이 언더우드는 다양한 문서사역 활동으로 한국 선교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① 한국어 교본, 사전 편찬 : 언더우드는 한국에 처음 오는 선교사들을 위해 한국어 교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한국어 회화 입문을 1889년 출판하였고, 5년간의 각고 끝에 1890년 한글사전을 첫 부분은 한영, 둘째 부분은 영한사전으로 출판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② 성경 번역과 전도문서 번역
한국에 도착한 지 일 년 남짓 되는 1887년에 언더우드는 감리교 첫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복음의 임시 번역본을 출판하였는데 번역 주안점은 무식한 자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도록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식자층의 마음에 들도록 깔끔하고 순수한 것을 추구하여 여러 층의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번역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언더우드는 한국 도착 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31년간 심혈을 기울여 성서번역에 몰두하였는데 사람의 수중에 있는 성경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전도문서도 번역 출판하여 문서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③ 찬양가 출판
언더우드는 1893년도에 찬양가를 출판하였는데 미국인들이 부르는 찬송가 30곡, 한국인이 가사를 지은 것도 7곡 등 총 116장의 찬송가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4성부 악보로 출판하여 한국교회에서 처음부터 4성부 찬송이 불려지게 하였다.
④ 그리스도 신문발간
언더우드는 1897년 4월에 ?그리스도 신문?(The Christian News)를 발간하였는데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선교회의 목적을 보여 주는데 있었다. 관심거리로 도움을 주는 외국 소식, 농업경작, 개선된 비료 주는 방식, 상업에 대한 소식과 기사를 실어 이 신문 독자의 1/4은 신자가 아닌 일반인들로써 전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이할만한 것은 조선 정부도 계몽지로 활용케 하였는데 한 부의 신문을 약 50명이 돌아가면서 읽었다고 하고, 신문 2부는 궁궐로 보내졌는데 고종왕이 이 신문에 대해 정중한 찬사를 보내 주며 편집자의 노고도 칭찬해 주었다고 한다.
2) 연합선교 사업
외조부가 강조한 선교강령 중 “복음을 심기 위해 선교의 기본 방향은 교파를 초월해야 하고 선교의 목적과 효과를 위해 연합 사업을 하여야 한다”고 하는 강한 메세지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강령이었고 그의 모든 선교사업의 철학이 되어 그대로 실천이 된 에큐메니칼 선교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3. 부모 형제의 신앙생활과 협력

1)신앙 깊은 아버지의 영향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버지인 죤은 제조학자로서 또 과학자인 동시에 지적 재능을 지닌 발명가였는데 그 분의 열렬한 신앙. 신실한 자세 특히 항상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태도가 청소년기의 언더우드의 신앙생활을 바로 인도해 주었고 언더우드의 일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바쁜 시간 중에도 선교학교를 마친 다음에는 주일 오후 대부분을 자녀들과 함께 보냈는데 이 시간은 언더우드에게 항상 즐겁고 의미 있는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주일은 지루하고 짜증나는 날이 아니라 교회에 가는 것을 재미있고 편안하고 중요한 일로 여기게끔 해 주었고, 자녀들이 집에 돌아오면 설교에 대해서 얘기하고 설교 내용과 본문에서 무엇인가 얻고 기억하도록 도와주었다. 자녀들이 성경을 외울 수 있도록 격려해서 언더우드는 히브리서 전체나 성경의 많은 부분을 외울 수 있었고 이러한 신앙훈련이 언더우드의 선교사역 중 성경번역에 심혈을 기울이는 영향을 주었다.
그는 자녀들이 자신과 같은 열정과 믿음과 헌신으로 하나님 사업을 행하도록 교육하고 양육하는데 온 정성을 쏟았다. 이러한 살아 있는 가훈은 그와 그의 자녀들이 가장 좋아하는 표어에 잘 나타난다. “불가능을 일소에 부치고, 무엇이든지 반드시 할 수 있다고 말하라” 이 귀한 표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행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를 요약한 것이었다.

특히 언더우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아버지의 갈망과 기다림을 완전히 물려받고 있었다. 이런 신앙을 이어 받은 언더우드는 자신의 시대에 영광된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주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을 강조하여 나라를 잃고 일제의 압제에 피눈물을 흘리는 백성들과 지도자들에게 소망을 갖게 하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애국충군의 종교로 기독교를 성육시키게 하였으며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께서 일본을 벌할 것이므로 반일 순국의 교회로 기독교를 인도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요한복음 14:2을 본문으로 한 “후 셰상”이란 설교에서 뚜렷한 내세관을 설교할때도 자기 가정의 생생한 경험을 산 예로 연결하여 알아듣기 쉽게 하였다.

“예수강생 일천팔백칠십년에 우리 두 아해가 불란셔 학교에 다닐 때에 영국에셔 우리 부친의 편지가 왓는데 집에서 미국으로 이사하랴 한다 하였고 또 조곰 후에는 한 편지가 발셔 미국에 가셔 우리를 위하여 집을 예비하랴 한다 하는 말이 와셔 그때부터 우리들이 대서양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 볼 마음과 미국이 엇더한 나라이며 엇더한 인죵이 사는 것과 풍쇽 습관과 그 엇뎌한 거슬 알고져 하는 마음이 간절하엿도다. 이와갓치 우리들이 세상에 잇는 거시 회국학교에 잇는 것과 갓흔대 셩신으로 소문이 오기를 먼 하늘 됴흔 나라에 우리 형님께서 압서 가서셔 우리를 위하여 집을 예비한다 하셨으니”

이와 같이 가정생활의 변화와 체험을 예로 들어 어려운 내세관을 가진 한국의 여러 층의 백성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설교를 하여 감동을 더하게 하였다.

2)형제의 헌신적 협력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친형 존 언더우드는 혈육의 형제로서만 아니라 한국선교사의 동역자이자 물질적인 후원자로서 언더우드가 가장 어려운 일로 길이 막히고 해결이 되지 못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마다 “주님의 지상명령인 선교 사업을 위한 일이라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마”고 기도해 주고 구체적으로 물질적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청소년 시기에 한 집에서 같은 교회에서 함께 성경을 외우고 함께 늘 기도하고 함께 예배드린 혈육의 형제가 믿음과 선교의 동반자로서 언더우드의 다양한 선교 사업이 성취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① 찬양가 출판 도움
언더우드가 1893년 ‘찬양가’를 출판하려 했을 때 선교협의회에서 동료 선교사들이 여러 가지 사소한 이유들로 반대하여 난처해졌을 때 이 소식을 들은 형 죤이 도움을 주어 4성부 찬송가가 출판되어 1908년 공식 찬송가가 나올 때까지 15년 동안 교회 안에서 폭넓게 사용되어 예배와 전도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② 남장로회 선교사 파송 후원금
언더우드가 한국선교사업의 확장을 위하여 1891년 9월 초 시카고에 있는 멕코믹 신학교 채플에서 같은 해 10월 미국 전국신학생 해외선교연구회 주관부로 내쉬빌에서 있은 선교대회에서 한국선교 보고와 추수할 일꾼이 필요하다고 열변으로 호소하자 테이트, 존슨과 레이놀즈등 7명의 남장로교회 소속 신학생들이 중국이나 다른 나라로 선교계획 대신 조선선교를 결심하고 해외선교부를 찾았으나 선교후원금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거절당한 상황에서 언더우드 형 죤 장로는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의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이 소식을 듣고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 2천불(당시 선교사의 일년 사례비가 약 500불)을 내놓음으로 언더우드 선교사가 각 교회 순방 강연비 5백불과 남장로교의 5백불 총 3천불로 7명의 선교사가 호남지역 선교사로 일하게 도왔던 것이다. 2006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전체 인구의 17%가 개신교 교인이고 대구시는 8% 합천은 4%이나 익산과 군산지역이 35%가 넘는 선교의 결실을 맺은 것은 언더우드 형제의 북장로교 소속을 넘어선 초교파적 선교헌금이 밑거름이 되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③ 연희전문학교 설립 후원 : 언더우드가 1915년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려고 했을 때 평양에 있는 선교사 대부분이 작은 나라에 두 개의 학교가 필요없다고 주장하여 난관에 부딪혔을 때도 죤 언더우드 장로는 “동생,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한다. 대학을 설립해서 인재를 양성해야지, 내가 친구들과 교인들에게 말해서 얼마 정도의 기금을 마련할테니 걱정하지 말고 있어”라고 격려하고 며칠 지나 언더우드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찾아 왔다. “동생, 여기 52,000달러를 모금해 가지고 왔으니 우선 이 기부금으로 필요한데 사용해라”
언더우드는 눈물겹도록 형님 장로님께 감사드리고 태평양을 횡단하는 배 위에서 무릎을 꿇고 감격적인 기도를 수 없이 드리고 한국에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형님과 미국 교우들을 통해 마련해 주신 52,000달러와 그 보다 더 귀한 그들의 선교를 위한 손길에 대하여 간증하며, 미국남장로회 선교부, 미국 남북감리회 선교부, 카나다 장로교 선교부를 찾아 적극 동의를 받아 내고 1915년 3월 5일 경신학당 대학부로 문을 열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현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번지 대지 위에 30만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교파 연합으로 연희전문학교가 언더우드 형 죤 장로님의 헌금으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 바울선교회지 2007.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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