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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해외일반 > 등록일 2007-06-01
작성자 관리자 (admin)
숨겨진 티베트의 역사


어느 민족이나 지역을 이해하는 데 가장 밑거름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역사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좀 더 티베트족과 가까워지기 위해 티베트족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하는 작업은 티베트족의 통사를 쓰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E. H. 카아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그래서 티베트족의 역사 중 현 티베트의 상황 이해에 깊은 연관이 있는 6개의 사건을 선택해서 이야기 식으로 쓰고자 한다.
티베트족뿐만 아니라 중국과 구소련에 복속되어 살아온 많은 소수민족들은 자신의 역사를 오랜 세월 연구하거나 글로 발표하지 못한 채 지배자의 정치논리에 굴절된 그들 민족의 역사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티베트족의 역사에 대해서도 중국 측 사료가 주는 영향이 크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에 어느 것이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의도가 착색된 것인지를 골라내는 눈이 필요하다. 다행히 몇 년 전 티베트인이 쓴 티베트족 통사(「藏族通史, 德??仁?珠」)가 중국어로 출판되었다. 정치지도자들의 인가를 받고 출판되었고 당대 최고 정치지도자들에게도 헌납된 그 책은 의외로 티베트 지역에서 반향이 크자 티베트인들에게 미칠 영향력을 두려워한 정부가 정가 80위안(元)에 팔린 책을 200위안에 구매하여 거두어 가 버렸다. 어렵게 한 권을 구해 읽어 가면서 전에 중국 책에서 보지 못한, 그러나 티베트 교수들에게서 들어왔던 숨겨진 티베트의 역사들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적잖이 흥분했었다. 여기서는 그 책을 중심으로 써 내려갈 것이다.

티베트의 지경(地境)
먼저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티베트란 어느 지역을 말하는 것인가???이다. 티베트인들은 세상에 9개의 산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 중의 왕은??카일라스산??으로 우리에게 알려진??컹 어런뿌채??이다. 해발이 6,714m인 카일라스는 티베트인들에게는 신앙의 상징이어서 특히??말(馬)의 해??에는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온다. 이때 한 바퀴를 돌면 그 공덕이 평소 30바퀴 도는 것과 맞먹는다고 한다. 그 산을 한 바퀴를 돌면 일생의 죄를 씻을 수 있고, 100번을 돌면 금생에 성불한다고 믿는다. 또 이 산 옆에 있는??만살로바호수??로 알려진??마팜윰초??는 티베트의 모든 강과 호수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티베트인들의 삶에는 이렇게 카일라스와 만살로바가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티베트인들은 거주지를 셋으로 구분하는데 위로는 응아리(국왕의 속민), 가운데는 윗쪙(하천이 있는 가운데 지역), 아래는 도캄(암도와 캄의 통칭) 이라고 한다. 응아리는 지금의 아리(阿里)뿐 아니라 서쪽의 캐시미르와 아프가니스탄의 일부분, 북쪽으로는 신장지역과 구소련의 일부분까지 포함하는 광대한 영역을 말한다. 윗쪙은 티베트자치구외에도 지금의 부탄, 시킴, 그리고 네팔의 일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한편 티베트인을 중국에서는‘짱(臧)??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윗쪙의??쪙??에서 온 말이다. 도캄은 지금 알고 있는 대로 현 중국의 칭하이(靑海)성과 깐쑤(甘肅), 쓰촨(四川), 윈난(雲南)의 티베트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세 지역으로 구분한 그 가운데 카일라스산이 있다. 그러므로 중국이 주장하는 현 중국 지도의 행정구획상의 티베트자치구가 티베트의 권역이라는 것은 티베트인들에게 있어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나아가 현 중국의 영토 안에 티베트인의 권역을 제한하는 것도 역사적으로는 틀리다. 이렇게 지금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 의해 구분된 국경선의 영향을 받지 말고 티베트의 권역을 다시 그려 볼 필요가 있다. 아래의 지도는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유목제국사」에서 따온 것이다. (간사님, 여기에 지도를 넣어주세요.)

송첸감포와 투판제국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 이 땅에 등장하였는가? 고고학의 결론은 최소한 1만 년 전에 야롱허(雅隆河)골짜기에 있던 원시부족이 인구가 많아지면서 4개의 씨족으로 나뉘고 각기 부족으로 발전해 갔다. 그 중 소위 문명을 갖고 있던 최초의 티베트왕조로서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샹시옹(象雄)왕조가 있었다. 이 왕조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티베트의 전통종교인 본교의 발생지이기 때문이다. 대략 기원전 1455년으로 보는데 티베트문자가 이들의 문자의 변형이라고 본다. 또한 이때의 의학이나 점성술 등도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B.C. 825년 지금 티베트자치구의 산난나이둥(山南乃?)현에 야롱(雅隆)마을 정권이 세워지는데 이것이 투판(吐蕃,‘투??라는 이름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중국 측 사료에 등장하는 티베트왕조의 이름이다)왕조로 발전해 간다. 티베트인들은 이 정권의 니아쳐짠뿌를 첫 왕으로 하여 45명의 티베트 왕이 존재하였다고 본다. 점차 지역 마을을 점령하며 티베트 지역 통일을 이루어 가던 이 왕조는 31대 남러쏭짠이 본격적으로 주변의 작은 부족국가들을 점령하여 지금의 티베트자치구 지역을 통일하였다. 32대 송첸감포(松贊干布) 때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이 때 강력한 투판(吐蕃)제국을 세운다. 783년에는 당나라와 지금의 깐쑤성 칭쉐이현에서 국경선을 결정하는 맹약을 세웠을 정도로 동서남북으로 그 권역을 넓혀갔었다.
송첸감포는 630년에 13살의 나이로 즉위했으며 300명의 대신을 거느렸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중 현재 티베트어를 만든 쌈보타도 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샹시옹 등의 작은 나라들을 통일시켜 캐쉬미르와 지금 중국의 신장과 부탄, 시킴, 네팔 등까지 흡수하였다. 이 때 비로소 단일민족으로서 공통된 문자와 풍습, 종교문화를 응집력으로 하는 민족 통일을 이루게 된다.
당시 중원의 당과 군사적으로 충돌을 하는데 기원 637년에서 645년 사이에 당 왕조의 주둔군을 격파하여 송주(松州,지금의 쓰촨성 아빠티베트자치주의 쏭판)에 20만의 대군을 주둔시키고 깐쑤와 닝샤(寧夏), 산시(陝西)일대, 그리고 남으로는 쓰촨성 청뚜(成都)평원의 서쪽 부분이 티베트의 통치아래에 들어왔다. 나아가 캐쉬미르와 파미르고원, 네팔에 이르기까지 정복하고 속민으로 삼았다. 혹자는 티베트 지역의 영토가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명의 유래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중국 서북부의 상당한 지역 지명이 티베트어에서 왔는데 지금도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예로 들어서는 설득력이 없으니 지금 누구나 한족 지역으로 알고 있는 역사적 도시 청뚜(成都)를 보려고 한다. 이는 티베트어 쳠도강(사람 만 명이 살만한 곳이라는 뜻)이나 춍디(상업중심지라는 뜻)의 음역이라고 본다.
송첸감포는 중앙집권제를 확대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635년에는 수도를 지금의 라싸(拉薩)로 옮겼다. 전국을 6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지방행정과 군사조직을 일치시킴으로 통치체제를 확립하기도 했다. 또한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우수한 인재를 뽑아 당과 인도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4명의 티베트 왕비 외에 주변국과의 관계를 위해 631년 네팔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한다. 이때 석가모니상 등 여러 불상들이 티베트로 들어오게 된다. 또한 백여 명의 기술자가 함께 와서 고인도 문명이 티베트에 들어와 티베트의 공예미술, 건축과 조각, 의약, 역산, 종교문화 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티베트인들은 이 네팔 공주를 존중하여 따로 궁전을 지어 주고 조캉사원(大昭寺)를 세워 공주가 가져 온 불상들을 두었다. 또한 당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634년에 당의 공주를 왕비로 줄 것을 요구하는데 당이 반대하자 무력을 동원하고 회유하기도 하여 641년 문성공주(文成公主)를 왕비로 맞이한다. 문성공주는 이 때 석가모니 상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위해 라모체사원(小昭寺)를 세웠다.

역사의 진실 을 찾아서
지금 네팔보다 중국이 강대국이고 티베트를 통치하면서 역사를 중국에 유리한 쪽으로 서술하려는 입장에 있다 보니 중국 측에서 나온 사료들은 네팔의 공주에 대해서는 언급을 잘 하지 않는다. 또한 문성공주와 송첸감포의 결혼을 두 민족의 대화합의 시작으로 보고 이런 역사가 있으니 티베트와 중국인은 전통적으로 한 가족이라며 20세기 중국의 티베트 통치를 정당화하는 정치선전의 일환으로 이 사건을 사용한다. 그래서 지금도 당과 티베트의 국경비가 있는 칭하이성의 르웨산(日月山)에는 최근 세운 문성공주 상이 있다.
김호동 교수는 그의 책 「황하에서 천산까지」에서 문성공주는 당 태종 이세민의 친딸이 아니라고 한다. 당나라 때에는 주변 이민족의 군주에게 공주를 부인으로 보내 우호관계를 맺는 일이 많았는데 이 때 시집가는 공주를 화번공주(和蕃公主) 라고 한다. 이는 오랑캐와 화친하기 위한 가짜 공주라는 것이었다. 또한 문성공주가 당나라에 와서 혼인한 사람은 송첸감포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었으며 그가 643년에 사망하자 공주는 남편을 추모하기 위해 당나라에 불상을 부탁하여 646년 이 불상이 도착하자 라모체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송첸감포는 며느리였던 문성공주를 자기 부인으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이 불상의 위치가 바뀌었다. 송첸감포의 손자 멍쏭멍쨘 때에 당과의 전쟁이 있었는데 혹시 당의 군대가 공격할까봐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조캉으로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한편 티베트도 한때 당나라를 위협하였던 강력한 군사대국으로써의 찬란한 역사를 드러내기 위해서 문성공주의 이야기를 자주한다. 서로 목적은 다르지만 이런 이유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티베트 사람들의 입에서 칭하이성을 비롯한 티베트자치구의 중국인들 입으로 회자되고 있다.
지금의 티베트는 과거와 상당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르네 그루쎄는 670년대 티베트인들이 타림분지에 와서 카라샤르(焉耆), 쿠차(龜玆), 호탄(和田), 카쉬카르(疏勒) 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았다고 한다. 이 지역은 원래 티베트인들의 거주지역인데 영토 관할권이 당에 있다가 티베트가 통일왕국을 세우고 군사력으로 강해지면서 관할권을 빼앗아 왔다고 볼 수 있다.
700년대에는 당과 티베트가 종종 깐쑤와 타림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지금 칭하이성의 수도 시닝(西寧) 근처 석보성(石堡城)요새는 729년 당의 장군 이위가 티베트로부터 탈취했다가 다시 빼앗겼다는 기록이 있다. 서쪽에서는 파미르의 소왕국들을 티베트가 위협하고 있었고 캐쉬미르에서는 중국 조정에 충성하는 동맹세력들이 티베트에 저항하다가 결국은 티베트가 파미르의 종주권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그 때 쿠차(??)에 절도부사로 있던 고선지(高仙芝) 장군(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군)이 747년 파미르고원을 넘어 티베트에 속해 있던 왕을 투옥시켰다고 한다. 750년에도 고선지가 파미르를 넘어 티베트를 그 지역에서 몰아내었다고 기록한다. 역사는 이래서 재미있다. 한국인이 당의 장군이 되어 티베트의 영토 확장을 차단하고 중앙아시아 지역의 당 팽창의 정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티베트왕조의 몰락
이렇듯 송첸감포 이래 오랜 시간 동안 티베트족은 아시아의 상당한 영역에서 통치권을 행사한 강력한 군사강대국이었다. 그런데 이런 강력한 민족이 어떻게 지금은 역사의 중앙무대에서 사라졌는가? 아래에 살펴 볼 종교적 갈등이 티베트왕조의 멸망을 가져 오게 되었다는 것 말고도 강력한 유목제국이었던 티베트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이 있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가 이들에게 들어와 영향을 끼침으로 유목제국의 호전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몽골제국에 대해서도 같은 평가가 있다. 몽골제국은 이동성을 장점으로 하는 유목민이 정착을 하게 된 것도 멸망의 이유로 꼽지만 또한 티베트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후 기마민족만이 가지고 있던 야성이 사라지게 된 것이 몽골제국 멸망의 원인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김호동 교수는 불교로의 개종은 몽골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분수령이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몽골인들이 말에서 내려와 활을 버리고 대신 불경을 손에 들었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 때문에 기마민족 몽골인들이 사나운 성품을 잃어버리고 온순하게 바뀌었을 것이라는 속설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16세기 후반 몽골족의 대대적인 개종이 있은 뒤 17세기부터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서서히 중국에게 충성을 바치는 신하로 변하고 말았다고 평가한다.
티베트 제국의 멸망도 같은 시각으로 볼 때 불교가 티베트족에게 미친 부정적 영향을 젊은이들에게 호소하며 불교의 영향권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선교접촉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송첸감포 때에 이민족 왕비를 통해 불상이 들어오면서 티베트에 불교가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때 발전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 송은 재위기간에 100여 개의 사찰을 지었다. 많은 불경을 번역했고 티베트인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도록 규정지었다. 이때까지 승려는 없었고 승려가 거주하는 사원도 없었다. 그래서 사찰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저 불상만 두었을 뿐이었다.
또한 당시 티베트 사회는 이미 뿌리를 내린 본교라는 전통종교가 있었다. 불교의 영향력은 겨우 왕실 내부에만 있었을 뿐이었다. 국내 대다수의 백성들은 네팔, 인도, 당의 불교를 믿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점점 반항의 양상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송나라 때 티베트 지역에 불교가 들어와 전파되고 발전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문성공주가 불상을 가져옴으로 티베트에 불교가 들어오고 흥왕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도 다분히 감성적인 진술이다.
그렇다면 송은 왜 불교를 들여왔는가? 마치 시돈 사람 이세벨을 아내로 삼아 바알 숭배를 하게 한 아합처럼 이민족 왕비에 의해 불교로 개종하고 끌려간 것인가? 사실은 통치이데올로기가 필요해서였다고 본다. 실제로 송은 나라를 통일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귀족세력의 견제 하에 있었다. 그가 고향을 떠나 라싸로 수도를 옮긴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야롱부족국가의 전통적 귀족들의 텃세를 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들을 제압하고 통치해야 왕권이 강화된다고 생각한 그는 통치이데올로기의 하나로서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귀족들이 본교를 믿고 있는데 전혀 다른 종교로 통치이데올로기를 삼음으로써 귀족들의 세력범위에서 벗어나고 그들을 제압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송첸감포가 죽자 불교는 곧바로 본교의 반격을 받았다는 것에서 이 사실이 증명된다. 본교도들과 귀족집단이 외래종교인 불교가 천재와 인재를 불러 들였다는 구실을 삼아 불교를 반대하자 투판왕실은 처음으로 좌절을 맞는다. 710년 당의 금성공주가 투판으로 시집올 때 승려와 불경이 같이 들어와서 절을 짓게 되면서 다시 기회를 맞지만 잠시 후 다시 본교의 공격으로 좌절을 맞는다.
이렇게 약 200년의 세월 동안 겉으로 드러난 것은 두 종교 간의 갈등이지만 사실은 왕족과 귀족 간의 권력다툼이었던 것이다. 결국은 지난번 호에 소개한 대로 얼렁따르마 라는 왕이 오히려 본교신자여서 귀족들과 한 편이 되어 불교를 훼멸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이 두 권력 간 싸움의 결정판이며 이로 인해 양편 다 세력이 약화되어 결국 티베트 왕조가 무너지게 된다.

지금까지 티베트인과 그들이 세운 왕조가 아시아의 역사무대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보았다. 정리하자면 첫째, 현 중국정부가 티베트의 영토에 대해 문성공주 때부터 관계가 있어서 지금의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이런 주장은 그 역사적 근거를 갖지 못한다. 선교사들도 이 영유권 문제나 티베트 독립 문제에 대해 일정한 시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연말의 마지막 글에서 다시 다루고자 한다.
둘째, 티베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상당한 범위의 영토를 갖고 활동했던 강력한 유목국가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멍구족이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에 아시아의 상당히 넓은 지역을 통치하며 유목제국을 세운 또 하나의 강력한 유목민족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또한 멍구족과 그 뿌리를 같이 하는 유목민의 후예로서 이 시대에 한국 선교사들이 티베트에 복음을 뿌리는 사명이 있음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셋째, 송첸감포 때 불교가 티베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귀족세력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통치이데올로기로 불교가 들어와 송의 시대에는 왕실내부에서만 영향력이 있었고 사회에는 그 영향력이 미미했다는 것이다. 송의 이런 정책에 반발한 귀족들은 계속 본교를 도구로 왕실에 압력을 가했고 민간에서도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종교 갈등, 권력 갈등이 200년간 계속되었다. 그래서 다음 호에는 불교가 티베트에 뿌리를 내리게 된 과정을 살펴보며 지금의 티베트 불교에 대해 좀 더 이해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또한 불교에 대한 연구도 중요하지만 티베트의 본교나 전통 샤머니즘, 밀교에 대한 연구가 이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곧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접촉점을 찾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유은식/ 전 중국 티베트 선교사, 현 산돌성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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