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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학자료 > 등록일 2007-06-01
작성자 관리자 (admin)
중국인의 민족상황과 화교집단


1, 서 론

세계 최대의 인구를 포옹하고 있는 중국은 전통적인 다민족 국가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왕조를 거듭하면서 이민족 지배의 역사를 반복하면서 특유의 다민족사회를 만들어 왔고 1949년 혁명과 더불어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도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 공존체제를 발전시키려 애쓰고 있다. 이렇듯 다민족들 간의 평화로운 공준구도의 발전을 위해서 힘쓰고 있는 중국이기는 하나 그들이 내포하고 있는 민족관계가 대단히 복잡하고 그 내용 또한 대단히 이질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에서 오는 민족갈등은 좀처럼 생각대로 순조로운 발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우선 국내적으로는 많은 소수민족 집단들이 오랫동안 누적시켜온 민족적 이해의 대립구도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大漢族主義에 대한 소수민족 집단들의 뿌리깊은 반발, 도시와 농촌 간의 차이로 표출되고 있는 漢族 거주지역과 소수민족 거주지 간의 경제발전의 현저한 격차, 다양한 사회분야의 인재 충원과정에서의 민족차별의 존재, 개별적인 민족 신앙에 대한 박해 등과 같은 갖가지 민족갈등의 소지가 누적되어 오고 있고, 특히 개혁개방의 와중에서는 이같은 민족적 갈등이 점 점 뚜렷하게 표출되면서 과도기적 정치상황의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도 해외에서 생활하고 있는 中國系들 즉 "화교"들의 문제가 또 다른 중국의 민족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중국인들은 대단히 오래전부터 자기들의 고향이나 고국을 떠나 먼 이역으로 퍰어져 생활해 온 긴 이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외교포를 가진 나라가 중국이다. 해외생활자들의 대부분이 중국에서의 생활고를 해외생활을 통해 극복해 보려고 했고, 더러는 자기들의 자발적인 의사로, 더러는 강제적으로 해외에 이주하여 그곳에서 중국인의 피와 문화를 나름대로 이어가면서 광범한 화교사회를 구축하고 있다.

중국 국내에 살고 있는 중국인, 대만과 홍콩, 마카오 등 인근 중화권에서 살고 있는 중국계, 그리고 이 밖의 세계 각처에서 거주국의 어엿한 국민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화인" 등 전세계에 널리 산제해 있는 중국계 인구는 실로 다양하나 이들 모두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하나같이 "中華系"인구들 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들 중화인들은 탈냉전과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의 전면적인 실시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환경을 맞이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들이 과거에 보였던 현지 정착 우선의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이제는 거주국에서 누리고 있는 경제적 여유를 발판으로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오늘의 중국을 생각하면서 중국의 민족상황, 이 가운데서도 특히 중국의 해외화교들의 문제에 눈을 돌리는 것은 이들이 가지는 현재적인 의미보다는 장기적 안목에서의 이들의 역할 때문이다. 당장은 중국인들이 세계적인 규모에서 위협적인 역할을 구체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해외 중국계들이 그들의 민족적 동질성 마련을 위한 특별한 노력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생존만을 위해서 인내하고 자기의 목소리와 자기들의 피의 유별성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지 않던 그들이 최근에 이르러 서서히 직, 간접적인 민족적 활동을 국내외적으로 시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의 이러한 새로운 행보에는 경제력이 밑받침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 또한 유별나다.

새롭게 세계적인 범위에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중국계들의 활발한 움직임이 고난의 민족사를 마감하고 중화민족의 민족적 르네상스를 구체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민족적 시련과 분열로 작용할 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 해외 중국계들의 민족적인 각성이나 민족의식에 따른 문제이기 이전에 보다 직접적으로는 그들의 모국인 중국의 개혁개방이라는 엄청난 세기적 실험의 결과가 미치는 역할이 더욱 결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국내외적으로 중국인들의 움직임은 최근들어 더욱 활발해 지고 있다. 그 움직임의 하나의 축은 해외화교들이 중심이 된 이른바 "중화 경제권"의 창설과 연관된 새로운 중화민족의 민족적 네트워크 수립을 위한 노력이고, 또 다른 하나의 축은 중국 국내에서 나타나고 있는 도시와 농촌 간의 이동을 중심으로 하는 대대적인 민족이동과 또 개방화의 물결을 따라 계속되고 있는 이른바 "신화교"로 지칭되는 중국인들의 대대적인 해외탈출과 해외화교들의 새로운 이동이 그것이다. 전자가 중화민족 갱생의 푸른 신호라면, 후자는 중화민족 분열의 새로운 불씨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다양한 중국의 민족문제 가운데서도 특히 그들 민족질서의 새로운 도전으로 등장하고 있는 "해외 중국인" 즉 "華僑"와 "華人"들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살피면서 이를 통하여 중화민족의 새로운 움직임의 개요를 살핌과 동시에 이 민족질서가 만들어 내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짚어 보려 한다. 이는 단순히 해외 중국인 문제의 이해라는 차원에서 뿐 아니라, 향후 중국과 중국세의 구체적인 전망과 이해를 위해서도 빠뜨릴 수 없는 작업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2-1, 해외 중국인의 유형

"해외 중국인" 즉 해외에서 살고 있는 중국계 인구를 지칭할때도 이를 하나의개념으로 통칭하지 않고 보다 세분화하여 호칭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외국에 살고 있는 중국계 인구는 이주의 역사도 길고, 또 이주 경위나 그곳에서의 국적 상황도 서로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의 명칭으로 단일화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해외 중국계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반적 용어는 "華僑"라는 개념이다. 해외 중국계를 지칭할 때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이 말은 처음에는 해외 중국계 전체를 통칭하는 개념이었으나 근래들어 보다 한정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화교"는 당초 중국에서 태어났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모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고 있는 교포들 중에서 현지 생활을 하면서도 중국말을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적도 거주국 국적이 아니라 중국의 국적을 그대로 가지고 생활하고 있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임시적으로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중국교포들을 주로 지칭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화교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은 주로 중국인 1세들이 대부분이고 그 숫자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다음은 "華人"이라는 개념이다. 이들은 태어난 곳도 중국이 아니며 현지 언어를 사용하고, 또 국적도 중국적이 아니라, 현지 국적을 취득하여 그곳 시민으로 정착하여 살고 있는(임시적이 아닌)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이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자라난 "화교" 2-3세들이다. 예컨데 중국계 미국인, 중국계 말레지아인들이 그들이며,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해외에 살고 있는 전체 중국인들 중에서 점점 많아지고 있다.

"화교"와 "화인"에 관한 중국의 보다 공식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화교"는 "중화민족"의 특징을 가지고 해외에 살고 있으나 여전히 중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의 신분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만약 이들의 정당한 권리가 침범되었을 때에는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에 반해 "화인"은 중화민족의 특징을 가지고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은 "화교"와 다를바 없으나, 이들은 현지의 국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정당한 권리가 침범당했다고 하더라도 중국정부의 보호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들도 중국인으로서의 공동의 민족적 입장에서 어떤 종류의 원조를 받을 수 있기는 하다. 그리고 또 이들도 현재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국적을 버리고 중국의 국적을 취득하고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길도 있다}

중국의 공식입장을 다시 정리하면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든 중국계들은 "중화민족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 점에서 다른 외국인들과는 다른 민족적인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중 특히 "화교"는 "중화민족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외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경우는 대륙에 살고 있는 중국인이나, 이밖에 대만이나 또 곧 중국에 통합될 홍콩이나 마카오 등지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과 민족적인 차별성이 없으며, "화인"들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이들이 현재는 비록 외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중화민족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 원하기만 하면 이들은 중국 국적을 취득 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여타 외국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즉 해외에 살고 있는 중국계들은 그들이 현재 살고있는 지역도 다양하고, 사용하고 있는 언어나 종교 또한 다양하며, 심지어는 국적마져 다양한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러한 여러가지의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 공통 요소로 볼 때 이들은 여전히 "中華民族"이라고 하는 민족적인 동질성을 가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상의 논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중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민족개념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개념이 바로 "中華民族"이다. 중화계 인구들은 현재 중국대륙이나 대만에 살고 있는 가장 순수한 의미의 중국인들을 비롯, 이들과는 다소의 거리를 두고 있으나 중국인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생활해 오고 있는 홍콩, 마카오 등 인근 중화권 지역에 살고 있는 중국인, 그리고 이들과 거의 비숫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는 동남아를 비롯 세계 여러 나라에 퍰어져 살고 있는 "화교"들과 또 국적을 달리하여 거주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화교의 자손들인 "화인","화예" 등과 같이 동일한 민족적 연계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현실적으로는 다양한 분류가 가능한 분화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이런 다기한 분화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中華民族"이라고 하는 하나의 포괄적인 민족개념에 함께 포용될 수 있다. 그 만큼 이 개념은 위에서 언급한 갖가지 국내외 중국인들을 지칭하는 개별적이고 다양한 개념단위 보다는 포괄적이며 또 상위개념이자 이는 또 독특한 다민족공존과 민족대단결의 기치를 널리 강조하고 있는 사회주의 중국이 설계하고 있는 민족공존 구도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中華民族"이라고 하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淸末 民國 초반이다. 특히 이 시기 孫文은 [孫中山全集]에 실린 한 연설에서 "우리들은 반드시 非滿族인 중국인 중에 민족주의정신을 발양시켜야 한다. 이것은 우리 화인(我華生)들의 책임이다. 이러한 정신을 환기하여 中華民族은 반드시 스스로의 역량으로 滿淸王朝를 제압하고 영원히 타도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漢族과 동의어로써 "中華民族"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20세기 초 진보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등장하기 시작한 "중화민족"의 개념은 그 후 개량파 지식의 한사람이었던 梁啓超에 의해 복합적인 민족개념으로 "중화민족"이 다시 분명하게 정의된다. 그는 1906년 "현재의 중화민족, 즉 "漢族"이란 처음부터 하나의 민족이었는가 아니면 다수민족들이 혼합되어 이루어 졌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현재의 중화민족은 처음부터 하나의 민족이 아니었고 다수민족이 혼합되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이 당시의 선진 지식인들이 보인 "中華"의 개념은 다분히 滿, 漢과 같은 종족의 구분이 전재된 것이었으며, 특히 이는 漢族 중심의 종족통합의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는 발전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특히 1911년 청조의 멸망과 더불어 "與漢人平等", 즉 滿, 蒙, 回, 藏 등의 각 족은 "漢族과 평등하다"는 이른바 "五族共和論"이 당시 "中華民族"이라는 개념의 실질적인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후 1919년 손문은 "민족의 통일", "한족 중심의 민족동화"를 실질적인 내용으로 한 "중화민족의 신주의"라는 논리를 제기하여 복합적인 중화걔념을 더욱 분명히 했다. 그러나 5.4운동 이후 중국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적 민족이론을 수용한 뒤로는 이 개념이 다분히 중국내 살고 있는 다양한 소수민족들의 민족적 이익을 고려한다는 명분적 의미를 더욱 강하게 내포하는 개념으로 조작 되어 갔다.

이러한 발전과정을 거쳐 형성된 "중화민족"의 개념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종래 사회주의 중국이 견지해 온 중국내의 소수민족들을 동화시키는 하나의 포괄적인 개념단위에서 더욱 발전되어 전 세계에 퍰어져 살고 있는 다양한 중국계 사람들까지를 다 함께 포용하는 보다 넓은 범위의 통합적인 민족개념으로 발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2, 중국인들의 해외이주 경과

중국인들이 자기가 태어나 자라던 고장을 떠나 外地로 나가 산 역사는 대단히 오래다. 물론 당시의 외지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중국이라고 하는 하나의 통치체를 떠나 또 다른 별개의 독립된 통치체로의 이주를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기존에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나 먼 변방 내지는 다른 곳으로의 이주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기록은 중국인들의 외지로의 이주는 옛 商, 周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히기도 한다.

隋나라(581-618)의 역사서인 [隋書]에는 동진(318-420)초기 강남지방에서는 북방에서 남방으로 새로 이주 한 사람을 "僑人"이라고 부르고, 그들이 새롭게 이주한 장소에 북방의 고향 이름을 붙인 縣이나 郡을 설치하고 이것을 "僑立"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여기서 "교인"이나 "교립"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화교"와 동일한 개념일 수는 없다. 그러나 "僑"라고 하는 개념은 이때부터 이주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전해져왔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바로 고향을 멀리하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 살면서도 고향을 결코 잊지는 않는다고 하는 의미까지를 내포하면서 이어져 왔다.

이렇게 볼 때 화교, 화인이라고 하는 현상은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해외에 이주하기 시작한 이전부터 중국의 판도 내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중국인들의 해외진출은 국내에서의 다양한 이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으며, 이런 면에서 중국인들에 있어 이주라는 것은 조국을 떠난다거나 또는 조국을 버리고 외국을 선택한다는 의미에 앞서서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중국적인 의식과 중국적인 문화의 공간을 그 만큼 더 확대해 간다고 하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렇듯 동진시대에 나타났던 중국인들의 강남북 간의 이동은 그 후 근 현대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중국인들의 해외이주의 선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화교"라고 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중국인들의 국내 집단이동 파도가 해외까지 확대되면서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으며, 또 "화인"이라고 하는 현상은 이들 화교들이 해외 현지에 정착하여 생활의 본거지를 그곳으로 삼은데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의 대대적인 해외진출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대표적인 중국인들의 해외진출은 13세기말 元이 쟈바에 원정하였을 때로, 원정은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이 당시 원정에 참가했던 많은 병사들의 현지에 남아 현대 동남아화교의 근거를 마련했다. 또 기원 전 13-4세기 宋이 元에 명망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현제의 타이 등 동남아로 이주한 사실이 있고, 그 후 15-17세기에 걸쳐서는 明의 이민이 말레지아와 베트남 지역에 대거 들어갔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본격적인 해외이주가 시작된 것은 역시 서구 식민세력들이 그들의 광대한 식민지 경영을 위하여 값싸고 양질의 노동력을 대량으로 필요로 했던 18세기말 경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이른바 "華工"으로 불리우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동남아를 비롯하여 여러나라로 빠져 나가게 되었으며, 이런 경로로 빠져나간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화교", "화인"들의 선조다.

동남아에서의 "화공"이라고 불리워지는 중국인 노동자들의 진출은 1785년부터 시작됐다. 이 해 말레지아 중앙부를 점령한 영국은 이곳을 개발키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 노동력을 중국 노동자의 강제적 투입으로 해결했고 이 때가 중국인들이 노동자로써 동남아시아에 대량으로 이주하게된 최초의 일로 볼 수 있다. 그 후 1800년 초에도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광주에 가지고 있던 광주상관의 매판상인을 통하여 광동성내의 여러 곳으로부터 수 차례 노동자들을 밀수출시켰다. 또 1819년 영국이 싱가폴을 점령, 이를 개발키 위해 많은 중국인 노동자 즉 "華工"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다른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도 또 이들의 노동력에 의해 개발이 촉진되었다.

19세기중반, 영국의 식민지이었던 미대륙 등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케 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마침 구미 각국의 잇다른 노예해방에 따라 흑인 노예들의 매매가 없어지게 되면서 노동력의 공백을 중국인 노동자들로 충당하려 했다. 더욱이 당시는 또 청조의 부폐가 극에 달해, 경제는 대단히 피폐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동안 계속되어 왔던 국민들의 출국금지, 즉 아편전쟁 전의 쇄국령이 그 효력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대대적인 해외이주에 큰 작용을 하기도 했다.

뿐 만 아니라 당시 중국인들의 해외이주에는 이를 적극적으로 중계하는 조직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명, 청대에 있어 복건이나 광동지방에서는 동향이나 동족집단 안에서 泉州나 璋州 등으로부터 해외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출국시 중개인인 이른바 "客頭"와 알선료와 배삯을 나중에 외국에서 벌어서 갚기로 계약하고 고향을 떠나는 노동자들이었다. 그 후 이것이 변해서 "契約華工制"가 되었으나, 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화공들의 수요가 증대하는데 따라 이 제도가 중계업자들에 폭리를 가져다 주는 착취조직으로 변했는데 당시의 이 "객두"가 오늘날 중국인들의 해외진출을 불법적으로 은밀하게 알선하면서 폭리를 취하는 이른바 "蛇頭"의 선조격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당시 동남아 각지와 광주, 마카오 등의 불법조직에 의해서 출국하는 화공을 "猪仔"라고 부르고 이들의 송출을 "猪仔貿易"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당시는 싱가폴이 "저자무역"의 중심지로 중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시장 노릇을 톡톡히 했다. 식민지 당국은 "華民政務司"(Chinese Protectorate)를 두고 이를 통해 이들 저자들을 수용하는 "저자관"(정식 명칭은 "객관")을 싱가폴에 건설 운영하기도 했다. 1823년에는 싱가폴에만 2-30개의 저자관이 있었으며, 해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계약화공제가 그후 미국과 여타 지방 화공 수출의 하나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식민지 열강들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노동력 확보의 술책에 관계되어 중국인 노동자들이 해외이주가 본격화 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형태는 다양화 되어갔으나, 많은 중국인들이 값싼 노동력으로 해외로 빠져나갔다. 중국 노동자들은 미국에서의 철도공사, 브라질에서의 커피재배, 파나마에서 운하건설, 카나다에서 목장노동, 큐바에서 사탕수수 재배, 인도네시아의 고무농장 오스틀라리아에서 담배재배 등 다양한 노동에 종사하면 해외 이주 1세대를 형성해 나갔다.

명대말기로부터 아편전쟁까지 약 3백년간 수십만 에서 1백만 전후에 머물렀던 해외이주 중국인들의 수는 그 후 19세기중엽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 1879년에 300만명, 99년에 400만명, 1905년 760만명, 21년 860만명, 31년 1,283만명 등으로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50년 간에 4배정도 증가했다.

그러나 중국인 노동자들의 강제송출은 1930년대에 이르러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다. 당시는 세계공황이 발생하여 각지에 실업자가 생겨나면서 더 이상 화공들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으며, 또 산업기술의 발달과 기계화의 진척으로 대량의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또 해외 자본주의 각국들이 중국 투자를 활발히 하여 중국 각지에서 산업시설이나 철도 건설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이를 위해서 많은 현지 노동력이 필요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식민지세력의 희생양으로서의 화공무역이라고 하는 현상은 일단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꼭 화공무역의 형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중국인들의 해외 이주의 추세는 1949년 중국혁명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여전히 계속되어 왔고 특히 최근의 개혁개방의 상황에서는 또 한차례우? 해외이주 러시를 맞이하고 있다.

2-3, 해외 중국인들의 수

인구 수로 보면 해외에 살고 있는 중국계인들의 총수는 대체로 3천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들을 보다 세부적으로 보면 중국 국적을 여전히 가지고 외국에 살고 있는 "화교"들이 이 가운데 2백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고, 그 나머지는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이른바 "화인"들로 이들이 전체 해외 중국계의 약 9할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중국계인 홍콩, 마카오의 650만, 대만의 2천1백만 등 2천8백만을 포함하면 중국대륙 이외에 생활하고 있는 전체 중국계 인구는 약 6천만명에 가깝다. 그리고 또 중국 내에 살고 있는 화교친척과 귀국화교들의 수가 또 약 3천만정도로 추산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까지 합치면 화교계 총인구는 약 9천만명으로 합산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중국대륙에 살고 있는 인구까지를 포함하면 전세계에 살고 있는 중국계의 총 인구는 12억 5천만 정도로 이는 세계인구의 약 1/4정도다.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중국계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은 아시아로 총 해외 중국계 인구의 약 8할 이상이 이 지역에 모여살고 있고 있으나, 최근에는 거주 분포가 점차 확산돼 가고 있는 추세다. 이들 중국계 인구를 국가별로 보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이 인도네시아로 약 6백만명, 다음은 타이의 5백만명, 말레지아 4백70만명, 싱가폴 2백만명, 미국 2백만명, 필리핀과 베트남이 각각 약 1백만, 미얀마 80만명 등의 순이다. 지역별로는 약 2,400만명(전체의 87%)이 아시아 지역에, 230만명(8.5%)이 북미나 중남미에, 87만(3.2%)이 유럽에, 약 30만(1%)이 남태평양, 오세아니아에, 9만(0.3%)명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 세계에 산재해 있는 중국계 인구는 중국을 제외한 세계 총 인구의 0.66%에 상당하는 것으로, 아시아에서는 전체인구의 1.3%를, 남태평양, 오세아니아에서는 1.1%를, 북미, 중남미에서는 0.3%를, 유럽에서는 0.1%를, 아프리카에서는 0.02%를 각각 점하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교, 화인들의 거주국에서의 전체인구에 대한 비율은 싱가폴이 76%로 최다, 이어 말레지아 30.5%, 10%이상을 점하고 있는 나라를 들면 브르네이(23%), 다히티(20%), 사이판(12%), 타이(11%) 등의 순이다. 그리고 도시별로 볼때는 싱가폴이 209만명으로 가장 많고, 70년대 중반 사이곤이 110만(지금은 70만명 전후)등이며, 50만 이상의 도시가 쟈카르타, 방콕, 마니라, 쿠아라룸풀 등이다.


2-4, 화교의 선구자 "客家"

해외에 살고 있는 중국계 인구를 생각할 때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이른바 "客家"로 불리우는 특유의 종족집단이다. "태양이 있는 곳에 중국인들이 있고, 중국인들이 있는 곳에 객가들이 있다"(有太陽的地方, 就有中國人. 有中國人的地方, 就有客家人)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인 사회에서 객가인들의 존재가 특이하며, 이러한 현상은 해외 중국인 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객가들은 중국에서는 廣東, 福建, 江西 3성에 省境일대를 중심으로 광동의 중심인 珠江델타地域, 특히 광서, 사천, 해남도, 호남, 귀주 등에 분포되어 있다. 중국 국내에 살고 있는 객가들과 대만성에 살고있는 객가들을 합친 인구는 총 4천만명, 그리고 홍콩에 약 2백만명, 그리고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각지에 약 3백만명 등 전체 약 4천5백만으로 추산되는 수가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 중에서 특히 해외에 살고 있는 객가들은 전체 해외 중국계 총수 3천만명의 약 1/10에 해당하며 이는 해외 중국계 중에서 廣東, 潮州, 福建성 출신에 이은 숫자다.

객가들은 당초 약 2천년전 중화문명의 중심이었던 중원지방(황하중유역)에서 생활 해 왔으나 4세기 전후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 왕조 교체기의 전란, 정치적 억압, 기근, 자연재해 등으로 경제, 사회적 불안이 겹쳐 고향을 등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른바 "流人"이 되어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을 계속했다.

이렇듯 당초 자기들이 살던 땅을 버리고 남하한 이들은 선주민들인 타종족집단들과 대립, 항쟁을 계속하면서 최종적으로는 광동, 강서, 복건 등의 3성 경계선 일대를 중심으로 서쪽은 사천, 동은 대만, 남은 해남도와 남중국 각지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 민족집단은 宋代(960-1279)에 광동일대에서 호적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그 지방에 원래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을 "主籍"이라고 하고, 후에 유입된 이들 流人들을 "客籍"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데서 이들을 "客家" 또는 "客家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미리부터 살고 있던 "주적"들이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객가들은 소유자가 없는 쓸모없는 토지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척박한 토지에 살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근면, 절약하고 단결심과 의협심이 강하고 용감하면서도 어려움을 잘 참아내는 "한족중에서 가장 용감하며 진보적인", "중화민족의 정수" 등과 같은 수식어에 어울리는 독특한 객가인들의 성격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남자는 외지에서 생겨유지를 위한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또 남녀가 평등하게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고, "유일한 재산"이 교육이라고 생각, 자녀들에게 철저한 교육을 시켜 그 많은 수가 의사, 군인, 경관, 교사 저널리스트 등 전문직종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19세기에 들어 도항금지 조치가 해제되자, 베트남, 타이, 말레지아 등 해외로 진출, 현재는 인도네시아(50만명), 타이와 말레지아에 각각 30만명, 싱가폴(20만명), 미얀마(10만명),, 그리고 영국(10만명), 모리샤스(3만명)등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객가계의 화교 화인들이 세계각지에 분산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1971년에는 홍콩에서 "世界客屬懇親代表大會"의 제1회 대회를 열었고, 그 후 세계 각지로 옮겨가면서 정기적인 회합을 가지고 있다. 이 모임은 세계 화교 화인 들 중에서 최초의 국제적인 조직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조직이 세계 화교들의 새로운 결집을 이루어내는데 큰 작용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5, 신화교

중국이 1970년대 들어 개혁개방정책을 펼치면서 중국인들의 해외진출이 자연스럽게 다시 이루어 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또 다시 많은 중국인들의 해외진출 러시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번의 새로운 중국인들의 이동은 중국대?에 국한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대만, 홍콩 등지의 중국계 인구가 전면적인 이동을 하는 상황으로 발전되었고, 오래전부터 동남아에 정착해 있던 중국계 인구가 다른 지역으로의 재이민 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렇듯 7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되고 있는 중국인들이 새로운 이동에 따른 유입을 일반적으로 "新華僑"로 지칭하고 있으며, 이들의 총수는 대체적으로 약 160 -180만 정도로 추산된다.

신화교의 움직임은 과거 중국인들의 해외진출과는 내용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과거와는 달리 이들은 대개 해외에서 유학을 한 후 그자리에 눌러앉아 생활하거나 또는 해외 가족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또 보다 유리한 경제환경을 찾는 "투자이민", "상업이민" 등이 대종이며 이들은 또 전적으로 자의적이고 의도적인 외국행이라고 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이들이 택하는 이민 대상국도 하나같이 부유한 나라들이며 가난한 나라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이들의 학력도 상당히 높을 뿐 아니라, 이민 전의 경제적인 상태도 좋은 편이다. 디민 이 중에서 대륙출신 이민자들은 여전히 대만이나 홍콩 등 여타지역에 비해서 교육수준도 낮고 이민전의 경제적인 여건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특히 신화교 물결은 중국의 개혁개방 본격화는 물론 홍콩이 1997년7월을 기해서 중국에 반환되는 것에 따른 홍콩인들의 대대적인 해외이주가 이를 크게 부채질 하고 있다. 한 통계는 중국대륙에서 만 개혁개방이 시작된 이래 약 12년간에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허가한 출국자 수는 약 136만명으로 그 가운데 이민이 80여만명, 유학생이 약 30만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 진출국은 미국, 일본, 카나다, 오스틀라리아, 유럽 등이다. 그리고 이들을 또 지역별로 분류해 보면 전통적으로 최대의 화교 송출지인 광동성에서는 개혁개방 직후인 1980년 1년간에 4만2천명이 세계 60여개 국으로 출국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미국이 1만6천명, (전체의 38%), 카나다에 1만1천명(26%)을 각각 차지하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이 성에서는 매년 이민자 수가 약 4만명에 달하고, 1981-1991까지의 이민 자는 44만명으로 이는 같은 시기 중국 전체 이민자 총수의 57%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 : 중국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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