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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단체 > KWMA 등록일 2006-11-25
작성자 관리자 (admin)
무슬림 가운데 교회 개척을 위한 하나의 패러다임
특별강연 및 전체 토론회 ① 사마리아의 예수님
본 자료는 '제6회 한국선교지도자 포럼'이 2006년 11월 15일(수)~ 16일(목)까지 강화성산예수마을에서 '전방개척 선교위한 1차 5개년 개발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열린 포럼에서 케빈 히긴스가 발표한 내용이다.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무슬림 지역의 교회 개척에 대한 극한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 사역을 행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들 안에서 교회개척사역이라는 과업을 이행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스튜어트 코드웰 (Stuart Caldwell)

우물가에서 한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복음 사역에 있어서 효과적인 전달자로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려고 하는 크리스천에게는 금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여인을 통해 사마리아 지역 전체 마을에 퍼졌던 그 사역은 예수님이 복음 전도자일 뿐 아니라, 교회개척자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4장은 무슬림 가운데 교회개척에 관한 극한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께서 스스로 “저항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를 세우는 과업을 실행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에서 예수님께서 직면하셨던 장애물과 무슬림 가운데 크리스천들이 직면하는 장애물 사이의 엄청난 유사점들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예배 장소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예배를 위한 각기 다른 장소를 가졌다. 이슬람 예배는 끼블랕(the qibla’) 즉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사람이 마주하는 방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초기 무슬림과 유대인 사이에 마찰을 일으키는 논쟁점은 진정한 예배자는 메카를 향해야 하는 지 아니면 예루살렘을 향해야 하는 지에 대한 문제였다.
예수님이 선지자였음을 인식한 후, 그 사마리아 여인의 첫 언급은 예배에 관한 이슬람적 관점과 흡사하다. “예루살렘에서 드려진 예배만이 합당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조상들이 예배했던 그리심 산도 충분한 것입니까?” 무슬림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예배 장소에 관한 똑 같은 논쟁이 떠오르게 된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교회을 어떻게 설립하셨는가?

경전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비슷하면서도 중대한 차이점이 있는 경전에 대한 전통을 공유한다. 유대인들처럼 사마리아인들도 모세의 오경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정경으로 인정하는 다른 부가적인 책들은 경시하였다. 게다가, 사마리아의 모세 오경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유대의 모세 오경과는 상의했다. 예를 들면,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예언(유대인의 오경에서 신명기 18:15~18)은 사마리안 오경에서는 출애굽기 20:21와 대체되었다. 사실 에더쉐임(Edersheim)은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의 우월성을 주장한 것이 모세 오경 본문의 경솔한 주장이며 곡해”라고 진술한다 (1971:396).
무슬림 복음 사역에 있어서 많은 장애물 중 하나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관련된 것이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과 같이, 무슬림들도 공통의 성경적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들은 “진정한 성경” 곧 완전하고 오류가 없는 경전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크리스천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처럼 꾸란이 명백한 성경적 계시를 왜곡했다고 믿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은 그의 교회를 어떻게 설립하셨는가?

종교적 어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많은 신학적 개념과 용어를 공유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모든 유대 분파는 다윗 계통의 메시아를 믿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이러한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공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타헤브(Taheb:스승)가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오는데 그것은 그리심 산에서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믿음에는 다윗 계통적 연결이 전혀 없었다. 이는 유대와 사마리아 간에 역사적 충돌을 잘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전혀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처럼, 크리스천과 무슬림은 유사한 종교적 어휘와 주요 신학적 관점들을 공유한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단어를 종종 다르게 사용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은 어떻게 그의 교회를 설립하셨을까?

결례(Ritual Purity)
그들은 서로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하였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관계만해도 부정하게 될 정도로 ‘불결한’ 존재로 간주했다 (요 4:9).무슬림과 크리스천 사이에서도 이러한 결례의 문제가 비슷하게 일어난다. 무슬림 친구의 초청으로 지역 회당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이후 외국인인 나의 존재에 대한 상당한 우려함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믿음에 대한 우려가 아니었음을 곧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할례를 받았는지에 관한 우려였다. 만약 받지 않았다면, 그들의 회당은 더럽혀진 곳이 되며 그들의 기도는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 역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언약의 표를 받았다는 사실을 듣고 안심했다. 나 또한 그들이 그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음에 안도하였다! 무슬림 가운데 정결과 오염의 문제는 돼지고기를 먹는 것, 왼손을 사용하는 것, 성관계 후 씻는 것과 함께 매우 많은 다른 문제들을 포함한다. 이 대다수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에게 동일하게 중요한 문제였다. 이 복잡한 상황에 있는 그들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의 교회를 세우셨을까? 의심할 바 없이, 그의 모범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예배 장소에 대한 예수님의 접근
유대인과 사마리인의 관계에서처럼, 무슬림에게 예배 드리는 장소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할 수 없다. 그 여인이 결혼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개인적 질문을 피하려고 하면서 (요 4:17~18),그녀가 보인 반응은 아주 날카로운 질문을 드러낸다. 어떤 종교가 참된 것인가?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으며 또 대답하지 않으셨는지를 주목하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1~23).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예루살렘도 그리심 산도 예배의 중심이 되지 않기를 원하신다고 대답하셨다. 이것이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심 산에서의 예배를 모두 거짓되고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는 것으로 파기시켰던 것인가? 예수님께서 영적인 예배 끼블랕(방향)을 위해서 (혹은 기도의 방향을 위해서) 모든 물리적 끼블랕을 거절하셨던 것인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은 기도를 위해 성전에서 모임을 계속했다는 것을 알기에 (행 3:1),우리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믿는 자들이(비록 그들이 틀림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엄밀하게 해석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실제적인 영향력을 이해하였다. “여기” 또는 “저기”에 상관없이, 진정한 예배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장소”는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떤 종교가 “참된” 종교인가에 관한 질문에 대해 예배에 관한 종교적 위치는 “장소”가 아니라고 제안함으로써 대답하셨다. 여전히 “…에서도 말고…에서도 말고…”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의 제자들은 이를 문자적 감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계속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유대인들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던 사마리아인들은 어떤가? 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계속했는가? 예수님을 세상의 약속된 구세주로 영접하러 마을로부터 온 모든 사마리아인들게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셨던가 (요 4:39~43)?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새로운 신자들을 가르치는 데에 전 이틀을 보내셨다. 틀림없이, 그들은 우물가의 여인처럼 의문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예루살렘이 우리의 장소가 될 것인가? 우리의 끼블랕은 현재 어디인가?
우물가의 그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이외의 것에 대해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 이틀 동안 사마리아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에 대해 침묵한다. 그러나, 그의 유대인 제자들은, “예루살렘도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의 실제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계속 예배를 드렸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했던 사마리아인도 그리심 산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계속했다는 추정은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유대 제자들이 그들의 유대적 공동체의 문화적 종교적 삶에 참여를 계속했던 것과 똑같이, 사마리아 신자들도 단지 한가지의 커다란 변화를 제외하고는 똑같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안전하게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변화는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신자들이 사마리아 종교적 제도 속에서 예배를 계속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들은 부족하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도행전 8장에서 사도들이 예배를 위한 “적절한 장소” 또는 사마리아 종교의 대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상한 침묵이 생기게 된다. 대신 우리는 사마리아 사회 속에 있는 명백히 성령 충만한 믿음의 공동체를 보게 된다. 왜 우리는 사도들이 신자들을 사마리안주의 (Samaritanism)로부터 추출해 내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유대교화된 자들과 다르게, 사도들은 사마리아에서 사역하셨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관찰함으로 얻어진 그 접근방식을 단순히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마리아에서의 예수님의 모범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이슬람적 상황에서는 유사하게 행동하길 주저한다. 이들은 이슬람과 사마리안주의는 사뭇 다르다고 설명한다. 이슬람이란 거짓된 선지자에 의해 기초한 것이며, 그 선지자는 성경적 계시를 차용했을 지 모르지만, 성경과 메시아에 대해 불충분하며 부정확한 결론을 맺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관점은 첫 세기 동안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어떻게 이해했는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무슬림 가운데 우리의 과업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 경전
예수님께서는 다른 경전들의 문제를 예배 장소에 대한 응답보다 더 단순하게도 다루시고 더 복잡한 방법으로도 다루셨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라고 말씀하시면서 유대인 경전의 우위를 넌지시 말하긴 했지만 경전에 대해서는 그 여인의 개념에 직접적인 대립을 단순히 피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셨다. 여기에서 이 문제가 조금 더 복잡해지는데, 그 이유는 실제적인 의미에서 예수님 스스로가 당신이 이 땅에 사셨을 때에 성경을 현재적으로 “만들어가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그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함께하심을 통하여 이틀 동안의 “살아있는 성경”을 주셨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바로 이 살아있는 성경을 남기셨으며, 결과적으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물로 여기는 신약 성경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마리아 경전에 대한 경시로 예수님 사역의 일부라는 그 어떤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이후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사역에서 (행 8), 우리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모범을 따랐음을 보게 된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인 신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여기서도 우리는 사마리아 오경의 사용이 금지되어야 하는지 아닌 지에 대한 아무런 논쟁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예수님의 명백한 선언을 기초로 한다면, 구원은 경배의 대상을 알고 있는 유대인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반면에 사마리아인들 그것을 알지 못했고 사마리아 모세오경은 예수님에게 용인될 수 없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접근은 이를 강조하지 않으셨으며 사마리아본의 오류에 대해 논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상황화된 언어에 대한 예수님의 접근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종교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셨다. 우리는 아마도 “생수(living water)”에 대한 그의 대화가 얼마나 상황화된 것인지 놓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마리아의 지혜 문학은 “생수”에 대한 무수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브라운 1971:459). 예수님은 은유의 내용이 자신을 향하도록 선택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사마리아 종교 용어를 비판적으로 사용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마리아인은 타헤브(Taheb)가 특히 그리심 산 위에 나타나 진정한 예배를 회복시킬 것을 기다렸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진정한 예배에 대한 주제를 가르치신 것은 우연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이를 행한 그 상황을 주목해서 살펴보자. 사마리아인들은 타헤브가 모세에 의해서 약속된 선지자일 것임을 믿고 있었다 (신 18:15~19.참고 브라운 1983:171~172). 그러므로 예수님이 한 선지자라고 하는 그 여인의 선포는 예수님을 타헤브라고 믿었을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요 4:19). 그것은 이후에 따라 나오는 그녀의 진정한 예배에 대한 질문을 볼 때에 (사마리아인들은 타헤브가 진정한 예배를 회복할 것을 믿었기에 그가 타헤브라면 타헤브에 대하여 당연히 안다고 생각되는 주제였을 것임: 참조 브라운 1983:171~172) 그녀는 자신이 타헤브 그분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감정을 것을 더욱 육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예배에 대한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셨고 효과적으로 그가 바로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는 그 타헤브임을 믿게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리심에 대한 사마리아인의 믿음이 옳다고 단언하지 않으셨다: 실제로 그는 직접 그 믿음을 바로 잡으셨으며(correct) 변화시켰다(transform) (요 4:21~2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종교적 어휘와 사마리아주의에 대한 개념들을 그토록 자유롭게 사용하시고 심지어 당연한 것으로 여기셨지만 그처럼 비판적으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모든 사마리아인의 믿음이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초점을 자신에게로 가져오실 때 거기에는 수정(correction)과 변화(transformation)가 이루어졌다.

결례에 대한 예수님의 접근
무슬림과 크리스천의 만남에서, 우리가 다가가려는 무슬림은 결례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이 상황은 요한복음 4장에서는 그 반대가 된다.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한 “불결한”(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에) 사마리아인에게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서로를 분리시켜 놓았던 문화적이며 의식적(즉 종교적) 금기를 지키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반대 상황에서는 과연 어떻게 하셨을까? 그가 복음으로 다가가려고 하는 사람들과의 장벽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들 관점의 의식적인 청결함을 받아들이셨을까?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볼 수는 없지만, 바울은 확실히 이렇게 하였고, 디모데에게도 유대인에게 받아들여지도록 할례 받도록 하였을 때에 그렇게 하도록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전 9:19~23,행 16:3).바울 자신의 말에서, 그는 유대인 가운데서는 “율법 아래 있는 자로서” 살았지만 이방인 중에서는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자로서” 살았다. 그리고 바울은 그가 예수님의 모범을 따른 것처럼 우리도 그의 모범을 따를 것을 권하고 있다 (고전 11:1).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의식적 결례를 심지어 제쳐놓으셨기 때문에 나는 그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결례도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접근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접근으로부터 다음의 교훈을 요약해 보며 또한 이것들을 오늘의 우리 무슬림 사역가운데 적용해 보자.

1. 공동체내의토착적예배.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인은 예배에 대한 자기 자신의 관점으로 구별된 종교를 나타냈다. 유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극단의 이교도들이었다. 게다가 종종 그들은 유대인에 의해 귀신들린 것으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대다수의 크리스천이 이슬람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이 사마리아인들을 대하였다.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의 “종교”에서 떠나라고 하는 예수님의 명령을 우리는 볼 수 없다.
예수님과 후의 사도들은 명백히 사마리아 사회 내부에 신자들의 공동체를 심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교회가 되었다. 이슬람 상황에서 그러한 적용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슬람 사회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진정한 예배자들의 믿는 공동체를 세울 것에 대하여 기대하자.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틀 동안 사마리아에서 어떻게 머무셨다가 떠나셨는지를 보았다. 그곳에서는 신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해주거나 그들을 대신하여 결정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던 동안 그들에게 보여주셨던 진리에 두었으며, “그들 자신들의 것”을 스스로 발전시키도록 남겨졌다. 예배의 실행과 다른 문제들에 대한 답변들이 외부자 또는 “선교사”들의 손에 놓여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도 충분한 시간 동안 그들을 관찰하기 위하여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교사”(이 경우 예수님)는 떠났다. 오늘날의 선교 지도자들이 새로운 신자들을 단지 이틀 동안만 가르치는 것에 대한 불안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혼합주의로 향할 수도 있는 그들의 성향에 대하여 지나칠 만큼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건설적 번영을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곧 다른 종교, 다른 경전 그리고 비슷한 신학적 주제에 대하여 다른 개념을 가진 상황 내부에 그대로 남겨놓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 “삶에 충격을 주는 진리(Truth-impacting-lives)”가 이루어 낼 진행 과정을 신뢰하셨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2.논증없이말씀을주심. 사마리안 경전은 내용과 형식이 유대경전과는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이 엄청난 도전이 되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셨는가? 우리는 사마리아 지도자들과 유대경전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논쟁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그는 이틀 동안 “살아있는 말씀”을 주셨고 진리를 가르치시고 사마리아인의 가슴 속에 그 진리 자체가 역사하도록 하셨다.
비록 모든 신자들이 성령을 위한 성전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말씀”을 그대로 복사할 만한 장소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며 우리의 언어는 성경으로 정경화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원리는 남아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글, 오디오, 비디오, 말 등으로써) 성경적 진리를 주고 그 진리가 무슬림들의 마음 속에서 일하시도록 하자. 새로운 무슬림 신자가 말씀을 빠져들기 시작하였을 때에 꾸란에 대한 어떤 논쟁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반복적으로 경험해 왔다.

3. 종교적용어에대한채택과변형(Adoption and Transformation).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크리스천과 무슬림과의 관계처럼 신학적 유사성을 가졌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잘못된 개념을 수정, 변형시키시면서 어떻게 사마리안 용어를 자유롭고도 비판적으로 인정하시고 사용하셨는지 보았다.
다양한 무슬림 사역에서, 우리는 이슬람 용어를 사용해야만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자유롭고 비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의미의 용어는 무엇인가? 예를 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마흐디(Mahdi)’라는 용어 또는 꾸란에 있는 예수님의 칭호인 ‘깔리마뚤라(Kalinatullah; 하나님의 말씀)’ 및 ‘루흐-알라(Ruh-allah; 하나님의 영)’와 같은 용어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들을 비판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성경적 내용으로 이 같은 용어에 대한 무슬림의 이해를 변형시키고 수정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타헤브(Taheb) 역할을 인정하셨지만, 진행과정 속에서 그 말을 변화시키신 것 같이(요 4:21~23),우리도 이슬람 용어를 자유롭지만 비판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 자신의 모범처럼 우리 노력의 최종 결과는 항상 그에게 향하도록 해야 한다.

4. 이슬람식결례에대한조정.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이 불결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사역 성취를 위해, 예수께서는 그 선을 기꺼이 넘으셨으며 불결하고 부정한 사마리아 여인에 의해 “오염된” 물을 기꺼이 받으셨다. 이러한 금기는 단순히 문화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문화와 종교 간의 구분은 서양인들처럼 삶의 요소가 나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이와 같은 구별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의 무슬림들처럼 총체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며, 어리석은 것이다.
결례에 대한 이슬람적 개념의 조정은 우리가 왼손 사용하는 것을 절제하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무슬림의 관점에서 여성의 정숙해 보이는 의복 착용과 같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세정식이나 부복하는 기도 자세, 기도 시에 의식문 사용, 말씀을 읽기 전에 성경에 키스하기, 특별한 천으로 성경을 감싸거나 성경책을 가장 높은 선반 위에 두는 것 등을 지켜야 할 것인가?

교회개척인가 하나님 나라의 씨 뿌리기인가
이 글 전체적으로 기초하고 있는 한 가정에 대해 질문해 보자. 본인은 예수님의 사마리아 사역이 교회 개척의 한 모델로 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진짜로 “교회개척” 사역을 하셨던 것일까? 이 질문의 대답은 은유적 표현인 “교회 개척”이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 즉 “교회”와 “개척”이라는 말의 합성어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좌우될 것이다. 우리의 이해 속에서 이 말은 이미 어떤 모양을 갖추고 있다. 나는 그것이 성경에서 의미하는 바에 따른 것이기 보다는 “교회”가 어떤 것이며, “개척”이 어떤 것이라고 하는 우리의 생각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사막에서 오토바이 타면서 여름을 보내곤 했었다. 어느 날, 내 사촌이 오토바이를 운전할 동안 나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앞쪽에 신기하게 생긴 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손을 앞쪽으로 뻗어 그 돌을 가르쳐 보였다. 순간 우리의 오토바이는 그 쪽으로 방향이 틀어지면서 결국 선인장 가시들이 등에 박히고 말았다. 요점은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그것을 향해 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무슬림들 가운데 교회개척을 하는 많은 선교사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예수님이 전혀 의미하지 않았던 그러한 “모델”을 바라보면서 나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전 시대의 문화 제국주의의 모습을 가지고 방향을 잡고 있는 선교사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역동적 등가”를 적용한 성경번역이라든가 “토착적인 교회의 개척”과 같은 생각을 갖도록 준비되었다. 그러나 본인이 확신하는 것은 우리가 “교회”라는 말을 떠올릴 때 갖게 되는 의미가 분명 완전하게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며 독단적인 우리들 각자의 경험에 따라서 그리고 우리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그 정체성을 부여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험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위험을 안고 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클레시아)라고 언급하신 것은 고작 3번뿐이며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라고 말씀하시길 좋아하셨다. 어찌하거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림은 회중의 조직으로 서구에서 만들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교회”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분명 교회의 의미 안에는 “회중적인” 요소가 있다. 특히 바울이 에클레시아라고 이름하여 사용한 것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시각에서 본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림을 생각하며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다. 이 두 개념, 에클레시아와바실레이아는그정체성이뚜렷이구별되는것은아니지만, 또한 서로 떨어져 각자 독립하여 생각해도 안된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하나님 나라는 여러 종류의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다. 씨를 뿌린다는 것은 그 씨를 내어 보내는 것이다. 거기에는 성장이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세워지고, 구조를 갖추며, 훈련되고, 지도를 받으며 또한 잘 이루어져야 하는 조직으로써의 교회와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가! 씨 뿌리기는 또한 신자들을 “모으는” 갓과는 매우 다르다. 씨를 뿌리는 것은 추수 때 밀알을 거둬들이는 것과는 상반되는 것으로서 씨앗이 “아래로 그리고 속에(down and in)” 박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주인이 가르기를 망설이도록 거친 들판에서 가라지와 밀이 함께 자라나는 것과 같다. “모이는” 혹은 “추수하는” (즉, 우리가 종종 “교회개척”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나타나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 밀(좋은 씨앗으로부터 자라나는 좋은 밀; 알곡)을 다른 가라지들 가운데에서 자라도록 그대로 둘 수 밖에 없다. 여기에는 혼합주의의 위험도 없다. 왜? 알곡은 가라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알곡은 알곡일 뿐이다. 좋은 씨는 그곳에 가라지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심겨지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법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전혀 믿지 않는 다른 유대인들(가라지)과 함께 회당과 성전에서 하나님을 계속해서 경배하며 예수님의 길을 함께 따라갔던 유대인 신자들(밀)을 볼 때 알 수 있다. 다른 신자들과의 친교는 그 외의 다른 곳에서도 이루어졌다 (행2:46-47). 따라서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무슬림들 또한 사마리아의 믿는 자들이 그 당시에 그러한 것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한 알의 겨자씨와 같다. 처음은 매우 작은 것으로 시작한다. 예수님과 관련해서 아주 작게 말이다. 그러나 새들이 그 가지들을 빼곡히 채울 때까지 계속 자라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그것이 아주 작든 혹은 중요치 않아 보이든 “심어졌는가(planted)”에 초점을 맞춘다. 어떤 선교사들은 단지 두 명의 믿는 자가 있을 뿐이기 때문에 “개척된 교회(planted church)”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의 생각은 예수님의 시각에 완전히 낯선 것일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밀가루 반죽 속에 있는 누룩과 같다. 이것 또한 “아래로 그리고 속에(down and in)” 들어가서 결국은 전체를 부풀게 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퍼져가며 자라나면서 그것이 닿는 모든 곳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런 관점과 현저한 차이를 볼 수 있는 것이, 무슬림 사역을 하는 많은 선교사들이 한 종족 내에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그 종족에서 사람들을 뽑아 내와서 그들을 모아 모양을 갖추는 그러한 교회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교회는 하나의 회중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운동이며 삶이고 유기체이며 씨앗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교회는 잡초 속에서, 바위 틈에서, 반죽 속에서 모든 종류의 다른 것들 속에서도 자라나며 생명을 유지한다. 우리가 무슬림 가운데에서 교회를 심고, 개척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시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이미지를 반드시 회복해야 할 것이다.
“개척”, 다른 말로 “교회개척”이라는 문구는 그 자체로 좋은 용어이며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것들을 다 전달한다. 그러나, 이 “개척”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어떤 건물이나 기관과 같은 기능적인 모습을 쉽게 연상하게 되는 “교회”라는 단어와 합쳐질 때에, 이 비유 가운데 들어 있는 자연적이며 유기적인 요소들을 쉽게 왜곡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교회” 뒤에 “개척”이라는 말을 넣어 사용할 때 우리는 보통 건물을 짓고, 조직하고, 그리고 모이고 세워가는 한 교회를 생각한다. 선교의 전 과정을 볼 때에 이러한 개념이 – 우리가 진정 믿음의 공동체들을 모으고자 할 때에- 그 일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인다는 생각”의 과도한 강조는 예수님의 “개척(planting)”에 대한 관점을 온전하게 가져오지 못한다.
따라서, 본인은 새로운 비유적 표현인 “하나님 나라의 씨 뿌리기(Kingdom Sowing)”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제안한다. 무언가 심기 위해서는(to plant) 우리는 한 특정한 장소 혹은 한 그루의 나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씨 뿌리기는 씨앗을 자유롭게 넓게 퍼져나가도록 공중에 흩뿌리는 것이다. 뿌리는 사람은 모든 씨앗은 아니더라도 자기가 뿌린 그 대부분의 씨앗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날 것이라고 믿는다. 때문에 지금은 우리가 “교회 개척”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씨 뿌리기”를 생각하며 예수님의 비유적 표현의 실제적인 의미로 돌아올 때라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의 씨 뿌리기” 비유는 요한복음 4장에 있는 예수님의 실제 사역과 정확한 일치를 보인다. 요한복음 4장을 우리가 연구해보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전파되는가에 대한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완전하게 맞아 들어간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씨앗이 심긴 것처럼, 밀이 자라는 것처럼, 누룩이 퍼지는 것처럼 그렇게 전파되고 자라나며 유기체적 운동을 보이게 될 것을 단지 계획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하신 모든 것이 다 그 목표를 조장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선교이론과 실천이 실제적으로 그러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인지 물어보는 것도 현명할 것이다.
비유적인 표현들은 우리의 목표점을 안내하고 형성하는 고유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을 잘 설명하고 함축하고 있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하나님 나라의 씨 뿌리기”라는 말이 더욱 적합하다고 믿는다. 최소한 “교회개척”이라는 오래된 용어에 성경적 의미를 다시 채워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결론
사마리아에서 하나님 나라의 씨를 뿌리신 예수님의 모범은 이슬람 상황 속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하나님 나라의 씨 뿌리기는 무슬림 공동체라는 종교-문화 세계 안에 믿음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지속되기를 기대하고 추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유대주의에서 초기 교회가 궁극적으로 벗어난 것처럼, 결과적으로 신자들이 무슬림 종교 공동체를 벗어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인은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1 세기경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들로부터 그렇게 된 것처럼 무슬림들 쪽에서 그러한 일이 주동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무슬림의 종교-문화적 세계 안에서 신자들의 공동체 형성은 이슬람적 장소와 예배 방식을 포함할 것이다. 이것이 사마리아에서 일어났던 것이며 (요 4, 행 8), 이는 또한 예수님께서 비유들, 특히 밀가루 반죽 및 알곡과 가라지 비유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씨 뿌리기’를 가르치셨을 때 기대하셨던 바이다.
이슬람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 씨 뿌리기는 꾸란을 성경으로 대체시켜야 하는 것과 같은 대결적 노력이 필요치 않음을 의미할 수 있다. 최소한 시작 시점에는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안 경전에 대하여 불충분한 것으로 믿으셨던 것이 분명해 보이는 반면 그것에 대한 결점은 거의 언급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진리가 그 자체로 뒤흔들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믿으셨기에, 우리 또한 반죽을 변형시키는 누룩처럼 그의 진리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인쇄물이건, 오디오건 비디오이건 암송된 말이건 낭송으로 들려지건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효과적인 스타일과 형식을 통해서 우리 친구인 무슬림들이 진리를 알게 되도록 열정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씨 뿌리기는 진리가 그들의 종교적 어휘를 포함한 무슬림들의 언어 속에서 의사소통 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때에, 개념들이 내부로부터 변화될 것이다. 비록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적 타헤브(Taheb)의 역할을 인정하셨지만, 그는 또한 그 개념을 변형하셨다. 우리가 혼합주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진리의 심장이 어떤 어휘를 만나든지 그것을 바로 변형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씨 뿌리기는 우리 무슬림 형제들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양식을 수용하기에 성육신적이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비록 그 사회에 속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들의 세계에 남아 있어야 한다. 많은 행동, 관습 그리고 가치들이 믿는 공동체를 통해 유지될 것이며, 그러한 것들은 타문화 선교사에 의해 수용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비성경적인 가치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믿는 자들을 통해 도전 받고 변형될 것이다 (요 16:13).
본인은 이 글에서 제안한 것들 대부분이 이미 어느 곳에선가 회자되었고 논의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 특별히 사마리아에서의 그것이 우리에게 이 방향을 명백히 지적하고 있음을 겸손하게 제안하는 바이다. 그에 대한 복종과 신실함이 무슬림 세계에 하나님 나라의 비전 성취를 향한 그의 발걸음을 우리가 걸어가도록 손짓한다.


참고문헌

Brown, Colin (Editor) 1971 TheNewInternationalDictionaryoftheNewTestament
(Vol. 3). GrandRapids:ZondervanPublishingHouse.

Brown, Raymond E. 1983 TheGospelAccordingtoJohn(Vol.1).GardenCity,NY:
Doubleday and Co., Inc.

Edersheim, Alfred. 1971 LifeandTimesofJesustheMessiah.GrandRapids:Eerdmans
Publishing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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