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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학자료 > 논문 등록일 2007-01-19
작성자 관리자 (admin)
아시아 지역의 기독교 선교: 특징과 문제점

다음의 글은 J. Herbert Kane이 쓴 A Concise History of the Christian Mission: A Panoramic View of Missions from Pentecost to the Present (Revised Edition, Michigan: Baker Books, 1997)의 제10장인 "Missions in Asia"를 정리하고 보완한 것이다. 이 글은 아시아 선교의 전반적인 특징들과 문제점 그리고 기독교가 아시아 사회에 미친 영향을 설명한다. Herbert Kane은 비록 세계 선교사 및 교회사에 관해 많은 책들을 썼지만, 이러한 책들에서 그의 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깊지 않고 폭넓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위의 글에서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글을 옮김에 있어서 불필요하다고 간주되는 부분들은 빼버리고 현재의 상황과 맞지 않은 통계수치나 내용상 오류로 여겨지는 부분들은 수정했다.

아시아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는데, 그 무렵 동아시아에서는 인도로부터 중국으로의 불교 전래가 일어나고 있었다. 기독교는 유럽에서 번성하여 예수께서 마태복음 13:31-32에서 겨자씨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거대한 나무로 자랐다. 기독교는 무슬림들이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킬 때까지 한동안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도 번창했다.


1. 선교의 관점에서 본 아시아의 일반적 특징들

1) 사람이 많은 아시아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을 품고 있는 아시아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중국과 인도만 해도 모두 합치면 20억 이상이 된다. 아시아에는 또한 토쿄, 상하이, 뭄바이, 캘커타, 서울 등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도시들이 있는데, 이들은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혼잡한 도시들이기도 하다. 그밖에 아시아는 거대한 슬럼가를 껴안고 있는 많은 빈곤한 도시들을 포함하고 있다.

2) 세계 주요 종교들의 원산지로서의 아시아
인도에서 지배적인 종교인 힌두교는 인도 국민의 약 83%가 믿고 있다. 불교는 원산지인 인도에서는 오늘날 거의 사멸했지만 테라바다불교의 형태로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에서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잡고 있으며, 대승불교의 형태로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에 전파되어 있다. 중국에서 발생한 유교와 도교는 대승불교와 함께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에서 다양한 형태로 광범위한 추종자들을 갖고 있다. 그밖에 일본에는 일본 특유의 신도가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3) 최초의 기독교 선교 무대였던 아시아
사도 도마는 기원 52년경 인도에 가서 마드라스 근처에서 순교하기까지 거기서 20년간 사역했다고 알려져 있다.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에는 인도로 전파했다가 나중에 중국으로 가져가 이곳에서 당나라 시대 2세기간 번성했다. 14세기에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승들이 중국에서 활동했다. 최초의 제수이트 선교사들은 1542년 인도에 도착했고 16세기에 일본에서 활동했으며 17세기에 중국에 들어갔다. 개신교의 선교사들도 아시아로 가서 일했다. 덴마크-할레(Danish-Halle) 선교회는 인도에서 18세기의 대부분 기간 활동했다. 영어권에서의 첫 선교사인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는 인도에서 근 40년을 보내면서 성경을 인도의 방언들 중 35개의 방언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도왔다. 최초의 미국 선교사인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은 미얀마에서 사역했는데, 여기서 그는 침례교 해외선교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은 1807년 칸톤(Canton)에서 사역하기 시작함으로써 중국에 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중국이 1840년대 다섯 개의 항구들을 불평등조약에 따라 개항한 이후 수년간 10여개의 개신교 선교회들이 중국에 들어갔다. 1920년대 중국에는 약 16,000명의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그 중 반이 로마가톨릭에 속했다. 당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나라였으며 그 뒤를 인도가 이었다. 사실 아시아는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보다 훨씬 많은 선교사들을 불러들였고 그들 중 숱한 자들이 순교한 지역이다.

4) 아시아는 그 선교 결과가 선교를 위한 노력에 비해 적은 곳
아시아에서 가톨릭은 거의 500년 동안, 개신교는 근 300년간 활동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약 3% 인구만 기독교를 믿는다. 중국과 인도에서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합계가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의 숫자보다 많다. 일본은 400년 이상의 선교역사를 갖고 있지만 기독교인은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태국의 선교역사도 16세기로 올라가지만 기독교 신자는 인구의 1% 미만에 불과하다. 다행스럽게 다른 나라들에서의 상황은 조금 낫다. 유럽 선교사들, 특히 네덜란드 선교사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예컨대 수마트라 섬의 바탁(Batak)족 교회들은 100만명 이상의 개종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다른 종족들의 교회들도 수십만의 신자들을 확보해 놓고 있다. 술라웨시 섬의 미나하사(Minahasa)족의 경우, 근 90%가 크리스챤이다. 최근 인도네시아의 여러 종족들의 교회에서는 부흥운동이 일어나 신도수가 2-3 배로 증가한 곳도 적지 않다. 로마가톨릭이 아시아에서 최대의 성과를 올린 곳은 필리핀으로, 인구의 약 82%가 가톨릭 신자다. 20세기 전환기에 시작된 개신교와 독립가톨릭교회들도 약 8%를 점유하고 있다. 미국침례교는 비록 미얀마에서 훌륭한 선교사역을 전개했으나, 버마족으로부터 획득한 개종자의 숫자는 극히 작다. 태국에서의 선교는 미국장로교의 주도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에 따라 다른 교단들은 대부분 떠나고 말았다. 아시아에서의 기독교 선교에서 숫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가장 성공적인 나라는 한국이다.

5) 주로 하층계급이나 소외계층에서 개종이 이루어진 아시아
이 점은 특히 인도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 나라 기독교도의 60%가 빠리야(pariah) 즉 불가접촉민이라고 알려져 있는 최하층 천민 출신이다. 그들의 개종은 이전에 일어났던 대중적 기독교운동의 결과다. 신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자가 된 이후 형편이 나아졌으나 그들의 생활수준은 여전히 매우 낮다. 오늘날 인도의 교회들이 겪고 있는 전반적인 물질적 곤궁함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미얀마의 모든 기독교인들의 97% 이상은 불교가 지배적인 버마족이 아니라 주로 정령신앙을 갖고 있는 소수종족들로부터 왔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상황도 그와 비슷하여, 예컨대 수마트라 바탁족의 교회들은 거의 모두가 소수종족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그 사정이 조금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여기서도 지식인층이나 관료계층에서 개종한 자들은 극히 드물다. 일본의 경우는 예외적이어서, 초기의 개종자들은 대부분 사무라이 계층에서 나왔다.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일본 교회에 남아 있어, 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중류나 중상류층에 속한다.



2. 선교 결과가 빈약한 원인들

1) 오래된 전통과 발달된 문화
아시아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3천년, 4천년 심지어 5천년 된 문명들을 만났다. 인도의 인더스 강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에 시작된 아리아 문명보다 훨씬 앞선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는 아시아 민족들은 그들의 문화를 기술 분야를 제외하고는 서양의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 이것은 특히 중국의 경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신을 세계의 중심 국가로 보았던 중국인들은 중국 바깥의 세계를 야만적인 것으로 경멸했다. 서양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19세기에 중국 사회에 들어갔을 때 그들 대부분이 중국의 엘리트층으로부터 불신을 받았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2) 고도로 발달된 오래된 종교들로부터의 도전
아시아의 종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창건자, 교리철학자, 종교개혁가들이 있다. 그들은 또한 그들 나름대로의 화려하게 장식된 아름다운 사원과 탑 그리고 수도원들을 갖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성스러운 강, 성스러운 산, 성스러운 경전, 그리고 이슬람의 고행자인 파키르(fakir), 힌두교의 스와미(swami), 요기(yogi), 도사(道士), 고승 등 성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그밖에 특히 힌두교의 경우 수천 수만의 신들을 섬기며, 불교의 경우 세상을 구원할 보살을 기다리기도 한다. 아시아인들은 그리하여 그들의 종교들을 최고의 것으로 믿고 있으며 따라서 종종 다른 종교들을 배척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힌두교도들은 리그베다가 신의 계시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중국에서는 유교의 골수분자들이 기독교를 불법화하도록 황제를 종용하기도 했다.

3) 깊고 오래된 사회적 및 종교적 관습에서 오는 저항
아시아의 모든 문화에는 기독교 복음에 적대적인 관습과 편견이 있다. 인도와 중국과 일본만 보더라도, 각기 기독교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중대한 장애가 되는 사회적 관습이 있으며, 그것은 개종의 결과가 빈약한 원인을 형성한다.
우선 인도의 경우 그것은 카스트 제도에서 확인된다. 수천년간 인도 사회의 한 중요한 특징을 이루어온 카스트 제도는 힌두 사회를 브라만,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드라 등 크게 네 가지 사회적 및 직업적 그룹으로 나누어 왔다. 이 밑에 불가접촉민인 빠리야가 있다. 이에 따라 힌두 개개인은 태어날 때부터 한 특정 카스트에 속하며 죽을 때까지 그것은 변치 않는다. 카스트가 변경되는 것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에 따라 오직 내세에서나 가능하다. 더 나은 카스트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카르마(karma) 즉 운명을 수용하고 다르마(dharma) 즉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인 인생의 법도를 지키고 수행해야 한다고 본다. 이에 대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피조물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한 형제로 보는 기독교의 신분관은 다른 카스트와의 교제를 거부하는 힌두교도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즉 기독교의 신앙공동체는 힌두 사회에서 근본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 힌두가 기독교인이 되면, 다른 힌두들은 그를 카스트에서 이탈한 자로 취급한다. 즉 힌두 사회의 일원으로 보지 않는다.
중국에서 기독교 개종의 가장 큰 걸림돌은 조상숭배라고 할 수 있다. 유교의 도덕에서 가장 큰 덕행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라고 간주되어 왔다. 부모에 대한 효는 이미 죽은 조상에게까지 확대되어, 그 집안의 장손이 조상귀신들에게도 정해진 제물을 바치고 예를 올리도록 되어 있다. 중국에 온 초기의 선교사들은 조상숭배를 우상으로 간주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에게 그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조상숭배를 거부하는 중국인들은 가족과 친지와 이웃들로부터 배척되었다.
일본에서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여기에서는 조상숭배에 더하여 왕실에 대한 숭배가 옛날부터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핵심적인 것은 일본의 神道다. 신도는 19세기 후반 명치시대에 神道敎와 國家神道로 구분되었다. 전자는 하나의 종교로서 제의, 기도, 점복, 주술 등을 포함한다. 후자는 제정일치적 동기에서 나온 것으로서 종교라기보다는 국가적 이념이었다. 정부에 의해 후원되었고 학교교육에서 일률적으로 가르쳐진 이 국가신도는 군국주의 시대 모든 일본국민에게 강요되었다. 국가신도의 정점에는 일본천황이 놓여 있는데, 그것은 일본의 신화에 따라 첫 왕인 짐무(神武)천황이 해의 여신인 天照大神의 증손이며, 이에 따라 그와 그의 모든 자손들이 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은 조상숭배뿐만 아니라 천황숭배도 거부해야 했는데, 이 경우 그는 친지들뿐만 아니라 당국으로부터도 배격당하는 위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황제숭배를 거부한 수백명의 일본인 목사들은 감옥살이를 했다.

4) 식민통치와 기독교간의 긴밀한 관계
동남아의 모든 나라들 가운데 오직 태국만 서구 제국주의의 희생이 되지 않았다. 유럽의 동인도회사들은 17세기부터 아시아의 도처에 침투하여 뒤에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진행된 서구 열강정부들의 아시아에 대한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의 길을 닦아 놓았다. 영국은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스리랑카, 브루나이 등의 나라들을 식민지화했으며,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점령했다. 네덜란드는 동남아 도서부에 광활하게 뻗어 있는 인도네시아를 식민통치했다. 필리핀은 300년 이상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다가 19세기 말에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복음과 식민지배를 위한 무력간의 관계는 아시아의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중국의 경우 그 관계는 매우 긴밀하다. 아편전쟁(1839-1842)의 결과 체결된 南京條約으로 중국은 서구열강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5개 항구가 개항되었고, 이를 통해 아편을 든 서양 상인들과 함께 성경을 든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왔다. 중국어를 아는 선교사들 중에는 서양열강들의 정치적 및 상업적 목적을 위해 종종 통역인으로 활동하는 자들도 있었다. 20세기 중엽까지 1세기간 복음과 砲艦간의 성스럽지 못한 이러한 동맹관계는 선교사들의 복음전파 사역에서 종종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5) 기독교의 배타성
만약 기독교가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한 종교라는 자세로 아시아에 들어왔더라면, 더욱 더 큰 호응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일한 참된 종교라는 자세로 들어와 모든 다른 종교들을 그릇된 종교로 배격했다. 이러한 관점은 당연히 아시아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전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예컨대 수천 수만의 신들을 갖고 있는 힌두교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비쉬누(Vishnu)의 여러 화신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자세는 힌두교도들의 사고방식에 완전히 낮선 것이었다. 힌두교도의 종교관은 마하트마 간디에게서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진리를 하나의 나무로 보았고 세상의 다양한 종교들을 그 나무의 가지들로 간주했다. 즉 하나의 나무를 이루기 위해 많은 가지들이 필요하듯이, 신과 인간 그리고 구원과 관련된 완전한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많은 종교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불교와 유교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하는 불교의 경우, 원래는 신이나 세상의 구원자 등과 같은 개념이 없었다. 세상에서의 질서를 강조하는 중국인들은 새로운 종교라도 그것이 중국인들의 사회적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한 적대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가 자신의 신앙의 유일성을 강조할 때 그것을 용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또 다른 측면은 인간의 죄악성이다. 2천년 이상 유교는 인간의 성선설을 가르쳐 왔으며, 인간의 착한 본성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3. 기독교가 아시아에 미친 영향

기독교는 아시아의 문화에 어떤 정도로 영향을 미쳤는가 라는 질문은 간단히 대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기독교의 영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외국인들에 대해 적대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종종 극단적인 그 반대의 견해를 가져 기독교의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아예 부인한다. 진리는 아마 이 양 극단 사이의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시아 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광범위한 영향은 기독교로 개종한 아시아인들의 숫자가 말해주는 것보다는 훨씬 컸다는 점이다.

필리핀: 아시아에서 기독교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은 무엇보다도 그 개종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고 개종자의 수가 가장 많은 필리핀일 것이다. 필리핀의 기독교화는 1564년 레가스피(Legaspi) 신부와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신부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곧 이어 다른 교단들의 신부들도 들어왔다. 그들은 학교를 세우고 이를 통해 서양의 문화와 함께 기독교 교리를 가르쳤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식민지 역사의 초기에 필리핀에서 기독교를 전파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신부들의 종교적 열정과 식민정부의 군사적 노력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페인 왕실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 로마 가톨릭은 16세기 필리핀으로 확대되고 있었던 이슬람을 북부에서부터 점차 구축하여, 오늘날 이슬람은 민다나오섬의 일부를 포함한 남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다. 1900년경부터 미국 선교사들이 필리핀에 들어와 선교사역에 임하고 있다. 현재 기독교도는 인구의 90%를 차지하는데, 그 중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 신자다. 아시아의 유일한 "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 있는 필리핀에는 스페인과 미국 문화의 영향이 강력하게 남아 있다.

인도: 10억 인구에 수백개의 방언을 가진 나라인 인도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을 평가하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기독교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은 시리아 정교회의 교회들이 1500년 이상 존재하고 있는 인도 남부 지역이다. 인도에서 기독교의 세력은 주에 따라 크게 다르다. 나가랜드(Nagaland) 주는 거의 100% 기독교이지만, 나가족 자체는 작은 종족으로 인도 동북부에 위치한 그들의 작은 지역사회 밖으로 그렇다 할 영향을 발휘하지 못한다. 고아(Goa)는 36%가 기독교인으로 거의 모두 로마 가톨릭들이다. 케랄라(Kerala)는 21%, 마니푸르(Manipur)는 20%다. 인도 기독교 신자들의 약 70%는 남부 4개 주와 고아에 살고 있다. 그들 중 75%는 시골에 거주한다. 따라서 인도의 교회는 대부분 시골에 집중되어 있고 그만큼 가난하다. 그에 비해 기독교는 갠지스 강유역에 사는 수억의 인구에게는 매우 적은 영향을 미친다.
인도가 오늘날 민주주의적인 제도를 갖추고 상당한 정도로 개방적인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의 영향에 기인한 바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기독교와 직접적으로 결부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근대화에 있어서 기독교가 미친 영향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예컨대 근대 힌두교 운동들 가운데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인도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마하트마 간디의 경우, 그가 제창한 비폭력주의 개념은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나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비기독교의 세계에서 오늘날 인도에서처럼 예수가 존경을 받고 있는 나라는 없다. 심지어 그리스도는 서구의 몇 나라들에서보다 인도에서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온유함과 성실 그리고 그의 영성이 인도의 영혼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파니카르(K. N. Panikkar)는 자신이 쓴 Asia and Western Democracy라는 책에서 기독교 선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어서 식민시대가 끝나면 선교도 종식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독립한 지 이미 40년이 지난 인도에서 기독교 선교가 상당히 쇠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중국: 기독교는 중국에 네 가지 각각 다른 경로를 통해서 들어 왔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것을 통해서도 기독교는 중국 땅에 지속적인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교회에 대한 반대는 대부분 전통적인 중국 사회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던 유교적인 사대부 계층에서 왔다. 중국이 기독교화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기회는 19세기 중엽 태평천국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근 15년간 지속되었고 최소한 2천만의 목숨을 희생시킨 이 반란은 홍수전(洪秀全)이라는 기독교 "개종자"가 이끌었던 반(半)기독교적인 운동이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그 반란의 지도자가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태평천국난을 지지하지 않았다. 한편 개신교측에서는 홍수전이 폭력에 의지하고 많은 이단적인 교리들을 도입했기 때문에 그를 거부했다.
19세기 중국에 대한 서양의 영향은 중국이 오랜 전통의 문화와 거대한 인구를 갖고 있던 나라라는 점 때문에 더욱 엄청난 것으로 다가왔는데, 그 영향에서 총검과 함께 성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중국은 근대화를 위한 큰 변화와 개혁을 겪었다. 중국의 근대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강유위(康有爲)는 비록 기독교로 개종한 자가 아니지만, 그 자신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자신의 개혁사상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의 글로부터 영감을 받은 바가 컸다. 이것은 태국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몽꿋(Mongkut, 1851-1868)왕의 경우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몽꿋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가톨릭 및 개신교 선교사들과 오랜 기간 교제를 나누면서 그들로부터 서양의 학문과 언어 그리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배웠던 것이다. 중국에서 청조를 무너뜨리고 현대 중국의 토대를 세운 손문(孫文)은 한때 세례를 받은 기독교도였다.
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중국에서 기독교 선교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공산화 이전까지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1%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행하는 역할은 매우 컸다. 예컨대 1930년대 초, Who's Who in China에 수록된 사람들의 최소한 35%가 미션스쿨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비기독교 계통의 신문에서 "기독교는 중국에서 더욱 깨어 있고 더욱 근대적이며 사회복지사업에 더욱 헌신적인 인간 유형을 생산해 낸다"라고 쓰고 있다.

일본: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국가인 일본에서는 어떠했는가? 초기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일본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개종시킨 자들의 30%가 전통적인 일본 사회에서 모든 종류의 사회적 및 정치적 개혁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무라이 계층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중류 및 상류층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일본의 교회들은 인도의 교회들과 대조를 이룬다. 100년 이상 일본에서 근대화를 위한 개혁운동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인물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그의 전 생애를 사회적 개혁에 헌신한 토요히코 카가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미국의 일본 점령은 일본 전역에 걸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복음전도 활동이 크게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1958년의 한 보고에 의하면, "성경은 일본인들의 대중적인 책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의 신문들은 성경을 서양의 고전문학 반열에서 선두의 자리에 두고 있다." 1977년이 되면 성경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복음의 수용에 있어서 일본인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저항적인 민족들에 속한다. 일본의 교회들은 거의 예외없이 작은 규모다. 기독교는 일본 문화에 침투하는 데 있어서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출처 : 동남아시아선교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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