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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선교단체 > 바울선교회 등록일 2006-11-06
작성자 관리자 (admin)
회교도를 구원하자 / 중국 이슬람 2
바울선교회지 103호 2006, 11.12월호

2. 위구르족의 민족사 개략

(1) 민족사
744년 동돌궐족(지금의 몽골지역, 신장은 당시 서돌궐족 지역)이 쇠퇴하자 오르혼강(몽골 북부를 흐르는 강, 전체 길이 1,124㎞) 기슭에 도읍을 정하고 위구르 제국을 건설한다. 약 100년이 지난 840년 동투르크스탄에서 진출한 키르키즈와 약 40년간의 전쟁 끝에 멸망 당한다. 키르키즈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위구르인의 조상인 회골인들은 돌궐문자에 마니교를 국교로 삼았다. 제국이 붕괴된 뒤 위구르인은 남하하여 세 지역으로 흩어지게 된다. 지금의 감숙성, 신장 북부의 투루판과 남부 카스 지역이다. 각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왕국을 건설한다. 신장 지역의 두 왕국은 13세기 초 1209년 몽골의 징기스칸에 의해 점령된다. 840년 위구르제국이 멸망한 후에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서 위구르인들은 내지의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고 북방 유목 민족으로는 처음으로 정착 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목축업에서 농업으로 전환 됩니다. 이 과도기는 현대 위구르인들의 사상 체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시기였을 것이다. 서역으로 이동한 위구르인은 소그드 문자를 기초로 하는 위구르 문자를 사용하게 된다.

(2) 인구 분포
신장의 위구르족은 약 82%(2000년 통계)가 신장 남부에 거주하며 전신장의 인구 중 45%(2000년 통계, 한족은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공식 통계로 인구 약 900만인 중국의 55개 소수 민족 중 5번째로 큰 인구를 가진 민족이다.

(3) 언어와 문자
언어는 우랄 알타이어계의 돌궐어족에 속하며 문자는 이슬람화 이후 아랍어의 자모음을 기초로 만든 표음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위구르어 단어 중의 외래어들---아랍어(이슬람), 페르시아어(배화교-조로아스터교, 마니교의 영향), 러시아어, 중국어(증가 추세), 몽골어(우루무치-아름다운 목장이란 의미의 몽골어).

(4) 위구르족의 한민족(?民族)과의 교류
중국의 원나라 시대, 한국의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골 관리들이 당시 행정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앙아시아계의 무슬림들을 대거 수행하도록 했다. 고려사에서 등장하는 회회인(回回人)은 주로 투르크계 위구르인들을 의미하는데 당시 몽골이 위구르문자를 공식어로 채택하고 재정과 교역 행정 업무를 대부분 위구르인이 관장하도록 했다. 한국의 오늘날 덕수장씨의 시조로 알려진 회회인 삼가(三哥)는 1274년 고려 충열왕비가 된 원나라 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와서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던 사람으로 충열왕으로부터 장순룡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고 고려 여인과 결혼해서 한민족에 동화된 무슬림이었다. 당시 고려에 왔던 위구르인들 가운데는 원나라의 통역관으로 활동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지금의 개성에 타운을 이루고 사원도 건립하여 살았다고 한다.

조선 초에는 사역원의 외국어 시험 과목에 위구르어가 포함되었고 공식 외국어로서 통역관 시험에 통과된 사람들에 대한 위구르어 연수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글 학자 3인 중에 위구르어가 능통한 학자도 있었다고 한다.

한민족과 신장의 위구르족의 역사적 관계는 교류 역사를 볼 때 멀고도 가까운 민족이라 할 수 있다.

3. 위구르족 이슬람화 촉진의 시대적 요인
늘 궁금하던 것 중의 하나는 어떻게 다신교를 숭배하던 민족이 물론 전쟁의 강압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쉽게 일신교 종교로 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중국학자들에 의하면 위구르인 가운데 이슬람화가 촉진된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이슬람이 전파되기 전까지 이미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불교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쇠퇴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당시 사회 경제적 상황에 대한 적응력과 생명력의 취약함에 있다.

(2) 당시 사회관계의 변화에 대해 상대적으로 시대에 부합하는 이슬람의 적응력과 위구르족 가운데 성행하던 무역업 또한 이슬람 전파를 촉진시켰다고 한다.
(3) 원나라가 지배하던 시대적, 종교적 개방 물결을 따라 3차에 걸친 도약의 기회가 주어졌다.

4. 이슬람화가 위구르족에게 끼친 영향과 의의

(1) 이슬람화로 개방적이던 종전의 유목민족과 사막 문화의 특성이 배타적으로 바뀌게 됐다.

(2) 다민족으로 구성된 회족의 새로운 민족의 형성 역사처럼, 동화된 타민족을 포용해서 근대의 위구르족을 새롭게 태동케 하는 사상적 통일과 민족의 정체성을 제공하는 이념이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개종은 민족을 이탈하는 것이며 심각한 위기감을 경험한다. 한마디로 “호적을 파오라”는 도전으로 들릴 것이다.

5. 신장 이슬람권과 위구르족 선교의 중요성

(1) 신장은 중앙아시아 5개국, 중동, 팔레스타인으로 이어지는 이슬람 축의 주요 관문 지역에 위치한다는 지리적인 중요성이 크다.

(2) 위구르족의 중앙아시아 선교의 자원적 가능성 때문이다.
a. 언어: 위구르어는 중앙 아시아권에서 광범위한 소통 능력을 가지고 있고 중앙아시아의 선교적 언어라 할 수 있다.
b. 문화와 종교의 유사한 정체성.
c. 같은 투르크계라는 혈연적 동질성.

(3)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이슬람의 동진과 복음의 서진이라는 운동력이 충돌 대립되어 서로 양보가 불가하기에 영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복음의 중앙아시아를 향한 서진을 위해서 빠질 수 없는 연결 고리라는 점에서 위구르족 선교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28기 간증
새로운 헌신 (28기 하영숙 선교사)

세계지도를 보면서 아이들과 함께 그 땅을 상상하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 속에서 늘 강조를 했습니다. “한국은 참으로 좁은 나라야 우리가 예수님을 품고 가서 그 나라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그곳에 살아야 해” 하면서 10년 후의 아이들 모습을 그려보면서 나 나름대로의 모습도 그려 보았었습니다. 그때 난 영어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1990년도에는 선교사란 단어가 저에게는 낯설던 때였습니다.

그러던 중 92년 세계 선교 한국대회에서 “누가 이 나라를 위하여 중보할까요? 100% 이슬람권의 나라 아프리카의 모리타니아!” 저도 모르게 그 나라의 중보자가 되겠다고 혼자만 조용히 생각하면서 전혀 생소한 그 나라에 대해서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정보도 없이 막연한 기도를 했었습니다. ‘저 이슬람 국가의 흑인들, 불쌍한 영혼을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소서…’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제가 생각만 해도 제 삶 가운데 그대로 실현이 되는 경험을 주셨습니다.

새롭게 시작된 인생의 ‘광야 학교’에 입학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어떻게 가져야 할지 모를 때에 “하영숙 일어나라” 말씀해주시며 새벽을 깨워주셨습니다. 그 후로 묵상하는 시간을 사모하게 되었고, 그 시간을 정말 연애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기다리게 되었고, 때론 제 눈을 밝히셔서 아이들에 관한 비전을 보게 해주셨고 힘도 주셨습니다.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던지...

아이들을 제2의 선교사로 키우려면 영어도 공부해야 한다고 캐나다로 유학을 보내고 나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2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프리카 땅 일만 평을 사라.” 진정한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의 생각대로 한국의 어디 불모지가 없는지 알아보고 다니는 일도 했지만, 한국 땅이 아닌 아프리카라는 것은 기도를 통해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 넓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어디요” 라고 물었을 때 남아공이란 나라에 대한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 생각도 믿음으로 받고 학교에 사표를 쓰고 언어를 먼저 배우면서 그 문화를 익히자고 다짐하면서 1996년 6월 20일 남아공으로 남편이 먼저 출발을 했습니다.

1997년에 시편 110:3절 말씀에 의지해서 나의 남은 삶을 즐겁게 헌신할 것을 고백하며 남아공에 도착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선교사로 살고자 했습니다. 제가 훈련되어져야 할 부분이 더 남아 있었기에 남편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과 인내와 절제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 영혼을 사랑하는 사랑이 없음을 깨닫고, 오직 주님과 함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기름을 항상 채워야 함을 새삼 느끼며 다시 새롭게 재 선교의 헌신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슬픔 속에서도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이웃을 보내주셔서 함께 선교 센터를 이루기 위해 바울선교회를 찾아 한 가족이 되고자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맨’으로 성장하기에는 참으로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힘써 배우게 하시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날마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야 함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바울 훈련 6개월을 통해서 이동휘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 ‘불편하게 삽시다’를 순종으로 지키시는 거룩한 성도님들을 보면서 나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매 시간마다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으로 훈련을 은혜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새벽을 깨우면서 많이 우는 시간은 저를 정결케 하는 하나님의 자비의 시간이었습니다. 28기 동기생들과의 생활은 연장자이어서 가족처럼 아들딸들의 대접을 받는 흐뭇한 나들이었습니다. 훈련을 통해서 배운 영어, 인내, 사랑 등의 실천을 하루 속히 남아공에 흘려보내기 위해 먼저 남아공에 가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의 끈이 단단히 묶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그것이 제가 사는 유일한 생명의 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팀 사역으로 함께 하며 첫째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선교사로, 둘째는 현지인에게 배우며, 앞으로 세워질 남아공의 현지인 훈련 센터에서 현지인들이 예수님의 본을 닮아 갈 것을 믿으며,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들어주며 위로하며 함께 울고 배우며 남아공에서 전 아프리카 대륙은 물론 전 세계에 보내질 현지인 선교사들을 세우는 데 전력을 다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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